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 년 전 프랑스의 소설가 발자크는 애인에게 분노의 편지를 쓴 바 있습니다. 왜 당신은 뭇남자들 앞에서 발목을 과도하게 드러내냐고. 당시 프랑스의 사교계에서 드레스치마를 과도하게 올려서 발목을 보여주는 것은 유혹의 상징이었고, 그런 행위자체가 저속함으로 비춰졌습니다.

혹자는 과거의 사람들이 타임슬립으로 현대에 오게 되면 현란한 현대의 과학문명에 놀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겠지만, 아마도 이들을 진정 놀라게 할 것은 스마트폰이나 고속전철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남자와 여자의 관계, 여성들의 옷차림과 같은 문화적인 부분에서 훨씬 큰 충격을 받을 가능성이 큽니다. 스마트폰이야 몇 주만 만져보면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겠지만, 남녀관계나 성의식과 같은 상식이나 가치관은 쉽게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핫팬츠가 일상인 현대인에게 불과 이백 년 전의 프랑스 '발목'문화가 황당한 것과 비슷하겠지요.

그러고 보면 한국은 문화적 상식적 격차가 유난히도 큰 편입니다. 우리는 불과 몇십 년 만에, 경찰이 미니스커트의 길이를 재며 단속하던 시절, 배꼽티 입었다가 경범죄로 고소당했던 시절, 야타족과 번개팅이 일상이 된 시절, 드라마에서 키스가 일상으로 나오는 시절을 통과해 왔습니다. 이렇다보니 세대 간 계층 간 개인 간에 상식 격차가 상당합니다.

상식의 격차가 크다보니 간혹 사소한 것에서도 논쟁이 벌어집니다. 그런 논쟁이 네티즌으로부터 시작되어 가열되면 언론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기 일쑤인데요, 때론 이러한 확대 재생산의 이유가 생트집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제는, 올림픽방송을 진행했던 한 아나운서의 옷차림이 구설수에 올랐습니다. 소위 '붕대의상' 차림이 민망했다는 거지요.

원자현 아나운서의 의상을 미쓰에이의 화보 속 붕대의상과 비교하는 것은 퍽 억지스럽습니다. 가족과 함께 보기에 민망했다는 지적도 너무 과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러한 의상 구설수는, 화끈하리만치 독보적이지 않은 이상은 대체로 만만하거나 비호감인 방송인을 대상으로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호감 방송인은 웬만해선 이러한 구설수에 오르지도 않지요.

하지만 이러한 보도행태가 쉽게 화제에 오르고 여전히 대중의 관심을 모으는 현실은, 상식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비난하는 것에 익숙한 우리의 자화상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생각과 상식이 충돌할 때마다 서로를 쉽게 비난하는 사회분위기에선, 다소 억지스러운 논리도 잘 팔리는 논쟁거리가 확대재생산되곤 하니까요. 어제 논란은 별 시시껄렁한 생트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Written by 비춤, 운영중인 블로그 : http://willis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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