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31일, 오전 10시 30분. 프랑스 파리 7구 그르넬 가 125번지, 주프랑스 대한민국 대사관(이하 주불 한국대사관) 대회의실에서 재19대 국회 구성을 위한 선거에 참여했다. 그러나 내가 사는 곳은 파리가 아니다. 나는 지난 해부터 리옹에 산다. 4월 11일 본 선거일에 앞선 재외국민 투표기간(3월 28~4월 2일)에 맞추어 수업이 없는 토요일 새벽에 일어나 아침 7시에 운행하는 첫 기차를 탔다. 프랑스 남동부, 즉 리옹 이남과 파리를 연결하는 기차들의 종착지는 파리 리옹역(Gare de Lyon). 지하철 1호선을 타고 다시, 콩코르드 광장역에서 6호선으로 갈아타고 바렌(Varennes) 역에서 내렸다. 주불 한국대사관은 지하철역에서 나오면 금방이다. 태양왕 루이 14세가 제국의 위용을 뽐내려고 지었고, 나폴레옹의 유해가 안치되고, 오늘날에도 세계의 관광객들을 꾸준히 불러 모으는 전쟁박물관 앵발리드 궁과는 걸어서 2분 거리. 대사관 바로 옆 건물인 프랑스 노동부를 비롯해 곳곳에 각 정부부처들이 자리한 관가(官街)의 요지에 용케 자리를 잡았다. 프랑스에 온 지는 1년이 넘었지만,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대사관 갈 일이 없기에 투표소 가는 길이 말 그대로 시골사람 상경기 격이다. 지방에 산다는 게 이번 투표에서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기에 더욱 그렇다.

▲ 한국 대사관 정문

선관위는 투표 관리에 만전을 다했다. 지나칠 정도로......

선거인 등록기간인 지난 겨울부터 처음 실시되는 재외국민투표제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몇몇 분들을 트위터를 통해 접했다. 그러나 걱정은 걱정일 뿐, 투표는 한국에서 본선거일에 하던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투표소인 대사관 대회의실 앞 대기실에 선거인명부와 후보자 명단을 확인하는 투표자 안내소가 설치되었다. 유학생으로 보이는 한국인 여성 두 명이 안내하고, 한국에서 파견된 선관위 직원이 상황을 감독한다. 프랑스에 머문다고 공식적으로 재외국민 등록을 한 한국 국민은 1만 여 명(재외국민 등록시 별다른 이점이 없기 때문에 등록율은 그리 높지 않다)이라는데, 2월 말까지 진행된 재외국민투표에 참여하겠다고 등록한 사람은 총 1700여 명이다. 3월 12일에 미리 발송된 '재외투표 안내문'에 따라 여권, 주민증록증, 공무원증, 운전면허증 등의 한국 관공서에서 발행한 신분증이나 체류국(내 경우엔 프랑스) 정부가 발급한 신분증(체류증)을 제시하고 본인 여부를 확인받는다. 투표 개시 4일 전인 3월 24일, 중앙선관위에서 보낸 메일을 통해 지역구 후보와 정당 홍보자료를 미리 숙지한 덕분에, 이 부분은 그냥 통과. 다시 투표소에 들어가면 선관위 직원의 감독 아래 투표소 근무자들(유학생이나 젊은 교민들이 맡았다)이 투표를 진행한다. 투표소에는 역시 교민과 유학생들 중에 선정된 민간인 선관위원들과 자원봉사자들이 투표과정을 지켜본다. 투표를 마친 사람은 투표소 바깥으로 나오면 다시 들어가지 못한다. 외국에서 치뤄진다고 허술한 분위기에서 특정 정당의 투표를 유도한다거나 하는 60년대 분위기는 상상할 필요가 없다(굳이 상상하는 사람이 있어, 적시해야 하는 정치수준이 더 창피하다).

신분증을 제시하고, 지문인식기에 엄지를 갖다 대면... 전산망을 통해 신분과 투표권을 확인하고 체류 상태(체류국의 영주권을 가진 교민은 정당별 선거만, 일시 거주자는 지역구 선거와 정당별 선거에 참가)에 따라 투표용지를 투표용지 전용 프린터를 통해 즉석에서 출력해 준다. 소속된 지역구 선관위로 보낼 회송용 봉투를 1장 준다. 기표소에서 중선관위 공식 기표기구를 사용해 기표를 하고 봉투에 담기 쉽도록 길게 접어서 봉투에 넣고, 봉투에 미리 붙여진 스티커를 떼어 봉투를 봉하고 투표소 중앙에 마련된 투표함에 넣는다.
그런데 이 회송용 봉투가 문제다. 지역구 투표용지와 정당별 투표용지를 한 봉투에 담도록 된 것도 문제려니와 봉투 겉면에 생년월일이 기재되었다. 비밀투표 원칙의 회손이다. 생각해 보라. 서울시 마포(을) 선거구에 나와 생년월일이 같고 프랑스에서 투표를 할 사람이 따로 존재할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나 그리 손쉽게 음모론에 빠지진 말자. 선거인명부에서의 투표여부와 투표수(즉 회송용 봉투 수)를 대조하기 위한 관료주의적 발상이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렇게 간단하게 비밀투표의 원칙을 훼손할 가능성을 남겨두었다는 데서, 처음으로 실시한 재외국민투표에 얼마나 많은 허점들이 있는지, 체험하지 않은 독자들도 상상할 수 있으리라.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 재외국민투표 실시 현황과 문제점이 공유되었으니 프랑스 상황만 간단하게만 언급해 보자. 작년 11월 13일에 시작되어 올해 2월 11일까지 3개월에 걸친 재외국민 투표에 등록한 재불 한국인의 수는 1700여 명. 이 가운데 투표에 참가한 이는 500여 명이다.

▲ 주불 한국대사관 재외국민 투표소 입구

그러나 사실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첫째, 재외국민투표 제도의 시행 자체가 충분히 홍보되지 않았다. 투표 후 트위터에 투표했다고 소식을 전하니, 이런 제도가 있었냐며 가슴을 치는 유권자가 내게 댓글을 남겼다. 적어도 재외국민등록을 한 사람에게는 우편이나 메일로 제도의 시행과 선거인 등록방법을 직접 고지해야 하지 않는가. 나는 작년 여름에 인터넷으로 등록했으나 별도의 연락을 받지 못했다.

둘째, 선거인 등록을 선거인 쪽에서 직접 해야 한다. 공관 방문이나 우편 발송 등도 상당히 번거롭다. 한국처럼 전자정부 시스템이 이미 잘 갖춰진 나라에서 다양한 활용법을 고민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전 정권과 달리, 현 정권이 전자정부 시스템에 무관심하다는 것이 이미 중평이긴 하다만, 고비용을 투자해 확보한 시스템을 제대로 이용하지 않는다는 게 무척이나 어리석다. 게다가, 외무부 홈페이지나 주불 한국대사관 홈페이지를 봐도 우편 등록에 관한 정보가 부실하다. 처음 주불 한국대사관 홈페이지를 가 보니, 외무부 홈페이지를 통해 접속하도록 링크가 되었다. 한국이나 미국처럼 인터넷 접속속도가 빠른 나라가 아닌 데서 한국 정부부처의 사이트에 접속하는 게 얼마나 답답하고 불편한 일인지 배려가 없다. 우편을 이용한 선거인 등록의 경우에도 작성요령이 상세하지 않아, 공문서 양식에 익숙하지 않은, 20대 초반의 여러 지인들로부터 어떻게 작성하느냐고 문의를 받곤 했다.

셋째, 순회영사를 통해 직접 접수도 일부 받기는 했지만, 순회영사가 실시된다는 사실 자체가 잘 홍보되지 않는다. 나 역시 주불 한국대사관 영사과 직원들이 리옹에 순회한다는 사실을 당일 오후에야 알음알음으로 알고 겨우 직접 등록했다. 그러나 순회영사 고지에도, 선거인 등록에 필요한 서류가 명확하게 고지되지 않았다. 신분 증명을 위해 당연히 여권을 지참했다. 그러나 현장에서 여권사본 제출을 요구받았다. (순회 영사라면, 복사기 정도는 갖춰진 업무공간에서 미팅이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 리옹시 외곽에 자리한 호텔 한 구석, 어두운 휴게용 탁자에서 영사 업무가 이뤄지다니... 해외공관 근무자들이 출장 시 기본적인 현장 조사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리옹에만 한인교회가 3곳, 한글학교 등의 공간들도 있는데, 영사관 직원들은 기본적인 리옹 지리조차 파악하지 않고 시내가 아니라 교통이 불편한 시 외곽의 호텔(방도 아니고) 대기실을 이용했다. 독일에서 공부하는 지인에 따르면, 다니는 대학 강의실에 한국 학생들을 모아놓고 신청서를 돌려서 선거인 등록을 했다고 한다. 동별 주민센터나 구청 직원들의 빠르고, 친절한 공공 서비스 수준을 똑같이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정말 주먹구구식이었다. 본론을 벗어난 논의일지는 모르나, 재외국민에 대한 해외공관 업무가 기본적으로 이리 부실한데, 어떻게 재외국민투표 제도가 세심한 배려 속에 성장하겠는가.

넷째, 투표소 문제가 있다. 나와 함께 선거인 등록을 한 한국 남학생 두 명은 파리까지의 이동시간과 비용 문제로 최종적으로 투표를 포기했다. 리옹에서 파리까지의 이동시간은 기차로 두 시간 남짓, 집에서 리옹의 기차역을 거쳐 파리에 올라가고, 파리의 기차역에서 다시 대사관까지 걸리는 시간을 합치면 왕복 6시간이다. 평일에는 수업이나 일이 있으니 올라갈 수가 없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기차표가 만 25세 이하 50% 할인을 적용해도 주말엔 60유로(한화로 10만 원이 넘는다)에 달한다(평일엔 조금 더 싸다). 만 25세 이상인 나는 25% 할인을 받아도 80유로, 기타 교통비나 밥값 등까지 셈하면 최하 100유로(15만 원)은 있어야 나의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다. 리옹은 그나마 파리에서 가까운 편이다. 한참 더 남쪽인 몽펠리에나 마르세유에서 파리로 올라오면, 비용과 시간도 당연히 추가된다. 특히나 한정된 예산으로 생활하는 유학생들에게는 무척이나 부담스러운 금액이다.

이쯤 되면 투표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다. 투표는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갖는 여러 권리들 가운데 고작 하나가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 구성의 기본원리요, 내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갖는 기본권이다. 수십 년간 제한받아 오다가 2007년 재외국민들이 공직선거법 참정권 제한을 헌법재판소에 제소해 되찾은, 더더욱 소중한 권리다. 첫 시행이란 미비한 점이 많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이해는 할 수 있으나, 사실은 하나마나한 소리다. 대선 후까지 8개월, 다시 선거인 등록부터 투표까지 이 모든 과정을 똑같이 반복해야 한다면, 재외국민 투표제도는 시행하나 마나다.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는 정권은 실무적으로는 문제가 많아도 되기라도 하는가? 할 거면 좀 제대로 하자.

투표 직후 앵발리드 궁 앞에 가서 투표했다는 인증샷을 찍어 트위터에 투표 사실을 공개했다. 선관위보다도 빠르게 미국, 독일, 일본, 프랑스 등 각국에서 재외국민투표에 참가 소식이 실시간으로 공유되었다. 나는 투표기간 4일째에야 했지만, 주불 프랑스대사관에서 첫 번째로 투표한 유권자는 지지정당의 색깔인 초록색 옷을 입고 인증샷을 찍어 올렸다. 재외국민투표 개시와 함께 곧바로 생긴 "풍습"이다. 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체 투표인구 수는 적었지만, 참가한 유권자들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 가을부터 재외국민투표제 실시도, 선거인 등록방법의 상세한 요령을 알린 것도, 본선거일에 앞서 투표를 독려하고, 지지정당의 득표율을 높이기 위해 인증샷을 찍어 SNS를 활용하는 적극성에서도 국내 유권자들보다 적극적이다. 인터넷 선거인등록을 가능케 하고, 우편을 이용한 부재자 투표가 가능하다면 분명히 더 많은 유권자가 투표에 참여할 터이다. 지금은 영토 바깥에 거주하지만, 대한민국이 돌아가 살고 싶은 나라가 되는 데, 정말로 무관심할 한국인은 그리 많지 않다.

* 글쓴이는 철학과 사회학을 공부했고 2003년 이후 책을 만들어 왔다. 2011년 이후 프랑스에 머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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