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선 세계 최대의 전자제품 전시회가 열린다. 영문 머리글자를 따서 CES라고 부른다. 세계 유수의 전자업체 2,000여 곳이 참가하고 10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방문한다. 언론 입장에선 첨단 전자제품의 흐름을 미리 알 수 있단 점에서 매우 매력적이고 중요한 취재꺼리다.

그렇다면, 한국 언론에게 CES는 무엇일까? 아니 CES에서 가장 중요한 반드시 취재해야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주요 경쟁국의 첨단 제품 현황 아니면 국내 전자 업체들이 경쟁을 딛고 선전하는 모습 그것도 아니라면 세계 전자 업계의 판세와 동향. 아니다. 모두 틀렸다. 언젠가부터 국내 언론들에게 가장 중요한 CES 일정은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일가의 CES 관람 스케치다.

▲ 2010년 1월 11일자 조선일보1면.
지난 2010년 이후의 풍경이다.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경영 일선에 복귀한 이후 첫 공개 나들이었던 지난 2010년 CES를 관람하는 이건희 회장 일가의 모습을 일간지들은 대문짝만하게 다뤘다.

당시, 언론은 이건희 회장의 사소한 발언이 무슨 사회적 ‘화두’라도 되는 것처럼 받아썼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활동을 해야 한다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이명박 정부로부터 사면 복권을 받은 이 회장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CES를 통해 영향력을 과시했다.

이때, 이건희 회장은 부인 홍라희 리움미술관장, 장녀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장남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 차녀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 등 가족을 대동한 채 언론 앞에 등장했다. 기자들을 상대로 “일본은 겁나지 않고, 중국은 쫓아오려면 시간이 걸린다”, “삼성도 까딱 잘못하면 구멍가게 된다” 등의 말을 남겼다. 늘상 있었던 ‘미래’에 대한 강조이자, ‘위기론’의 환기였다. 그러나 당시 언론은 이건희 회장 일가의 사진을 경쟁적으로 배치하며, 발언의 의미와 맥락을 과장하는 것은 넘어 이 회장 일가의 패션 같은 사사로운 것들까지 죄다 대서특필했다. 이때, 이건희 회장은 “아직은 어리지만 자식들을 광고 해야겠다”며 “내가 손을 잡고 다니는 이유는 아직 어리기 때문이다”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2년, CES에 이건희 회장이 다시 등장했다. 2010년과 완전 판박이다. 2010년처럼 좌우에는 이서현 부사장, 홍라희 관장, 이부진 사장을 대동했다. 2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회장의 말은 2010년과 거의 흡사했다. 이 회장은 “정신 안 차리면 금방 뒤처진다”며 “상상력 창의력을 활용해서 힘 있게 나가자”고 했다.

이러한 수준의 발언이 그 자체로 뉴스 꺼리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오직 이건희 회장이 했기에, 언론이 주목하는 수준의 당위다. 공식적 언급도 아니고 가족과 함께한 나들이에서 한 마디 한 것이다. 하지만 이 회장의 이 발언을 놓친 언론은 없다. 모두 비중을 실어, 2010년 그랬던 것처럼 대서특필했다.

이 회장과 삼성 일가에 대한 이 과도한 관심은 그 자체로 한국 언론의 황폐한 한 단면을 드러낸다. 언론이 삼성에 관심을 두는 까닭은 간단하다. 돈의 힘이다. 광고 때문이다. 회장 일가를 맹목적으로 쫓고 있는 셈이다. 언론의 이러한 태도는 그래서 보도라기 보단 ‘아부’에 가깝다.

▲ 2012년 1월 17일자 동아일보 2면
17일자 동아일보의 보도는 아부의 절정을 보여준다. 17일자 동아일보 2면은 삼성가 패밀리룩에 숨은 코드를 분석했다. 제목이 아예 ‘삼성가 ’패밀리룩‘에 숨은 코드는?’이다. 동아는 2010년 짙게 입었던 삼성가가 올해는 밝게 입은 것이 대단한 의미라도 있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다. 무려, “‘색(色)의 반전’을 시도했다”니 의미와 수사의 과잉이 아찔할 정도다.

동아의 아부는 적나라하다. 이부진 사장에 대해선 “많은 여성들 사이에 연예인 못지않은 ‘트렌드 세터’로 패션 센스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정평이 나있다”고 찬사를 바쳤다. 이 회장 일가의 패션을 찬양하느라 여러 패션 전문가가 고생을 했는데 그 수준은 가히 미학 비평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라스베이거스를 부각한 센스”, “부드러운 카리스마와 도시적인 세련미로 다르지만 하나의 톤”, “권위와 세렴됨, 부드러움과 여성스러움을 섞어 세련되면서도 섬세한 느낌” 등 읽는 사람의 손발이 죄다 오그라들 정도의 일방적 찬양이다. 동아는 이 모든 옷들이 ”주로 제일모직이 만들거나 수입하는 브랜드“라는 정보를 잊지 않았다.

아시다시피 이 회장의 부인인 홍라희 관장을 비롯해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은 모두 ‘가전’과는 상관없는 인물들이다. 언론이 CES에서 그들을 주목할 이유는 전혀 없다. 특히, 동아처럼 그들의 패션에 관심을 갖는 것은 매우 망측한 일이다. 오로지 그들이 이건희 회장의 일가이기에 가능한 매우 한국적 상황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동아가 마르고 닳도록 찬양한 이서현 부사장은 동아일보 일가의 며느리다. 김병관 동아일보 명예회장의 차남 김재열은 삼성엔지니어링의 사장으로 이서현 부사장의 남편이다.

한국의 언론이 삼성의 문제를 정면으로 직시하지 않은 채, 외려 이건희 회장을 중심으로 한 삼성 일가의 모습을 신격화에 가까운 예우로 대접해준지는 꽤 되었다. 오죽하면 가족 나들이가 1등 신문 조선일보의 1면 탑으로 등장할 정도겠는가.(2010년 1월 11일, 사진 참조) 17일자 동아일보는 그 예우가 이제 눈 뜨고 봐주기가 볼썽사나운 수준임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동아일보의 이 혹독한 삼성 사랑을 뭐라 해야 할까? 이제부터 동아일보는 패션지인 것일까? 아니면 삼성 가족일보? 차라리 제호 밑에 ‘우리도 삼성 가족이랍니다’고 쓰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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