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살인번호'를 시작으로 프랜차이즈 첩보시리즈물의 새 경지를 개척했던 007시리즈. 역대 제임스 본드를 거쳐 간 배우들을 살펴보면 우선 1대 제임스 본드 숀 코너리는 세계적인 대배우로 거듭났고, 2대 본드 죠지 라젠비는 6탄 '여왕폐하 대작전' 한 편에만 출연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7탄 '다이아몬드는 영원히'에 다시 1대 본드 숀 코너리가 출연했고, 1973년 제작된 8탄 '죽느냐 사느냐'에선 3대 본드 로저 무어가 출연하여 85년 14탄 '뷰투어킬'까지 12년 동안 출연하여 역대 최장수 본드로 활약했다. 로저 무어의 본드 시리즈에서부터 기상천외한 무기와 악당 캐릭터들이 등장하여 한층 볼거리를 돋우게 된다. 다만 1대 본드 숀 코너리에 비해 남성적인 매력이 다소 떨어진 것은 아쉬운 부분이었으나 기술적인 재미로 커버한다. 냉전시대의 대립이 절정에 달했던 1970년대부터 1980년대 007 시리즈는 자연스레 냉전시대를 활용한 소재들을 만들 수 있었다. 당연히 악역은 소련으로 설정되었다.

▲ UIP 직배상륙 초기였던 1989년 2월에 신영극장에서 기습개봉한 '007리빙데이라이트', UIP는 당시로선 처음으로 전국 서점 및 오디오 대리점을 통한 예매권 판매제도를 도입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하였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냉전시대가 종식된 이후 007시리즈는 좀처럼 활로를 찾지 못한다. 1987년과 1989년 제4대 제임스 본드 티모시 달튼을 주연으로 내세운 15탄 '리빙데이 라이트'와 16탄 '살인면허' 등은 미국에서 각각 $51,185,897과 $34,667,015를 벌어들이는 데 그쳤다. 냉전시대의 영웅으로 각광받았던 제임스 본드의 007 시리즈는 어느덧 시대의 흐름을 못 따라가는 한물간 퇴물취급을 받게 된다.

1990년대 들어 007시리즈는 좀처럼 속편제작에 들어가지 못한다. 시리즈 자체의 매력이 떨어진 것도 물론이거니와 그 사이에 톰 클랜시의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첩보물 '잭 라이언' 시리즈를 영화화하여 해리슨 포드가 주연을 맡은 1992년 '패트리어트 게임', 1994년 '긴급명령' 이 연달아 흥행에 성공하며 제임스 본드에 대한 기억은 냉전시대의 영웅으로 박제되는 듯싶었다.

그러나 1989년 '살인면허' 이후 무려 6년 만에, 그리고 1990년대 들어서는 처음으로 007시리즈가 제작되어 전 세계 영화팬들에게 선보이게 된다. 제5대 본드에는 TV 시리즈 '레밍턴 스틸'로 전 세계적인 인기를 모은 피어스 브로스난이 낙점되었다. 전임 본드인 티모시 달튼보다 인지도도 훨씬 높을 뿐더러 이미지도 숀 코너리 이후 가장 제임스 본드에 어울리는 배우라는 기대감이 제작 전부터 감돌았다. 과연 6년 만에 선보인 007 시리즈가 부활할 것인지 관심이 모아졌는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냉전시대의 이분법적 대립에서 벗어나 이념에 구애받지 않고 개인의 이익을 위해 악행을 서슴지 않는 새로운 유형의 악당을 선보이며 구시대적인 이미지에서 탈피하였다. 그리고 다양한 볼거리와 빠른 화면전개를 통해 기존 액션영화의 흐름에 맞게 업그레이드된 007로 탄생한 것이 007을 잘 모르는 관객들에게도 충분히 어필할 수 있었다. 북미 박스오피스에서 역대 007시리즈 사상 처음으로 흥행수익 1억불을 돌파하게 된다. ($106,429,941) 그리고 국내에서도 서울관객 355,498명을 동원, 그해 겨울 개봉작들 중 최다 관객을 동원했다.

1993년 '클리프 행어'로 그해 여름을 석권했던 레니 할린 감독이 자신의 부인인 지나 데이비스를 주연으로 내세워 막대한 제작비를 들인 17세기 배경의 해양액션 모험극 '컷스로트 아일랜드'는 무려 9,800만 불의 제작비를 들였으나 전미 흥행 수익은 고작 1,000만 불을 겨우 넘는 재앙과 같은 결과를 낳았다. 국내에서도 대대적인 홍보를 통해 선을 보였지만 서울관객 258,920명을 동원하는 데 그쳤다.

'컷스로트 아일랜드'의 제작사는 '람보', '터미네이터2', '원초적 본능', '클리프 행어' 등으로 명성을 떨친 캐롤코 영화사였다. 80년대, 90년대 히트작들을 양산하던 캐롤코는 93년 야심작 '슈퍼마리오'가 흥행 참패를 겪으면서 급격한 재정악화를 겪기 시작했다. 파산 직전의 캐롤코는 마지막 보루였던 '컷스로트 아일랜드'에 희망을 걸었으나 이마저도 물거품이 된다. 국내에서는 당시 영화사업에 의욕을 갖고 진출한 삼성이 캐롤코에 제작비의 5%를 우선 지원해주는 조건으로 배급권을 따냈다. 하지만 캐롤코의 과거 명성만 믿고 베팅한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그 외에 외국영화들로는 데이빗 핀쳐 감독, 브래트 피트, 모건 프리먼 주연의 스릴러 '세븐'이 11월에 개봉했으나 열렬한 반응에 힘입어 장기흥행에 돌입한다. (서울관객 394,034명 동원) 픽사가 처음으로 제작한 3D 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 도 국내 관객에게 첫 선을 보인다. 서울관객 317,994명을 동원하는데 미국에서의 폭발적인 흥행성적($191,796.233)에 비하면 다소 기대에 못 미친 결과라 할 수 있다. 지금은 2D 애니메이션이 희귀한 상황이지만, 당시만 해도 3D 애니메이션 자체가 관객들에게 낯설게 여겨졌고 쉽게 다가서지 못한 부분도 작용했다.

코미디의 귀재 짐 캐리의 천방지축 원맨쇼가 판을 치는 '에이스 벤츄라2' (서울관객 160,014명), 사랑에 빠진 대통령의 달콤한 로맨틱 스토리를 로맨틱 영화의 거장 로브 라이너가 깔끔하게 연출한 '대통령의 연인' (서울관객 168,346명), 웨슬리 스나입스와 우디 해럴슨의 버디 액션무비 '머니 트레인' (서울관객 151,163명) 등은 15만~20만 명 사이의 중급흥행을 기록하였다. 슈퍼모델 신디 크로포트가 영화에 데뷔하여 화제를 모은 '페어게임'은 조악한 영화의 완성도로 인해 관객들에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고 조용히 간판을 내린다. (서울관객 113,280명 동원)

한국영화 중에선 박중훈, 정선경 주연의 풍자 코미디물 '돈을 갖고 튀어라' (김상진 감독)와 모델 출신이며 국내 유일의 8등신으로 더 화제가 된 박영선이 과감한 노출을 감행하여 시선을 모은 에로영화 '리허설' (강정수 감독) 등이 많은 화제를 모았다.

우연히 거액의 돈을 쥐게 된 백수건달(박중훈)과 다방 여종업원(정선경)이 펼치는 좌충우돌 코미디 '돈을 갖고 튀어라'는 당시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이 전국을 강타하며 세간의 입방에 오르고 내리던 시기에 비자금을 직설적으로 풍자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박중훈, 정선경 외에도 '장군의 아들'에서 쌍칼 역 이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던 김승우가 겉은 살벌해 보이지만 실상은 어리숙하고 우스꽝스런 킬러로 등장하여 서서히 대중의 시야에 들어오게 된다. 포복절도할 유머를 내세운 '돈을 갖고 튀어라'는 서울관객 167,108명을 동원한다. 93년 '투캅스', 94년 '마누라 죽이기'로 연타석 홈런을 날린 주연배우 박중훈의 이름값에 비하면 다소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라 할 수 있다.

강정수 감독이 연출하고 최민수와 박영선이 주연을 맡은 '리허설'은 진한 농도의 정사장면과 파격적인 노출신 등으로 많은 화제를 모았다. 그런데 애당초 이 영화의 여자 주인공은 박영선이 아닌 '월드스타' 강수연이 맡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나친 노출신이 부담이 되었는지, 여자 주연은 모델로서는 베테랑이지만 영화에서는 사실상 신인급이 박영선이 맡게 되었고, 박영선은 몸을 사리지 않는 노출연기로 성인관객들의 시선을 붙들어 놓는다. 서울관객 160,141명을 동원하며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주연배우 박영선은 이후 더 이상 주목을 끌지 못하고 서서히 대중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간다.

80년대 청춘영화의 귀재였던 이규형 감독이 한국판 '슬램덩크'를 표방하고 야심차게 제작한 애니메이션 '헝그리 베스트5'는 서울관객 39,769명을 동원하며 흥행에 참패한다. 이미 '슬램덩크', '마지막 승부' 등을 접한 관객들이 다시 또 비슷한 소재의 농구 콘텐츠, 그것도 애니메이션을 극장에까지 돈을 주고 올 생각은 미처 안 한 듯싶다.

1995년 겨울 극장가는 1993년, 1994년에 비해 다소 조용한 편이었다. 눈에 띄는 블록버스터가 없었던 원인도 컸다. 그러나 007시리즈가 한물간 시리즈라는 오명을 벗고 새롭게 재기에 성공한 것에 의의를 둘 수 있는 시즌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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