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공보물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 없다. 후보의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물론 선거의 전체 모양새를 좌지우지하기도 한다. 후보의 핵심 슬로건은 곧 선거의 의미를 규정하고, TV 광고는 후보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 박근혜-문재인 후보의 공식 선거 포스터ⓒ뉴스1

1997년 DJ의 슬로건에 ‘여성’만 더한 박근혜

이번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는 ‘준비된 여성대통령’을 캐치프레이즈로 한다. 97년 대선에서DJ가 사용했던 ‘준비된 대통령’에 여성만 더했다. ‘준비된’이란 문구를 통해 상대적으로 정치 경력이 짧은 야당 후보와 자신의 강점을 대비하고,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대통령’을 통해 변화와 혁신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전략이다. 애초에 준비했던 ‘내 꿈이 이뤄지는 나라’에 비해서는 훨씬 안정감과 설득력이 있는 정돈된 문구라는 평이 많다.

반면, 문재인 후보는 ‘사람이 먼저다’와 ‘새 시대를 여는 첫 대통령’을 핵심 슬로건으로 하고 있다. 두 슬로건 모두 감성적 호소에 치중하는 문장들이다. 이에 대해 민주당은 “슬로건은 박근혜 후보와 대비해 과거VS미래, 낡은 정치VS새정치, 귀족VS서민, 불통VS소통, 공정VS특권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꿈보다 해몽이랄까, ‘사람이 먼저다’와 ‘새 시대를 여는 첫 대통령’에서 이런 문맥적 의미를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의문스럽다.

'새 시대를 여는 첫 대통령'·'사람이 먼저다', 좋기는 한데...

우선, ‘새 시대를 여는 첫 대통령’의 의미는 벌써 많이 퇴색했다. 새누리당은 문 후보를 향해 ‘실패한 참여정부의 실세’라는 공세를 가하고 있다. 문 후보의 등장 자체가 ‘다시 참여정부를 불러낸 것’이란 공격이다. 결코, 가치중립적일 수 없는 참여정부의 공과가 그대로 문 후보에게 얹혀지면서, ‘새 시대의 첫 대통령’론은 빛이 많이 바랬다. ‘구시대의 막내’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이던 그가 ‘새 시대’를 상징하기까지는 축적된 스토리가 있어야 하는데 문 후보는 그런 과정을 충실히 밟지 않아왔다.

역대, 선거에서 ‘새로운 시대’를 슬로건으로 하여 당선된 이는 2명이다. 92년 대선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신한국 창조’라는 슬로건을 사용했고, 02년 대선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새로운 대한민국’을 캐치프레이즈로 했다. 정확히 10년 마다 ‘새로운 시대’의 패러다임이 반복된 셈이다. 92년 대선에서 김영삼 후보는 ‘문민정부’를 상징했다. 자신이 당선되면 군부의 시대가 종결되고, 문민의 시대를 열린다는 그의 프레임은 그 선거를 지배했다. 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는 권위주의와 특권주의 타파를 상징했다. 이회창 후보에 맞서 ‘원칙과 신뢰가 지배하는 공정한 사회’를 약속했고, 새롭게 받아들여졌다. 슬로건과 후보의 상징성이 제대로 부합한 결과였다.

▲ 문재인 후보의 TV광고 이미지

슬로건과 후보의 상징성이 대응하지 않으면, 설득되지 않는다

하지만 문 후보는 조금 다르다. 후보가 되기까지는 문 후보는 ‘새누리당과 박근혜의 집권을 막기 위해 원치 않았지만 불려나왔다’는 뉘앙스의 언급을 많이 했다. 새 시대를 연다는 의미보다는 정치를 하지 않으려 했지만, 낡은 시대 상황으로 인해 등판했다는 인식이 강했다. 더욱이 단일화 과정에서 그는 어찌되었건 안철수 전 후보보다 ‘낡았다’고 규정됐다. 불과, 10여일 전의 상황이고, 이번 대선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강렬한 기억이다. 그런 그가 갑자기 ‘새로운 시대를 여는 첫 대통령’이란 슬로건을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지 확신하기 어렵다. 지지층에겐 강렬한 메시지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후보자가 존재 자체로 슬로건을 설명해내지 못할 때, 효과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사람이 먼저다’ 역시 썩 좋은 슬로건이라고 하기 어렵다. ‘사람이 먼저다’는 무엇을 말하는지 구체성이 담보되어 있지 않다. 이는 07년 대선의 상황을 복기해보면, 알 수 있다. 당시 정동영 후보는 ‘가족행복시대’를 슬로건으로 했고, 이명박 후보는 ‘실천하는 경제대통령’을 내세웠다. 결과는 아시다시피 정동영 후보의 최다 표차 패배였다. 당시 정 후보의 슬로건은 호감도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반응은 좋았지만 이는 무난한 말이고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문맥이어서 그랬던 것일 뿐, 정작 구체성이 담보되지 않아 후보의 메시지가 무엇인지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사람이 먼저다’와 ‘여성 대통령’의 대비 역시 이 07년의 구도를 떠오르게 한다. 반응은 ‘사람이 먼저다’가 좋겠지만, 실제 구체성과 표를 유인해내는 측면에서는 ‘여성 대통령’이 효과적일 수밖에 없다. 실제, 박 후보가 ‘여성 대통령’론을 주창하면서 4~50대 여성의 지지율이 올라갔다는 조사결과가 있기도 했다.

노무현과 정동영 사이의 문재인

또 다른 주요한 축인 TV광고에서 문 후보의 전략은 02년 노무현과 07년 정동영의 어색한 조합처럼 보이기도 하고, 07년 이명박의 전략을 민주당 버전으로 수용한 것 같기도 하다. 장점만 채택한다는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정확한 방향과 뚜렷한 색깔이 없어 오히려 그게 독이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02년 대선에서 민주당은 ‘변화’와 ‘개혁’을 약속했고, 후보의 이미지는 이에 부합했다. 인간적 매력과 정치적 스토리가 풍부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에 맞춰 TV광고의 방향은 일관됐다. 지금도 선거 홍보의 ‘레전드’로 기억되는 ‘노무현의 눈물’과 ‘기타 치는 대통령’은 가히 ‘신의 한수’였다. 02년 선거 자체가 아예 ‘눈물’과 ‘이매진’으로 기억될 정도였고, 후에 보수진영은 그것 때문에 선거를 내줬단 평을 꽤 오래도록 했다.

하지만 감성적 전략이 언제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도 역시 후보와의 ‘매치’가 중요하다. 02년의 감성적 선거 전략을 민주당은 07년 선거 때도 그대로 투영했다. ‘가족행복시대’라는 슬로건 자체가 ‘경제’를 선점당한 상황에서 대놓고 감성에 호소하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당시 정동영 후보는 삶의 궤적 상 노무현 후보처럼 선명한 ‘변화’와 ‘개혁’을 강조하기 어려웠고, 감성을 자극할 인물의 매력도 훨씬 약했다. 다만 야권이 열세라는 점이 너무나 명백한 상황에서 표를 모아달라고 호소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이 감성적 호소는 그러나 먹히지 않았다.

▲ 고가의 가격으로 논란이 된 광고 속 문재인 후보의 쇼파.

출정하지 못한 ‘출정식’ TV광고가 던지는 불안감

‘출정식’이라고 명명된 문재인 후보의 첫 TV광고는 얼핏 정동영 후보의 전략 위에 노무현 후보를 얹은 인상을 주었다. 문 후보가 집에서 일상적 생활을 하는 모습의 이 광고는 ‘귀족VS서민’의 대립각을 잡았단 점에서 02년 전략의 반복인 동시에 가족행복을 부각했단 점에선 07년 전략의 재탕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의도한대로 나오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 광고 이후 문 후보가 앉았던 의자의 가격이 논란이 되고, 조는 문 후보 곁에서 가사 노동을 하는 후보 부인의 모습에 ‘역시, 대한민국 남자’라는 빈정거림까지 있는 상황이다. 결과적으로 의자 값에 ‘서민VS귀족’의 대립각은 묻혔고, 후보 부인의 가사 노동 장면에 ‘여성 대통령’이 오버랩 된 형국이다.

차라리 안철수의 눈물이 자신의 몫이 될 수 있었단 후보의 발언을 살려 ‘출정식’ 광고를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노무현의 눈물’ 전략을 제대로 차용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것이다. 노무현의 눈물이 인권 변호사로 헌신하고,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싸워온 이력을 보여줬던 것처럼 단일화를 위해 헌신하고 정권교체를 위해 분투하는 문재인의 상황 속에 안철수의 눈물을 잊지 않겠다는 메시지로 갔더라면 ‘단일화를 통한 정권교체’의 이미지가 훨씬 선명하게 전달될 수 있지 않았을까?

공식 선거 운동 사흘째, 가장 중요한 프레임에선 ‘박정희vs노무현’ 구도가 세워지며 새누리당에 말렸고, 슬로건 역시 우위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기대를 모은 TV광고 역시 일단은 신통치 않다. 지역을 누비는 선거 운동은 상투적이고, 후보의 메시지 역시 아직은 파괴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야권 지지자들의 ‘애’가 끊어질 듯하다. 단일후보가 되어 1:1 구도가 되면서 상황은 호기로운데, 실재는 그렇지 않다. 안철수 후보 사퇴 이후 일주일 여간 민주당과 문재인 후보가 보여준 모습은 당최 선거를 이기려고 하는 것 같지 않은 정도로 한가해 보인다는 비판이 거센 가운데 민주당은 단일후보가 됐으니 이길 수 있다는 주문만 외우고 있는 건 아닌지 긴급한 점검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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