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순옥 당선인은 1970년 오빠 전태일 열사의 분신 후부터, '전태일의 여동생’이란 이름표를 달고 살았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16살이었고, 그때부터 어머니 이소선씨와 함께 노동운동에 뛰어 들었다. 전씨는 22살까지 오빠 전태일의 뒤를 이어 봉제공장에서 일했다. 89년 35살의 나이로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영국에서 '한강 기적의 값은 누가 치뤘나'란 주제로 석사학위를, 2001년 런던워릭대에서 한국 70년대 여성 노동운동사를 다룬 '그들은 기계가 아니다(They are not machines)'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은 당시 워릭대 최고의 논문으로 선정됐고, 한국에서는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2004)로 발간됐다.
귀국한 그녀는 돌아온 조국에서 더욱 심해진 빈부격차에 절망을 느꼈다. 그녀는 대학교수자리도 정치권의 권유도 뿌리치고, 자신이 젊은 날을 보냈고, 오빠 전태일이 일했으며, 몸을 불살랐던 동대문 현장으로 돌아가 다시 재봉틀 앞에 앉았다. 그리고 '참여성노동복지터'를 만들어 수십년 재봉일을 천직으로 알며 살아온 '낮은 땅'의 여성 노동자들과 같이 일하며, 삶의 대안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사랑이 있다면, 자신감이 있다면, 그는 희망은 온다고 생각한 그녀, 2012년 정치권의 재권유에, "해야할 바를 찾았다"며 국회의원이 되기로 결심한다.

▲ 전순옥 당선인 ⓒ미디어스

전태일 열사의 동생인 민주당 비례대표 1번 전순옥 당선인은 오빠 전태일과 어머니 이소선은 그들의 역할이 각각 있었고, 전 당선인 자신은 또다른 역할이 있다고 밝혔다. 오빠는 작은 희망을 만드는 것이었고, 어머니는 그 희망을 키우는 것, 그리고 자기는 그 희망을 구체화시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 당선인은 '두가지' 질문에 예상 밖의 답변을 했다. 하나는 가고싶은 상임위가 '지식경제위'라는 것, 또다른 하나는 어머니가 국회의원 되신 것을 '기뻐하실지는 잘 모르겠다'는 답변이었다. 다만, 어머니가 살아겠셨다면, 꼭 세가지 질문을 하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왜 그것을 하려고 하느냐?,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느냐?, 그리고 정말 노동자에 대한 사랑이 있느냐?" 아마도 그 물음 후에 어머니는 평소처럼 "딸이 결정하면, 믿고 지지하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경위를 선택한 이유는 '패션산업'에서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전 당선인은 총선 당시, 민주당 강북 후보자들과 함께 강북패션벨트 계획을 공약한 바 있다.

전 당선인은 영국에서의 공부도,경제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전태일평전과 성경책을 읽으면 견디어냈다고 과거를 회상했다. 99년, 10년만에 돌아온 한국에선 심각한 양극화의 절망과 일하는 아주머니들에게서 발견한 희망을 동시에 마주했다고 고백했다. 봉제공장 아주머니들에게서 발견한 그 희망을 이제 법적 제도적으로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국회의원이 되고자하는 결심을 했다고 밝혔다. 과거, 정치권에서 요청이 왔을 때, 선뜻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바로 "무엇을 해야할지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는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누구는 전순옥 당선인이 민주당에 들어갔을 때, 오빠 전태일의 정신을 따르는 민주노총이 기반인 통합진보당을 빗대어 그럼‘남매당'이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야권연대의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의 이야기다. 그러나 인터뷰날, 그 '남매당' 통합진보당은 파국직전 상황이었다. 그녀는 통합진보당에서 벌어진 폭력행위에 대해 대단히 안타까워했다.

오빠의 꿈과 희망을 안고 살아온, 동생 전순옥 당선인의 발걸음이 그래서 모두에게 궁금해지는 이유다. 지금 필요한 것은,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희망의 메시지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

국회의원 되신 걸, 가장 기뻐하신 분은?

공장에 계신 아주머니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 같았다.

오빠와 어머니는 당연히 기뻐하셨을 것 같다?

잘 모르겠다.과거 '평화민주당' 시절, 어머니는 안 가셨다. 두 분이 기뻐하실지는 자신은 없다. 하지만, '왜 그것을 하려고 하느냐?'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느냐?' '정말 노동자에 대한 사랑이 있느냐?'는 세가지는 꼭 물어보셨을 것이다. 어머니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떤 것도 할 수 있다'고 평소에 생각하셨다. 그렇게 물으신 다음, 어머니는 아마도 평상시처럼 나의 결정을 결국은 믿고 지지해 주셨을 것이다.

공부할 때 영국과 돌아온 한국에서 인상깊었던 것은?

영국에서 장학금도 계속받고, 서울 지인들의 후원도 받았다. 애초에는 박사학위까지 받으리라 생각하지 못 했는데, 교수들의 권유로 학사,석사,박사를 하게되었다. 경제적으로도 공부 자체로도 힘들었지만 힘들고 어려울 때 '전태일'평전과 '성경'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많은 힘을 얻었다.

99년 한국에 돌아와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사회가 표면적으로 모두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상은 심하게 양극화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가진자 못가진자, 기득권층과 아닌 층. 영국에서는 그곳이 정체되어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아서, 한국사회의 역동성이 기억에 남아 있어 '희망'을 갖고 귀국했는데, 한국에서 사회의 이분화가 심각한 것을 보고 쇼크 받았다. 저는 평등할 수는 없지만, 공정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공장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을 통해서 희망을 보았고, 그들과 같이 하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오빠에 대한 기억과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사람들에게 있다. 당선인께서는 어떤 역할을 하고자 하는지?

오빠는 암흑 같은 시대에 바늘구멍만한 점을 찍어놓은 거죠. 어머니는 40년동안 바늘구멍을 크게 만들려고 몸으로 비빈거고, 그 구멍으로 빛이 들어오게하려고 노력했다. 노동자들이 죽어가는 노동환경에 햇볕이 들어오게 해서, 그 분들이 인간답게 살수 있도록 하고자 했다.

저 같은 경우는 구체적인 대안을 찾는 과정이었다. 영국에서 논문 작성을 위해 한국에서의 인터뷰 등 현장조사를 하면서 굉장히 가슴이 답답했었다. 돌아 왔을때 더 어려운 현실이 남아있겠구나하는, 그게 무엇이냐고 하면, 노동조합은 발전하고, 소속 노동자는 삶이 바뀌었다. 그런데, 한편에는 노동운동이 귀족화되고 조직 이기주의에 빠져있지 않나 생각했다. 조직되어 있는 노동자만 대변하는 노동조합이 되어 있었고, 미조직노동자들은 현장에서 옛날보다 더욱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었다. 그것은 노동운동이 조직화되고 힘이 커지니, 자본가들은 더 싼 노동시장을 찾아서 떠나가고 한국에 있는 미조직노동자들은 70~80년대처럼 장시간 저임금 상태로 아직도 내팽개쳐져 있다는 것이다. 차라리 이런 식으로 발전하지 않았다면, 다국적기업이 떠나가지 않았으면 이 사람들 일거리라도 충분히 있지 않았겠나하는 생각까지 해봤다. 그런데, 노동운동이 발전하면서 다국적기업은 싼 노동시장을 찾아가고 노동조합은 미조직된 저변노동자들에게 관심이 없고, 오히려 이들은 일감마저 뺏겨버리고 토,일 등 휴일에도 노동을 하면서, 생계를 위해 일거리만 있으면 좋겠다는 노동환경으로 변해 있는 것이다.

대안은 뭔가 고민했다. 조직화? 권리주장?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다. 봉제산업 특성상 아니다고 생각했다. 대안을 고민했다. 지속적으로 일을 해야 먹고사는 사람들과, 어떻게 하면 '배우며' '즐겁게' '희망이 넘치는' 일자리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구상에 집중하게 됐다.

봉제산업이 '사양산업'이라는 인식에 대해 어떤 생각인가.

인간이 옷을 입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기때문에 그것은 '틀린' 말이다. 사양산업이라는 것은 더 이윤이 창출되지 않으니까, 자본가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옷을 안 입고 살 수는 없다. 그래서 사양산업이라는 말을 쓰면 안된다

수다공방의 명칭의 유래는 무엇인가.

2006년 공부방 아이들한테 엄마들이 공부하는 학교를 만든다 했더니, 아이들이 엄마가 무슨 공부를 해?라고 묻길래. 공부내용을 설명하고, 이름을 지어보라 했다. 9명의 중학생들이 우리엄마 예쁜 '손'이, 많은 '손'이 예쁜 옷을 만든다 말하는데 '손'이라는 말이 꼭 들어가더라, 그래서 수다(手多), 많은 손으로 이름을 짓게된 것이다.

수다공방과 참신나는 옷을 만들게 된 계기는.

한국에 들어와서 미싱보조일을 했다. 객공들은 아침 9시부터 밤 10시,11시까지 일하고, 정규직도 아침9시에서 저녁9시까지 12시간을 일했다. 이같은 장시간 노동에도 단가는 형편 없이 낮다. 89년도에도 3천,4천오백원 정도에 불과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다. 10년이 흘렀는데 오히려 나빠지기만 했다. 노동조건은 나아진 게 없다. 노동조합이 없어서, 저항할 수도 없다. 저임금 구조에 있는 노동자들이 너무 안타까웠다.

그래서 기술자들과 인터뷰를 해봤다. 그들은 현장에서 일감이 많기를 바랬고, 일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너무 고마워했다. 그런데, 상황은 70년대에서 30년이 지났는데 변한 게 없었다. 동대문쪽에 싸구려 바지하고 스카우트를 단품만 납품하고 있었다. 그래서, 재교육시스템을 통해 여러가지 기술을 개발하고, 물건도 다품종 소량생산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0년 동안 이런 것을 현실화시키려고 온갖 일을 다했다.

<동대문으로 돌아온 당선인은 2006년에 봉제기술 교육센터인‘수다공방을, 2008년부터는 사회적기업 ‘참 신나는 옷’을 운영하고 있다. 전태일 평전에 ‘모범업체’ 구상이 나온다. 노동시간을 줄이고, 임금을 더 주고,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좋은 품질의 옷을 만드는 회사, 전 당선인은 그런 회사를 만들고 싶은 것이다>

▲ 인터뷰 하는 전순옥ⓒ미디어스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생각은 왜 가지게 됐나.

이 일을 10년 동안했다. 사양산업이라 사람들이 관심이 없더라, 내가 볼 때는 아닌데 말이다. 이 사업은 대체로 10인 미만의 사업장에서 이뤄진다. 저는 '영세생계형기업'이라고 한다. 공장사장이 재단사, 부인이 미싱사 몇몇 사람이 객공으로 일을 한다. 이런 공장이 창신동만 2500여개 된다. 대부분 10년이상 일을 해온 사람들이다. 이런 공장들을 조금만 지원하고, 환경만 조금 바꾸어주면, 예를 들자면, '4대보험' 가입시켜주고, 재교육시스템 등 제도적으로 지원을 해주면 일할 맛이 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정책적으로 국가에서 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번에 또 기회가 왔다. 이번에는 거절하지 말고, 법적 제도적으로 지원 정책을 만들어 보자, 미래에 희망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선택하게 됐다.

누가 연락을 해왔나.

민주당에서 연락이 왔다.

상임위는 정했나.

사람들은 상임위 선택을 아마도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지식경제위원회'를 신청했다. 지경위를 보니까, 청년 일자리부터 일자리에 대한 역할이 많고, 중소기업 관련 부문도 있었다. 패션산업을 일하기 좋은 산업으로 만들려는 내 의지와 내가 가지고 있는 노하우를 발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류패션사업을 지속가능한 일자리로 만들고자 한다. 노동운동차원이라면 환경노동위원회를 가야겠지만 저는 대안을 찾으려고 한다. '오빠'나 '어머니'가 국회의원이 됐다면, 아마 환노위를 선택했을 것이다.

<현재 민주당 상임위신청은, 5월 첫주에서 5월 말까지로 연장된 상태다>

초선인데, 지경위로 배정될 것 같은지.

저는 꼭 가야되는데, 현재로서는 모르겠다. 잘 되길 바랄 뿐이다.

3D노동을 3L로 바꿑다고 많이 이야기했는데, 다시 한번 설명한다면.

3D는 더럽고 위험하고 힘들다는 뜻인데. 노동환경이 열악한 제조업 분야를 말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대학생 아르바이트를 포함해서 저임금을 다 3D노동으로 본다. 이것을 3L로 바꾸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카데미'를 시작하면서 기술을 계속 개발해야 한다. 개인적인 공부도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노동시간이 짧아져야 한다. 그렇게 되면 힘든 노동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노동으로부터 해방은 노동을 안한다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라고 본다. 그래야지, 삶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 당선인은 3L 을 강조한다. '3L'은 '3D'(힘들고(Difficult), 더럽고(Dirty), 위험한(Dangerous) 직종)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배우고(Learning), 자유로워지고(Liberating), 삶의 질을 바꾸는(Life change) 직업을 의미한다>

국회가서 꼭 해보고 싶으신 일은 무엇인가.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고 싶고, 그 일자리에서 노동자들이 행복해졌으면 한다. 일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희망의 정치. 희망을 주는 정치를 하고 싶다. 그래서, 정치에 무관심했던 국민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그런 정치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저는 이 산업에서(의류패션)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것, 3D를 3L로 바꾸는 일에 역점을 둘 것이다. 현장에서 오래 있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안다. 뭘 몰랐으면 국회에 들어가려고 하지않았다. 그 전에도 요청이 있었지만 들어가지 않았던 이유가 '답'이 보이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답이 보인다. 내가 국회에 들어가려고 하는 이유이다.

민주당 원내대표 투표를 했는데, 어떤 기준으로 했는지.

총선은 국민의 마음을 받아내는데 실패했다. 대선이 전화위복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국민에게 실망을 안 주고, 당의 모든 사람들을 아울러서 나갈수 있었으면 좋겠다. 부드러우면서도 카리스마 있는 지도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민주당이 대선에서 승리를 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국민들의 마음에 다가가는 정책으로 믿음을 주어야 하고, 이 당을을 뽑으면 편안하고, 안정된다는 느낌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국민들이 정말 힘들어 한다. 신뢰와 믿음을 주어야 한다. 최근 읽은 책에서 18세기 영국의 에드먼드 바커란 정치인이 “국민은 안정적으로 끌어주는 리더를 필요로 한다. 갈팡질팡하는 리더가 아니라, 편하게 해주는 리더가 필요하다"는 말을 했는데 인상 깊었다.
요즘 보면, 국민들은 정치에 대한 실망과 회의가 들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국민들을 좀 안정되고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는 정책과 지도자가 민주당에서 나오기를 기대한다.

한국노동운동이 바꾸어야 하는게 있다면.

진정성이 있었으면 한다. 비정규직 정규직화는 슬로건만 있는 것 같다. 집회때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노동조합에서 조합원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지 않느냐. 그것부터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본가들은 모든 것을 이원화시킨다. 여성과 남성 외국노동자와 한국노동자, 그리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으로 나누어 저임금구조에 묶어 놓는 거다. 정규직은 비정규직이 자기자리를 노린다고 생각하고, 비정규직은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을 좋게 보지 않는다. 서로 이용을 당하는 거다.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를 조합원으로 받아들이고, 권리를 보장해주는 게 결국은 정규직 조합원들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거다. 본질적인 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노동문제는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주노동자도 비정규직도 조합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단체교섭할 때 따로 할 수는 있지만, 같이 연대하면서 권리를 높인다면 모두에게 좋을 것이다. 그러면서 서서히 정규직화를 하는게 맞는것 같다.
이렇게 안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자본의 논리가 먹히는 것이다. 너희가 먹고 살려면, 비정규직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 비정규직이 정규직 임금의 반만 받는데 그런 사람이 있어야 너희도 먹고 살수 있다는 논리.

정당의 약함으로 기인한다는 생각은.

그런 면도 많이 있다. 그렇지만, 정당까지 이야기하기 전에 쌍용차 문제같은 경우만 해도 노동자들이 죽어가고 있다. 그 속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단체와 조직이 없더라. 그런 것부터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전순옥 당선인은 민주당 쌍용차특별위원회 위원이다>

통합진보당 사태를 어떻게 보는지.

정당과 정치인은 말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하고, 폭력은 절대로 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탈당과 복당 등을 밥 먹듯이 하고 있다. 국민들이 도덕적, 윤리적으로 신뢰하지를 않는다.

장단점은 있지만, 영국에서 탈당한 사람은 딱 두 사람 보았다. 영국의 존경받는 좌파였던 토니벤과 런던시장을 지낸 조나단이었다. 토니벤은 90년대 토니블레어가 노동당 강령에서 공동생산, 공동분배 등 중요한 부분들을 삭제해, 당에 잔류할 이유가 없었으나 국회의원을 그만두지 않았다. 지역구에서 뽑혔기 때문에 지역구 국민들에 대한 책무는 다해야 한다는 원칙과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감동 받았었다.
그후, 토니 벤은 탈당한 후 두 번 다시 국회의원을 하지 않았다. 런던시장을 했던 조나단은 부정적인 경우인데, 영국시장하려고 노동당을 탈당했었다. 당선된 뒤 다시 복당하려고 했으나, 복당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리나라 같으면 바로 받아들이지 않나. 조나단은 시장임기가 끝날 즈음에 겨우 복당한다. 국민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신뢰를 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100년 역사를 지닌 영국 좌파정치때문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당원들의 의식수준이 상당히 높은 것 같았다. 90년대 영국에 있을 때, 영국 노동조합이 노동당에 지원하는 돈을 환산해보니 250억정도되었다. 그러면서도 개개인 당원들이 의원들을 후원한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법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유니슨이라는 공무원노조도 지원을 많이 한다. 반면, 영국의 정당운동은 정체되어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의 역동성은 여전히 장점이다.

<토니벤(Tony Benn 1925~ 영국정치인): 전 노동당당수. 영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좌파정치인. 최연소 국회의원. 20대 중반에 사망한 부친의 귀족작위를 거무한 최초의 인물. 상원에서 하원의 진출을 위해 상원의원직을 포기한 첫 상원의원 2001년 은퇴. 한국에는, 미국 의료보험의 문제를 고발한 마이클무어의 ‘식코‘라는 다큐멘터리의 인터뷰 내용 등으로 많이 알려져있음 “민주주의는 가장 혁명적이다”>

<해설: 원래 통진당은 인터뉴내용에 없었는데, 전 당선인은 기자를 보자마자. 영국의 정치문화와 의식수준을 이야기했다. 기자가 보기엔, 통진당 폭력사태 등에 대해 상당히 복잡미묘한 감정을 가진 것으로 보였다. 전 당선인은 2007년 문국현을 지지하면서, 정파의 폐해에 대해서 비판한 바도 있다. 인터뷰내내 받은 느낌은 전 당선인은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 대안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입장인 것은 확실해 보였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희망을 주고 싶다. 나의 생각을 가지고,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것이 노동자들에게 조그만 희망이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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