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동이 트고 날이 밝아왔다. 컴컴한 새벽부터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게 만든 120분짜리 드라마의 결말은 승부차기라는 마지막 클라이막스를 통해 더 큰 환희를 제공하였고, 동이 트면서 동네 주위를 활기차게 둘러싼 매미 소리들의 데시벨을 압도하는 함성으로 일요일 새벽을 열어젖히게 만들었다. 확신할 수 없었던 승부의 결말은 대한민국 올림픽 축구 역사에 새로운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8월 5일 새벽 3시 30분(한국시각)에 킥오프된 2012 런던올림픽 남자축구 8강전에서 대한민국은 개최국인 영국 단일팀을 맞아 힘겨운 승부가 예상되었으나 놀라운 선전을 펼치면서 시종일관 상대를 압도하였고, 결국 승부차기에서 5-4로 승리를 거두면서 올림픽 축구 역사상 처음으로 4강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번 올림픽을 앞두고 개최국 영국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북아일랜드로 나뉘어 있던 축구 연맹을 한데 묶어 영국 단일팀으로 출전하였다. 당연히 금메달을 목표로 구성한 것이었다. 그동안 영국은 4개 축구연맹으로 나뉘어져 있는 자국의 상황 때문에 올림픽 축구에는 출전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자국에 개최되는 올림픽에서 축배를 들어올리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한 것이다.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라이언 긱스, 크레익 벨라미 등의 슈퍼스타들을 대표팀에 포함시키면서 금메달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출하였다.

금메달에 목숨 걸고 매진하는 영국 대표팀을 상대하는 것이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대한민국과 영국의 8강전이 펼쳐지는 웨일즈의 상징적인 축구장인 카디프 밀레니엄 스타디움에는 개폐식 돔이 설치되어 있는데, 주최측에서는 잔디를 보호한다는 허무맹랑한(?) 명분하에 경기가 펼쳐지는 동안 돔을 닫는 조치를 취하였다. 누가 봐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는 얄팍한 속셈이었다. 폐쇄된 구조의 돔구장에서 7만 5천명의 영국 관중들의 일방적인 응원함성 소리의 진동효과를 더욱 증폭시켜 대한민국 선수단의 기를 누르려는 심산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는 어지간한 왕뚜껑이 덮여진 것보다 더 큰 증폭효과를 낼 수 있는 '붉은 악마'의 응원문화가 자리하고 있다. 이미 숱한 국제대회 경험을 통해 편파적인 응원과 고압적인 분위기에 익숙해진 대한민국 선수들에게 7만 5천명의 함성은 충분히 극복할 만한 장애물이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떤 조직이건 간에 조직을 이끄는 리더의 성향에 따라 조직의 색깔이 결정되기 마련이다.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을 이끄는 홍명보 감독의 현역시절의 모습을 보면 어떤 상황에서도 전혀 평상심을 잃지 않는 포커페이스와 냉철한 카리스마가 그만의 전매특허였다. 대표팀을 3년 넘게 이끌어온 홍명보 감독의 성향이 어느새 선수들에게 자연스레 전파되어 있음을 이번 8강전에서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대한민국 대표팀은 경기 시작 5분 만에 주전 수비수 김창수가 부상을 당하면서 경기를 더 이상 뛰지 못하게 되는 돌발사태를 맞이하였다. 하지만 교체로 투입된 오재석이 침착하게 대응하면서 대한민국은 금세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큰 경기에서 주축 선수의 예기치 못한 공백사태를 맞이할 경우 전열이 흐트러지면서 일시적인 공황상태를 맞이할 수 있는데, (가장 단적인 예가 2002 월드컵 미국과의 예선전에서 주축 공격수 황선홍이 상대와 볼 경합도중 눈썹 위가 찢어지는 부상을 당하면서 잠시 그라운드를 비운 틈을 타 선수둘이 일시적인 동요를 일으켰고, 그 사이에 미국의 매티스에게 기습 선취골을 허용했던 장면이다.) 전혀 주전 선수의 공백이 느껴지지 않게 선수들은 침착한 플레이를 펼쳤다.

홍명보 감독은 그동안 예선에서 쾌조의 컨디션을 보이던 김보경 대신에 지동원을 스타팅 멤버로 투입하였다. 프리미어리그 선덜랜드에서 활동하는 지동원은 팀 내에서 출전시간이 들쭉날쭉 하다 보니 특유의 날카로운 공격력이 상당히 무뎌져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전반 29분 지동원은 자신에게 찾아온 결정적인 찬스를 날카로운 왼발 슛으로 연결시켰고, 공은 상대 골키퍼가 손을 쓸 틈도 없이 구석으로 그대로 빨려 들어갔다. 컴컴한 새벽의 고요함을 단숨에 날려버리는 통쾌한 선제골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거센 반격을 시도했고, 결국 심판의 폭넓은 재량에 의해 대한민국은 페널티킥을 내주게 된다. 핸들링 반칙 여부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심판의 재량권에 달려 있다. 고의 여부에 따라 때로는 팔에 맞아도 페널티킥을 선언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문제는 개최국 영국에서 펼쳐지는 시합이었고, 더 큰 문제는 개최국 영국이 선취골을 내준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애런 램지에게 페널티킥 동점골을 내주게 된다. 대한민국 골키퍼 정성룡은 킥의 방향을 정확하게 잡았지만 아쉽게도 애런 램지의 슛은 정성룡의 몸을 스치면서 들어가고 말았다. 충분히 막을 수 있는 골이어서 아쉬웠지만 한편으론 정성룡의 예리한 촉이 상대에게 페널티킥에 대한 부담감을 심어주는 효과를 톡톡히 누릴 수 있었다.

페널티킥 동점골이 들어가고 나서 3분 만에 대한민국은 또 다시 영국에게 페널티킥을 내주게 된다. 공을 경합하는 과정에서 수비수 황석호가 문전으로 쇄도하던 스터리지의 몸을 걷어찼다는 이유로 주심은 페널티킥 판정을 내린다. 공을 걷어내기 위해 진행하는 과정에서 연속으로 이어지는 플레이로 판단할 수도 있겠지만 개최국 어드밴티지는 어디서나 유효한 것이다. 페널티킥으로만 2골을 내주면 억울하게 느껴질 수 있던 상황에서 골키퍼 정성룡은 또 다시 키커로 나선 램지의 슛을 막아내면서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해낸다. 정성룡의 '슈퍼 세이브'를 통해 경기의 흐름은 급격히 대한민국 쪽으로 흘러갔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후반전에 또 다시 위기를 맞게 된다. 후반 10분 공중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정성룡은 영국의 육중한 수비수 리처즈와 정면충돌하게 되고 결국 리처즈와 정성룡 모두 더 이상 경기를 뛰지 못하고 교체된다. 정성룡 대신 이전까지 올림픽팀의 주전 수문장이었던 이범영이 대신 투입된다. 경기에 투입된 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이범영은 미처 그라운드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듯 공을 걷어내려다 미끄러지는 실수를 범했지만, 이후 침착하고 평정을 잃지 않는 플레이로 정성룡의 공백을 확실하게 메운다.

영국은 후반 벨라미 대신 라이언 긱스를 마침내 투입하면서 반전을 꾀하지만 좀처럼 운동장에서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긱스의 활약은 미미하였다. 교체카드 3장 중 2장을 예기치 못한 부상으로 인해 쓰게 된 홍명보 감독은 연장전에 접어들면서 체력이 떨어진 지동원을 대신해 분위기 메이커 백성동을 투입한다.

대한민국은 경기 내내 미드필더 싸움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였다. 그것이 가능하게 한 일등공신은 구자철과 기성용이었다. 두 선수 모두 공격과 수비를 가리지 않고 왕성하게 가담하면서 볼 흐름을 원활하게 이끌었고, 뛰어난 볼 키핑 능력으로 좀처럼 주도권을 영국에 내주지 않는 결정적인 공헌을 한다.

120분간의 사투 끝에 결국 승부는 승부차기를 통해서 가려지게 되었다. 대한민국 수문장 이범영은 시종일관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으로 왠지 세이브 하나는 만들어낼 것 같은 근거 없는 안도감을 전달해 주었다. 대한민국의 키커로 나선 구자철, 황석호, 백성동, 박종우는 7만 5천여 명의 영국팬들의 집단 야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감 있는 슈팅으로 성공율 100%를 기록한다. 영국 또한 4명의 키커가 모두 나서 골을 성공시키는데, 특히 4번째 키커로 나선 라이언 긱스는 톱스타들의 승부차기 징크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골키퍼의 방향을 완전히 속이는 노련한 슈팅으로 피 말리는 승부차기 관문을 넘어선다.

영국의 5번째 키커로 나선 스터리지는 이날 경기에서 유독 잔실수를 많이 하는 모습을 보인 터라 승부차기에서도 돌발상황을 연출할 조짐이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스터리지는 킥을 차러 나서는 순간 잠시 멈칫하면서 슛을 쐈고, 방향을 정확하게 읽은 이범영 골키퍼는 스터리지의 슛을 완벽하게 막아낸다. 마치 2002년 월드컵 스페인과의 8강전 승부차기에서 스페인의 키커로 나선 호아킨이 슛을 하러 나가다가 잠시 멈칫한 다음에 슛을 쐈다가 이운재에게 막혔던 그 장면이 오버랩되는 순간이었다. 이번 유로 2012에서 유행했던 파넨카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닌 이상 승부차기에서 키커가 잠시 멈칫하고 슛을 쏠 경우 그 슛이 막힐 확률은 더욱 높아지게 됨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범영의 선방을 통해 승기를 잡은 대한민국은 마지막 키커로 나선 기성용이 침착하게 골을 성공시키면서 기나긴 승부에 마침표를 찍는 것과 동시에 대한민국 올림픽 축구 역사상 처음으로 4강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게 된다. 반면에 결정적인 패인을 제공한 영국의 스터리지는 크게 상심한 듯 동료들은 물론 감독의 위로조차 외면하는 모습이었다. 2년 전 광저우 아시안 게임 UAE와의 4강전에서 연장 후반 15분 교체 투입되었던 이범영은 투입되자마자 실점을 허용하며 순식간에 역적이 되고 말았다. 사실 당시 홍명보 감독은 경기가 승부차기로 접어들 것으로 예상하고 승부차기에 강점을 보이는 이범영을 투입하는 승부수를 띄웠지만, 상대에게 예기치 않은 역습을 허용하면서 용병술이 무색하게 되었던 바 있다. 하지만 이범영은 자신의 장점인 승부차기 선방능력을 마침내 2년 뒤 더 큰 무대인 올림픽에서 유감없이 발휘하였고, 2년 전에 자신에게 씌워졌던 트라우마에서 깨끗이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홍명보의 아이들은 그동안 선배들이 숱하게 도전했으나 이루지 못한 올림픽 축구 4강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축구의 종주국이자 이번 대회 우승후보로 꼽힌 영국을 무너뜨린 대한민국은 4강에서 남미 최강 브라질과 한판 승부를 펼치게 된다. 비록 체력적으로 많이 힘든 상황이지만 멘탈만큼은 현재 대한민국 선수단만큼 최고조로 올라온 팀은 아마 없을 것이다. 축구 종주국의 '왕뚜껑' 텃세마저 무색하게 만든 태극전사들의 투혼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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