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 소재가 되어버린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지만 한때 드라마를 보다 보면 꼭 빼먹지 않고 튀어나오는 국내 드라마의 불문율 같은 대사가 있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주정을 피우는 친구 (혹은 애인을) 붙잡고 남자친구가 "이러지 마. 이건 너답지 않아."라고 말하면 그 말에 열이 오른 주인공이 꼭 던졌던 대사, "나 다운 게 뭔데?!"... 최근 국민 첫사랑 혹은 국민 여동생의 이미지를 오염시키고 있다며 질타를 받는 수지와 아이유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꼭 더불어서 떠오르는 대사다. "이러지 마. 수지, 이건 너답지 않잖아." 아마 그녀들도 외치고 싶었으리라. 도대체 나다운 게 뭐냐고.

곤 사토시 감독의 1998년의 문제작 <퍼펙트 블루> 걸그룹 "챰"의 멤버인 아이돌 미마는 아이돌의 탈을 벗고 연기자가 되기 위해 그룹을 탈퇴하고 팬들에게 안녕의 인사를 고한다. 성인 배우로 올라서기 위해 그녀는 강간씬이 포함된 19금 영화를 촬영하기도 하고 누드사진을 찍는 등의 과감한 변신으로 아이돌 시절 미마의 모습을 잊기 위한 노력을 꾀한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미마는 아이돌을 벗어나 변신을 하고 싶어 했지만 어떤 광적인 팬들은 미마의 이런 변신을, 그리고 아이돌을 버린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점. 그 이후부터 미마의 주변에는 괴이하고 충격적인 사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언제부턴가 자신의 주위를 서성이는 스토커. 생명을 위협하는 듯한 몇 가지 사건들. 그녀의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의 죽음. 더 큰 충격은 어느 순간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배우 미마가 아닌 아이돌 미마의 모습으로 비추어지는 환각 현상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거울 속에 서 있는 저 사람은 누구인가. 도대체 어떤 게 나의 진짜 모습일까.

성인 배우로 변신하고 싶다는 수지. 한 번쯤은 크게 실망시켜야 할 것 같다고 말하는 아이유. 물론 '언젠가는'이라는 두서가 붙었지만. 고쇼에 출연하여 "위험한 소녀들"이라는 명목으로 이와 같은 폭탄 발언을 터뜨린 이후 마치 그 말이 도화선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수지와 아이유를 둘러싼 기묘한 사건들이 터지기 시작했다. 소녀들이 소녀를 버리고 싶어 함으로써 국민 첫사랑 그리고 국민 여동생의 이미지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언젠가 한번 제대로 뒤통수를 칠 거다"라는 아이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실수로 공개된 한 장의 사진은 아이유의 국민 여동생으로서의 입지를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상의 탈의를 한듯한 한 남자와 마치 누워있는 모습으로 촬영된 듯한 이 더블샷은 하필 아이유가 "라면 먹다 태워 먹은 잠옷"이라고 소개한 그 분홍색 파자마와 정확하게 일치하여 한순간 추측을 산더미처럼 부풀려 이미 기정사실화되어버린 상태다. 아이유와 사진 속 남자는 열애 중이며 심지어 이 사진은 아이유의 순결을 의심하게 한다는 것.

마치 사이좋게 배턴을 이어받듯이 아이유의 사건이 터지기 전 수지 또한 그 충격은 다소 약하다 할지언정 국민 첫사랑의 입지가 흔들리는 비난 세례를 맞아야만 했다. 미스에이의 새 앨범이 나오고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미스에이 홍보 대사로 진출한 수지의 활동들이 그녀의 청순한 첫사랑의 이미지를 흔들어놓는다고 분개하는 여론이 생성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일례로 수지는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너 자신을 알라"라는 소크라테스의 명언을 셰익스피어가 한 말이라 착각했으며 이것은 아이돌 수행평가와 같은 시험 답안에 "바다의 왕자 박명수. 법정 스님 해골 물"이라고 적어냈던 사례를 돌이키며 수지의 지성을 의심하게 하는 도화선이 되어버렸다.

더 큰 문제는 수지가 고쇼에 출연하여 던진 파격적인 폭탄 발언이었다. 그녀는 수업시간은 내게 취침시간이었다고 해맑게 웃으며 1차로 깼고, 소녀처럼 연하고 말간 지금의 얼굴과 달리 평상시에는 빨간 립스틱을 바르는 등 과감하고 강렬한 화장을 즐긴다는 말로 2차 멘붕을 시전했다. 이윽고 수지는 더 이상 청순한 첫사랑의 이미지가 아닌 어둡고 퇴폐적인 이미지의 역할을 도전해보고 싶다는 말로 산통까지 깨버렸다. 연타로 당해버린 국민 첫사랑의 배신은 곧 그녀의 자격을 의심하게 했다.

하지만 수지와 아이유가 무어 그리 큰 배신을 했다는 것인지. 그것을 상식적으로도 비교적 환상에 입각해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이유와 수지가 대중을 실망시킨 것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잠옷을 입고 남자 아이돌과 셀프 카메라를 촬영해서? 수업시간은 취침 시간이었다는 한마디 때문에?

수지와 아이유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들은 이미지가 생명이라는 연예인이고 그 이미지를 통해 돈을 벌었으니 이미지에 대한 환상이 깨졌을 때 받는 비난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도대체 사람들이 아이유와 수지에게 어떤 이미지를 품었고 어떤 환상을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만약 소속사의 의견과는 반대로 정말 아이유와 은혁이 사귀고 있었고 그 사진이 상상 그대로의 은밀한 무언가를 내포한다고 하자. 그러면 왜 안 되는가? 여동생은 남자친구를 사귀어선 안 되는 건가? 여동생은 남자친구와 스킨십도 하면 안 되는 건가? 그들이 말하는 주장대로라면 "여동생"이나 "소녀"에게 이런 금기사항을 품은 사람들이 더 엉큼하고 욕망스러운 것 아닌가. 도대체 청순한 여자를 순결한 여자로 동일시시키는 사람들은 어떤 왜곡된 패티시를 갖고 있는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나는 아이유가 다음 회차에도 똑같은 콘셉트로 '소녀'를 노래한다고 해도 별다른 저항감을 느끼지 못할 것 같다. 소녀는 순결의 동의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아이유가 소녀처럼 귀엽고 예쁘고 청순했기에 남자친구를 사귄다는 사실을 '배신'이라 말하지만 이것 또한 어처구니없는 망상일 뿐이다. 귀엽고 예쁘고 청순하니까 더 남자친구를 잘 사귈 수 있는 것 아닌가? 정말 남자친구를 못 사귈 것 같은 이미지를 좋아하고 싶다면 오히려 조금도 귀엽지 않고 조금도 청순하지도 않은 인기 따윈 없어 보이는 진짜 여동생을 사랑하던가. 왜 청순하고 귀여운 여자아이가 남자친구가 없을 것 같다는 이미지로 귀결되는지 진심으로 의문이다. 사람과 사람과의 접촉을 미소녀 게임의 판타지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수지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는 이제 벗어나고 싶다고 했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리고 쭈욱 수지가 국민 첫사랑틱한 이미지를 연출한다고 해도 (딱히 그러고 다니지도 않아서 수지였지만) 나는 아무런 거부감을 느끼지 못할 것 같다. 수지에게 필요한 것은 다시 찾아야 할 열정과 노력으로 부족한 재능을 채우는 일이지 국민 첫사랑을 연기하는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수지가 국민 첫사랑으로 통하게 된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그녀가 연기한 배역 '서연'은 지금 대중이 망상하는 국민 첫사랑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지성을 의심하게 하는 약간 멍한 이미지에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해서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속물근성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인물이었다.

그녀에겐 이상도 판타지도 없었다. 아나운서가 되고 싶은 이유를 돈 잘 버는 남자를 만나고 싶어서라고 말했던 그녀다. 잘 생기고 돈 많아서 동아리 선배를 짝사랑했던 그녀다. 사랑과 우정 사이를 넘나드는 미묘한 관계의 남자친구가 잘못된 영문 철자의 티를 입고 놀림 받을 때 한마디의 반박도 하지 못한 못된 그녀다. 이제훈이나 엄태웅 또한 "쌍년"이라 불렸던 그녀 아니었던가. 오히려 지금 "깬다"고 말하는 수지보다 더 깨는 행동을 일삼았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중은 영화에서조차 그리 표현하지 않은 첫사랑의 판타지를 제멋대로 왜곡하고 성장시켜 국민 첫사랑은 똑똑하고 청순함의 극치여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에 매달리고 있다. 영화 그대로의 이미지로 수지의 행동을 배신이라고 말하기 이전에 다시 한번 영화를 재관람하는 것은 어떨지. 건축학개론의 슬로건처럼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특별한 마돈나의 판타지한 그녀가 아니라 누구나 사랑해 봤을 법한 평범한 첫사랑의 이미지였기에 사랑받은 그녀 아니었었나. 왜 첫사랑의 서연을 잊어버리고 그녀를 마음껏 망상하는 걸까. 서글프게.

세상을 살아가면서 "국민"의 호칭을 얻어 (소속사나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홍보 문구가 아니라)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누구나 가질 수 없는 평범하지 않은 기적일 것이다. 정말 인기가 많은 연예인이라고 해서 누구나 다 국민 무언가로 불리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인기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만큼의 이미지를 대중에게 각인시켰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민 여동생이건 국민 첫사랑이건 결론은 청순하고 순결하고 연애 한번 못 해봤을 것 같은 순결한 여자로 귀결되는 상상은 씁쓸하기 짝이 없다.

할리우드의 사고뭉치라 불리는 마일리 사이러스는 무려 디즈니에 출연했던 그야말로 전 세계적 국민 여동생으로서 초통령의 위엄을 달성했던 인물이다. 역시 마찬가지의 디즈니 핫걸 셀레나 고메즈는 전 세계의 남동생이자 남자 초통령 저스틴 비버와 열애를 했다. 그건 우리네 정서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21세기에도 그 촌스러운 정서를 고집할 것인지. 아이돌은 연애를 해선 안 된다. 청순한 여자는 순결한 소녀여야 한다는 망상이 우리네 정서라면 이젠 더 이상 간직하지 말아야 할 악습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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