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고개를 젖히고 멍하니 위를 3초 이상 바라볼 때가 있다. 그 위가 하늘인지, 천장인지, 어둠인지, 눈부신 빛인지에 따라 순간순간 떠오르는 것들이 조금씩 달라지긴 하지만 가끔 뚫어져라 바라본 위를 통해 이것저것 추억을 끄집어 내본다.

고개를 젖히고 그 속에 가라앉아 있던 오래된 추억들이 새록새록 모래시계의 모래알이 거꾸로 떨어지듯 아래로 스르륵 떨어진다. 그리곤 다시 고개를 젖혔을 때 하나하나 그 추억들이 다시 아래로 떨어지면서 최근 몇 년 동안 전혀 생각조차 나지 않았던 장면들이 번뜩 떠오를 때면 그 얼마나 기쁘고 반가운지 모른다. 물론 실제로 기억이라든가 추억이 머리를 흔든다고 다시 뒤섞이거나 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종종 머리를 젖혀본다.

머리를 젖히다 보면 며칠 전의 기억이 다시 떠오르기도 하지만, 운 좋게 5년 아니 10년 전의 어느 장면이 똑똑히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런 장면이 떠오를 때면 바로 어제 일이 아주 예전 일 같고, 그 오래전 기억이 오늘 일어난 일만큼 생생하다. 참 이상하기도 하지.

오래전 기억들이 떠오를 때는 대부분 학창시절의 기억들로 화면이 메워진다. 등굣길, 수업시간, 쉬는 시간, 하굣길, 시험기간... 10대 시절엔 아이돌에 열광하거나 영화배우에 열광한 적은 있어도 딱히 아픈 첫사랑을 경험한 적은 없어서 기억 속에는 항상 동성의, 일명 절친들의 익숙한 얼굴들이 주연배우로 등장하곤 한다.

그때 우리는 책에서 종종 묘사하는 막 씻어낸 복숭아처럼 핑크빛으로 예쁘게 물들고 싱그럽고 달콤한 10대는 아니었다. 사실 그때만큼 덜 익은 사과처럼 푸석거리고 시큼한 시기가 또 있을까 싶을 만큼 그때 우리는 너무 철이 없었다. 얼굴에 난 여드름과 입시로 인해 깊어진 다크써클, 며칠 동안 감지 못한 머리카락을 질끈 묶고, 점심시간을 기다리고, 쉬는 시간마다 뛰어다니는 그런 학생들이었다. 물론 그때 우리는 덜 익은 사과처럼 풋풋했다. 꿈이 많았고, 하고싶은 게 많았고, 가고 싶은 데가 많아서 대학생이 되면 이 모든 게 다 이루어질 줄 알았다. 그때의 가장 큰 걱정은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었으나 그 외에 죽음이라든가 먹고사는 고통에 대한 두려움은 전혀 없었다. 그때 우리는 어렸고, 그땐 예쁘다기보다 참 귀여웠다.

개인적으로 참 아끼고 좋아하는 청춘물이 있다. 바로 여자 친구들의 우정을 그린 '청바지 돌려입기'이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는 남자들의 진한 우정을 그리거나, 여자들의 세력 다툼, 애정 다툼을 그린 청춘물들이 많은데 '청바지 돌려입기'는 말 그대로 소녀들이 딱 그 나이 때에 경험하는 고민과 불안함, 그리고 그녀들 사이의 자매같은 우정을 귀엽게 보여준다. 거기다 주인공 4인방의 귀엽고 상큼한 외모와 표정, 행동들은 이상적인 청춘이란 이름의 젊음은 딱 저렇지 않을까 싶을 만큼 우리가 되고 싶고, 혹은 거쳐 왔던 청춘의 로망을 완벽하게 묘사하는 듯하다. 앰버탐블린, 블레이크 라이블리, 아메리카 페레라, 알렉시스 블레델. 이제는 헐리우드에서 꽤나 자리잡은 스타가 된(블레이크 라이블리는 탑스타!!!)주인공 4인방의 철없고 애띤 신인 모습을 보는 것도 이 영화의 쏠쏠한 재미랄까.

청바지 돌려입기는 임산부 에어로빅반에서 만난 엄마들 덕분에 태어나자마자 친구가 되어 서로의 성장과 기쁨과 슬픔, 가족사들을 고스라니 보고자란 자매같은 4명의 친구들이 각자 체형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모두에게 꼭 맞는 마법같은 청바지를 발견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그녀들은 방학동안 이 청바지를 돌려입으며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누군가는 첫사랑을, 누군가는 부모님과의 갈등을, 그리고 누군가는 너무나도 특별한 인생의 새로운 친구를 만나게 되면서 아직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깨닫는다.

나의 친구들을 쭈욱 돌아보면 가장 친한 친구들은 대부분 고등학교 친구들이다. 외모는 아가씨 티가 나는데 마음은 너무 아이같았던 가장 정신없었던 시절. 서로의 위치를 재거나 비교하지 않고 순수하게 그 친구가 마음에 들었고, 서로의 성격이 좋아서 친구가 된 아이들.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마음도, 그렇다고 부러워하거나 배우고자 하는 마음도 아닌 깨끗하게 정제되어 말 그대로 '니가 참 좋아서' 친구가 된 우리들.

영화 속 네 소녀들은 가장 힘들거나 외롭다고 생각되는 순간 서로에게 편지를 쓰고, 전화를 하고, 혹은 기쁘거나 가슴이 뛰고 두 뺨과 눈 속에 핑크빛 하트가 떠돌 때에도 가장 먼저 자신의 설렘을 나누고 행복해 한다. 그녀들이 성장함에 있어서 친구란 한 발 한 발 걸어가는 앞길의 손을 잡아주고 알록달록한 별사탕 같이 예쁘고 행복한 기운을 양 옆에서 뿌려주어, 그녀들의 성장이 불안하고 외로운 길이 아닌 축복받고 용기를 가져야 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어린마음의 그녀들을 서로 수호해주는 역할을 한다.

나 역시 불순물로 가득차 허우적거리던 슬프고 외롭고 우울하고 힘든 흑역사에는 항상 신데렐라의 요정같이 본질을 고쳐줄 순 없지만 상황을 위로해주고 그 역경을 이겨낼 유리구두와 드레스, 호박마차를 건네주는 친구들이 있었다. 다정한 문자 한 통, 걱정을 품은 목소리의 전화 한 통, 예쁜 글씨체를 자랑하는 귀여운 편지 한 통들은 힘들었던 그 순간 나에게 희망을 주는 신데렐라 요정의 마법의 주문이었다.

청바지 돌려입기는 호평과 함께 청바지 돌려입기2로 돌아온다. 고등학생이었던 그녀들은 대학생이 되고 좀 더 자아에 대한 고민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그녀들이 자란만큼 고민이 자란 것일 뿐, 서로를 위해주는 마음, 우정 또한 함께 자라난 그녀들은 또 다시 유쾌하고 즐겁게 그 역경을 이겨낸다. 영화는 참 귀엽고 청량하다. 다시 한 번 10대로 돌아가고 싶고, 친구들과 동네를 뛰어다니고 수다를 떨고 싶다. 그러다 곧 그 시절을 추억하기를 멈추고 핸드폰을 꺼내 친구에게 문자 한 통을 보내 본다. 우리의 우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청량해지고 반짝반짝 그 빛을 더 갈고 닦을 테니 지나간 시간을 추억하기보단 현재의 그들과 함께 좀 더 빛나길 기원해 본다.

믿는 사람들에게 더 쉽게 화를 낼 때가 있는 법이야, 어떤 경우에라도 항상 널 사랑할 거란 사실을 아니까
-청바지 돌려입기-


문화예술 전반에 관심이 많으며,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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