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개봉한 영화 <내가 고백을 하면>의 여주인공 김유정(예지원 분)은 강릉에 사는 간호사임에도 불구하고 주말만 되면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에 오는 열정을 보인다. 그녀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구태여 서울로 오는 이유는 간단하다. 문화생활을 즐기기 위해서.

틈만 나면 백석의 시를 읊고,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같은 예술 영화를 즐기는 그녀의 참으로 독특한 취향을 충족시켜주는 곳은 오직 서울뿐이다. 하지만 서울에서도 그녀가 보고 싶은 영화를 상영해주는 극장을 찾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녀가 찾는 영화는 <내가 고백을 하면> 배경이기도 한, 광화문 '스폰지 하우스', 홍대 'KT&G 상상마당' 등 소규모로 운영하는 독립예술영화 전용관뿐이다. 만약 대형 멀티플렉스에 그런 예술 영화가 걸려있는 것을 본다면, 그건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정도이다.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김기덕 영화의 <피에타>도 대형 멀티플렉스에서 보기란 힘든데 말이다.

영화 <터치>는 올해 열린 제17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영화인데 시사회 반응도 평단의 반응도 좋았다. 게다가 주연 배우가 KBS <넝쿨째 굴러온 당신>으로 국민남편으로 급상승한 유준상이다. 주연배우를 좋아한다기보다, 영화평이 좋아서 개인적으로 참 기대하는 영화였다.

역시나 개봉을 앞두고 <터치>를 상영하는 곳을 알아보던 중 놀랍게도 동네 멀티플렉스에서 <터치>를 상영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이 영화 개봉 첫날인 8일, 딱 하루만 상영한다. 물론 그것조차 '교차상영'. 그래서 <터치>를 상영하는 다른 영화관을 알아보니 많지 않았다.

평일에 영화를 볼 수 있는 여건이 안 되는 다수의 관객들은 벌써 극장에서 <터치>를 볼 기회를 놓치고야 말았다. 전국 12개 극장, 서울에는 딱 1개, 그리고 그마저도 고작 1~2회 교차상영한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은 민병훈 감독이 결국 배급사를 통해 '조기 종영'을 요청했다. 구걸하듯 하루 1~2회 상영해서 과연 몇 명이 '터치'를 보겠느냐고 절규하는 민병훈 감독의 외침은 처절했다. 그러나 그것은 민병훈 감독과 <터치>만 겪었던 설움이 아니다. 대부분의 저예산, 독립 영화들이 겪는 현실의 단면일 뿐이다.

그나마 <내가 고백을 하면> 조성규 감독처럼 광화문에 작은 영화관이라도 거느린 제작자는 사정이 좀 나을 것이다. 자신이 만든 영화만으로 스크린 한 개를 오롯이 확보할 수 있고, 그 영화를 보러 일부러 광화문까지 찾아온 관객들은 적어도 맞는 시간대 영화를 볼 수 있으니까. 그러나 <터치>처럼 대기업 배급사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영화는 아예 관객을 만나는 것조차 쉽지 않다. 말이 좋아 12개 극장 확보지, 조조 혹은 늦은 심야시간대 배정이 대부분이다. 결국 직장 생활을 하는 대다수 관객들은 <터치>를 볼 수 있는 기회조차 없다는 말이다.

16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한 민병훈 감독의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교차 상영 관행에 대해 대형 멀티플렉스는 저조한 예매율 실태를 근거로 들이대지만 예매 과정에서조차 대기업 자본이 뒷받침하는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는 차별받는다고 한다. 영화를 찾는 관객들의 추이에 따라 개봉관 상영이 결정되는 극장의 상업 논리를 앞세워 관객들이 들지 않는 저예산 영화의 대부분은 아주 적은 스크린을 확보하고 시작해야 한다.

<MB의 추억>이나 <두 개의 문>처럼 독립영화전용관 위주로 상영하다가 관객들의 끊임없는 요구와 흥행 성공으로 소수이지만 멀티플렉스 상영관까지 진출한 특이 사례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저예산 독립 영화들은 작품성과 별개로 시작과 동시에 극장들의 차가운 외면을 받으며 일찍 문을 닫아야한다. <터치>는 그렇게 빠른 시기에 관객들의 뇌리에서 잊혀질 수밖에 없는 영화들 중 하나였다.

물론 멀티플렉스를 찾는 대다수의 관객들은 <광해, 왕이 된 남자>, <늑대소년>, <브레이킹던part2>, <내가 살인범이다> 등 대기업 배급사의 투자를 받거나 스케일이 큰 상업 영화를 주로 찾는다. 하지만 아무리 소수라고 해도 끊임없이 다양한 영화를 찾는 관객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은 다수의 사람들이 보지 않는 영화를 즐겨본다는 이유로 언제나 선택권을 박탈당해야 했다. 이제는 익숙하기에 더 이상 놀랍지도 않은 현상이다. <내가 고백을 하면> 유정처럼, 제 취향이 좀 많이 특이하지요하고 피식 웃어 보인다.

하지만 어제 아침에 들었던 <터치>의 조기 종영 소식은, 내가 만든 영화도 아니고, 하다못해 소액 투자한 것도 아니고, 그저 관람객 중 하나였을 뿐인데 내 일처럼 가슴이 아프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자식과도 같은 영화를 불과 8일 만에 극장에서 내린 민병훈 감독의 외침은 처절하다. 이게 <터치>만이 겪은 설움인가.

서로 다른 이질적인 요소들이 함께 발맞춰 나갈 수 있는 다양성이 인정될 때, 우리 문화의 저변도 넓어지고 더 크게 번영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사례를 거론하며, 진정한 공생을 추구하는 멀티플렉스의 긍정적인 변화를 촉구하는 김기덕 감독의 일침에 귀 기울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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