▲ 무한궤도의 <그대에게>가 두 번째로 울려퍼질 때, 시민들 사이에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가 등장했다. ⓒ뉴스1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남인 측근에 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언젠가 그가 김영삼의 측근을 만났을 때 그 측근은 경상도 사투리로 “이제 마 우리 쪽으로 와라”고 했고 그는 그 사투리를 듣는 순간 코끝이 찡했다고 한다. 십여 년 듣지 못했던 고향 말이 가지는 마력적인 효과에 놀란 그는 그 후 정치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영남사람을 만나는 것을 되도록 피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역정서를 그렇게 첨예하게 경험했던 세대가 아니라 이 에피소드의 아픔을 직접적으로 느끼지는 못한다. 하지만 지역균열에 이어 세대균열이 문제가 되는 시대에 세대의 방언에 대해서도 비슷한 상황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어제 문재인 후보의 토크 콘서트 형식의 광화문 유세 “춥다! ‘문’ 열어!”를 보고 느낀 생각이다.

‘세대균열’은 여론조사 결과로는 뒤지고 있는 문재인 후보 측이 기대를 걸어볼 수 있는 유일한 디딤돌이다. 캠프 관계자는 “오늘 광화문 유세를 제외하고는 놀랍게도 대구 유세의 반응이 가장 폭발적이었다”고 귀띔했다. 대구의 2~30대들이 거리에 몰려 유세가 끝난 후 후보가 갇힐 지경이었다는 것이다. 2002년 대선에서 이루어졌던 386세대와 그 후세대 유권자들의 세대연합이 십 년 후에 다소 다른 방식으로 실현될 수 있는 상황이다.

“춥다! ‘문’ 열어!”는 애초에 그 지점을 타격하기 위해 만들어진 행사라고 할만했다. 광화문이란 공간이 어울리지 않아 보일 정도였다. 현장에 나온 민주당 관계자들도 “이렇게 할 거였으면 차라리 홍대에 가는 게 낫지 않았나”라고 말할 정도였다. 캠프가 쓰는 개사곡들은 90년대 중반부터 2천 년대 중반의 인기가요였고 자원봉사자들은 이 노래들에 맞춰 운동권 학생들이 ‘마임을 추듯’ 율동을 선보였다. 캠프 측에서는 이를 플래시몹(flashmob)이라 불렀다. 납득은 가지 않았지만 의도는 짐작이 가는 호명이었다. 마임 같은 플래시몹 뒤로 비보이팀이 나와 댄스를 선보였고 조국 교수는 손 글씨 가득한 스케치북을 넘기며 2003년에 공전의 히트를 친 <러브 액츄얼리>의 명장면을 재연했다. 여기저기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대선 정국에서 잊히는 게 안타깝다며 문제가 많았던 참여정부보다 잘할 수 있다고 약속해 달라는 김여진의 말이 다소 튀어 보일 정도였다.

▲ 조국 교수는 <러브 액츄얼리>의 음악이 나오는 가운데 추운 날씨에 얇은 스케치북을 한장씩 넘기느라 고생을 했다. ⓒ뉴스1

행사의 절정은 1988년 대학가요제 대상을 받은 무한궤도의 <그대에게>가 흘러나오며 문재인 후보가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행사를 기획한 탁현민은 ‘메인MC’로 나서 처음 <그대에게>가 울려 퍼질 때 사람들의 기대를 하게 한 뒤 “이건 연습이었다”라고 말하는 재치를 선보였고 두 번째로 울려 퍼질 때 후보를 영접했다. 1973년생 탁현민이 스무 살이나 많은 문성근을 ‘보조MC’라 부르며 “내가 발언권 주지 않을 땐 얘기하지 마시라”고 타박(?)하는 모습도 세대의 상징성이 있었다. 십 년 전 개혁당 창당 발기인대회에서 피를 끓게 하는 명연설로 노무현 지지자들을 격동시켰던 그 문성근이 후배 앞에서 ‘허허’ 웃고만 있었다.

1970년대생과 1980년대생에 대한 야권의 ‘접근’은 이날 유세를 통해서만 나타난 현상은 아니다. 유시민이나 금태섭이 다나카 요시키의 《은하영웅전설》을 인용하는 세태는 십 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사회주의를 막 청산한 70년대 학번과 80년대 학번에게 환멸의 대상이었던 저 90년대 대중문화가 이제 그들이 후세대에게 접근하기 위한 의미 있는 방편이 되었다.

흔히 386세대의 응집성의 원인에 대한 평가로 나오는 것이, 그들처럼 정치적 목표로 뭉쳐서 무언가를 집단적으로 해본 세대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사후적 평가는 어찌 보면 모든 세대에게 적용될 수 있다. 가령 70년대에서 80년대까지 태어난 이들이 누렸던 대중문화에 대해서도 응집성에 관한 얘기를 할 수 있다. 그 이전 세대에게 문화가 계급격차와 정치적 신념에 따라 분열되는 장이었다면, 이 세대는 향유하는 방식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대부분의 가정이 구입한 TV를 보는 한 같은 문화를 공유했다. 그러한 삶의 양식은 지나치게 발달된 인터넷망을 통해 제각기 보고 싶은 ‘미드’를 다운 받아 보는 그 후세대의 것과도 다르다. 이들에겐 TV를 보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알 수밖에 없었던 시청률 40% 이상의 드라마에 대한 집단적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 문재인과 유시민의 포옹. 유시민 진보정의당 전 의원이 등장하는 순간 유세 현장 시민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뉴스1

민주당이 이 세대에 접근하기로 한 것은 정치공학적인 측면에서도 자연스러울뿐더러 이번 선거라는 맥락을 떠나서도 의미 있는 일이다. 부모세대가 이룩한 산업화의 과실인 대중문화를 향유하며 성장했지만 나중에 커서 그 삶의 질을 재생산하는 일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들의 삶의 문제에 접속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접근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접근이 이루어진다면 생물학적으로 볼 때 향후 한국 사회에서 더 오래 살아가게 될 어떤 층을 지지자로 확보하게 되는 것이 된다. 특히 진보운동의 참여자들은 진보정당과 운동이 무력화되는 원인 중의 하나가 이 ‘세대적 재생산’의 문제에 지나치게 무심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어떤 진보적 성향의 청년은 ‘노동자 후보’의 유세에 갔다가 문재인 후보의 유세를 구경했을 때 김대중의 영남인 측근이 경상도 사투리를 듣고 코끝이 찡했던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그러나 민주당이 ‘세대 방언’을 흉내 내는 것을 넘어 이 세대의 문제에 진정으로 접근하고, 그 접근이 한국 사회 개혁의 동력이 될 강력한 유권자 연합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에 대해선 회의감이 있다. 일단 인구구성으로 볼 때 이 세대의 ‘쪽수’가 그렇게 많지 않다. 한국 사회의 출산인구는 1971년에 정점을 찍은 후 계속해서 내리막길이다. 이 세대를 확보하는 것이 선거에서 승리하는 방법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번 선거의 경우도 세대균열은 드러내지만 선거에서는 지는, “신만 실컷 내고 싸움에선 지는” 그림이 나올 수도 있다.

▲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 광화문 유세현장의 시민들의 모습 ⓒ뉴스1

또 하나의 문제는 민주당이 사실상 이 세대의 삶을 힘들게 한 주범이기도 했다는 점을 어떻게 반성하고 정책적으로 넘어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1970년대생과 1980년대생 모두가 대중문화를 통해 접근해오는 민주당의 기획을 반기는 것은 아니다. ‘일베’와 같은 극단적인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참여정부 시절 삶이 힘들어진 경험을 통해 ‘민주화’나 ‘민주개혁세력’과 같은 단어에 냉소하는 이 세대 친구들을 만나게 되는 일은 절대 드물지 않다.

아마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세 번 바꾸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한 번은 그의 당선을 통해, 다른 한 번은 그의 통치를 통해, 마지막 한 번은 그의 죽음을 통해 말이다. 첫 번째 것이 어떤 386세대의 재정치화와 어떤 386 후세대의 정치화를 이끌어냈다면, 두 번째 것은 상당수 386후세대를 냉소주의와 허무주의로 이끌었다. 그리고 마지막 것이 만들어낸 ‘깨어있는 시민’이라 불러야 할 정치화된 386 후세대 그룹이 첫 번째 유산과 연합하여 두 번째 유산에 적대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라 봐야 할 것이다. 민주당과 문재인 후보는 참여정부의 유산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인가? 그 이전에 그 유산을 넘어설 수 있단 확신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어 선거에 이길 수 있을 것인가? 민주당과 문재인 후보는 자신들이 이 질문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 토크 콘서트에 참석했던 게스트들이 함께 인사하고 있다. 왼쪽부터 탁현민 교수, 김형석 작곡가, 배우 명계남, 문재인 후보, 조국 교수, 안도현 시인, 유시민 전 의원, 문성근 전 대표대행.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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