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친구 여러분. 한겨레를 신뢰하는 만큼 분노가 큽니다. 꼭 되새기시길 당부 드립니다.”

삼성 백혈병 문제와 관련해 오랫동안 활동해 온 한 인권활동가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남긴 글의 일부다. 한겨레의 어떤 보도가 이 활동가를 이렇게 화나게 만든 것일까?

지난 17일 한겨레 1면 하단에는 ‘삼성-백혈병 피해가족 첫 대화 한다‘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기사의 요지는 “삼성이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 등에 걸려 고통 받는 피해자 문제를 대화로 해결하자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겨레는 “2007년 삼성 반도체공장 백혈병 발병 문제가 처음 세상에 알려진 이후 5년 동안 평행선을 그리던 삼성과 피해자 가족 사이에 첫 대화가 이뤄질 전망”이라고 기대감을 표했다.

▲ ‘삼성-백혈병 피해가족 ‘첫 대화’ 한다‘는 제목의 17일자 한겨레 1면 지면 캡쳐.

삼성 ‘백혈병 피해가족과 대화 시작’ vs 반올림 ‘일방적 주장이거나 자의적 해석’

이 기사는 삼성이 백혈병 문제에 “전향적 자세”를 취해 금방이라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화에 나설 것 같은 뉘앙스가 역력하다. 비단 한겨레뿐만 아니라 관련 내용을 보도한 대부분의 언론들의 보도 역시 대동소이하다. 삼성이 ‘소송 참여 중단, 피해자 보상과 사과, 진상규명, 재발방지책’ 등을 고려하고 있으며 “대화를 위한 협의를 이미 진행 중에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삼성 반도체 공장 백혈병 문제 해결을 위해 다산인권센터를 비롯한 20여개 단체로 구성된 ‘반올림’의 입장은 전혀 다르다. 한겨레 등의 보도가 나온 이후 반올림은 “한겨레 등 일부 언론의 보도가 전혀 사실과 다르다”며 이를 반박하는 자료까지 냈다. 반올림 측은 “삼성 측이 삼선전자건강연구소 부소장 명의로 ‘만나서 얘기하고 싶다’는 골자의 이메일을 한 차례 보내와 정식 답변을 했지만 이후 6개월이 지나도록 아무런 답을 받지 못하고 있다”며 “공식적인 대화 창구를 열게 됐다는 보도는 기자의 자의적 해석이거나 삼성의 일방적 주장”이라고 지적했다.

대화의 근거로 제시된 14일 모임과 관련해서는 “이 모임은 소송대리인과 반올림 활동가들이 만나 원고들의 의사를 전하는 자리였고, 삼성의 대화 요청이 아니라 소송 진행에 대해 상의하는 자리였을 뿐”이라고 반박했다. 반올림의 한 활동가는 <미디어스>와의 통화에서 14일 모임의 성격에 대해 “삼성 측에서 우리 측 변호사에게 압박을 가해 변호사가 ‘조정을 받지 않으면 사임 하겠다’고 말하는 상황 등에 대한 논의였다”고 말했다. 삼성 측에서 변호사를 통해 재판에 대한 ‘조정’을 요구해와, 이에 대한 대응을 논의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 활동가는 한겨레 등 언론들이 “삼성의 ‘언론플레이’에 휘둘려 반올림의 주요 요구와 취지를 덮어버리는 보도를 했다”며 강한 유감을 나타냈다. 이러한 전략이 결국 “삼성은 피해자 보상 생각도 있고, 대화를 요청했지만 반올림이 이를 망쳤고, 결국 반올림을 ‘불통’의 집단으로 만들어 피해자와 분리하려는 의도”라고 비판했다.

요구 자체를 인정하진 않지만, 대승적으로 풀고 싶다?

삼성과 반올림이 지난 5년 간 평행선을 달려온 온 이유는 간단하다. 반올림의 요구를 삼성이 아예 인정하려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반올림의 요구는 백혈병을 ‘공식적인 산재로 인정하라’는 것이다. 대화의 전제 조건 역시 이 부분을 삼성이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단 입장이다. 하지만 삼성은 전혀 다르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문제를 대승적으로 해결하고 싶지만, 백혈병이 직업병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명백하다”며 “그런데 문제는 재판을 끝까지 가서 결국 이 팩트를 삼성이 입증한들 삼성 입장에서 얻을게 없는 상황까지 왔다”고 말했다.

이렇듯 출발선에 대한 인식이 다르고 전제하는 상황에 대한 판단이 상이하다보니, 서로의 행위를 바라보는 시각 역시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반올림은 여전히 삼성이 문제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언론플레이’만 하는 상황에서 대화를 할 순 없단 입장이고, 대화를 하기 위해선 최소한 “피해자들에게 산재신청 포기를 종용하거나 산재인정을 막기 위해 개입하고 있는 상황을 먼저 해소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반올림은 “정부의 공식 산재 입장이 핵심일 뿐, 삼성으로부터의 보상은 핵심이 아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이 부분 역시 삼성의 생각은 다르다. 한겨레와 인터뷰 한 삼성의 고위 관계자는 “대화를 통해 소송은 취하하고 조정절차를 통해 해결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조정을 강조한 이 말의 핵심은 삼성의 목적이 결국 ‘산재 인정 판결을 남기지 않는 것’에 있음을 보여준다. <미디어스>와 통화한 또 다른 삼성의 관계자 역시 이 부분에 대해 산재 인정 여부 보다는 “어찌되었건 문제를 해결해야하는 것이고 삼성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 1면 기사에 이어진 10면의 자세한 기사. 1면의 기사가 대화를 시작한다는 사실 자체에 방점이 찍혀있었다면, 10면의 이 기사에서 한겨레는 비교적 충실하게 삼성 측과 백혈병 피해자/반올림의 입장을 대별해 다뤘다.

상황은 여전히 ‘평행선’, 기념비적인 국감될까?

결국, 한겨레의 기대와는 달리 여전히 ‘평행선’인 상황이다. 반올림은 삼성이 제대로 된 대화 제의는 고사하고 여전히 근로복지공단과의 재판에 ‘피고 보조 참가인’으로 참여하며 상황을 방해하는 개입을 하면서 겉으론 ‘대화 제의’의 언론 플레이를 하고 있단 시각이다. 느닷없는 삼성의 대화 제안 역시 삼성전자 부사장이 출석하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감을 이틀 앞둔 상황에서 삼성이 “중요한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채 드러난 상황을 봉합하기 위한 것”이란 상황 인식이다.

그렇다면 해당 기사를 쓴 한겨레의 곽정수 기자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곽 기자는 경제선임기자로 한겨레에서 오랫동안 기업 문제를 취재해 온 전문 기자다. 반올림의 반응을 보면, 다른 언론은 젖혀두고라도 진보매체를 자처하는 한겨레에선 보다 적극적으로 반올림의 문제의식을 반영해야 했었단 ‘서운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에 대해 곽 기자는 “반올림과 한겨레가 서로가 처해있는 사회적 포지션과 입장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전제하면서도 “한겨레는 그간 백혈병 환자들에 대한 진실 규명과 이에 정당한 기업적, 국가적 책임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보도해왔고, 이번 보도 역시 그 틀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곽 기자는 “8월 이후 추석을 전후로 삼성과 반올림 사이에 급진전된 내용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해당 내용의 경우 삼성 쪽으로부터 듣고 쓴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소스를 통해 먼저 내용을 알게 되어 오히려 삼성 쪽에 확인을 했던 사안”이라고 밝혔다.

반올림 활동가들의 시각처럼, 삼성의 언론 플레이에 한겨레가 부응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한겨레는 그런 언론이 아니다”라며 “오히려 삼성이 취재에 응하지 않겠다고 하다가 사실을 추궁하자 마지못해 얘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어찌되었건 국감을 앞두고 삼성 쪽이 유화적인 국면을 만들기 위해 대화 논의를 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질문을 재차 하자 “삼성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고, 기자는 그런 해석을 할 위치에 있지 않다”며 “다만, 언론은 향후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에 대한 판단보다는 알게 된 사실을 보도하는 역할일 뿐”이라고 말했다.

18일 국회 환경노동위 국정감사에는 삼성전자 직업병 피해자들과 삼성전자 부사장 등이 출석한다. 한겨레 등 언론의 보도대로 삼성이 백혈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을 검토하고 있고, 의지를 갖고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면 18일 국감은 삼성 백혈병 문제를 해결하는 기념비적인 자리가 될지도 모른다. 부디, 반올림의 주장이 틀렸기를, 그래서 언론의 보도가 국감을 앞둔 상황에서 문제를 봉합하기 위한 ‘물타기’가 아니었기를 바란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