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정부가 중반을 넘어서자 유시민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은 “한나라당이 집권해도 나라가 망하는 것은 아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경호실장’을 자임했던 유시민 통합진보당 대표는 지난 2006년 5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나 이명박 서울시장이 집권해도 나라가 망하진 않는다. 대한민국은 이미 일정한 궤도 위에 올라와 있어 국민은 과거보다 여유 있는 입장에서 집권세력을 선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 2006년 5월 15일자 중앙일보 33면

한나라당이 집권해도 나라가 망하는 건 아니라고 했었는데...

정치적으로 정말 화끈한 얘기였다. 곧이곧대로 해석하자면, 정권을 넘겨줄 수 있다는 얘기였다. 이 발언을 지렛대로 유 대표를 비롯한 영남권 친노들은 하고 싶은 일과 하고 싶은 말을 정말 다했다(는 것이 훗날 관계자들의 평가다). 지지율이 떨어지고 정치적 지지자들이 떨어져 나가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말이 정치적으로 쿨한 태도로 포장됐고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맡기겠단 발언이 곧 역사적 사명감을 대리했다. 유 대표처럼 직접적으로 표현하진 않았으나,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인식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제 이명박 정부의 임기가 채 1년도 남지 않았다. 문득, ‘반MB’ 전선에 탑승해 있는 유 대표의 지금 생각은 어떤지 궁금해졌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다. 역사의 반복을 믿는다면 유 대표의 말은 유효하다. 유 대표의 말대로 MB집권 이후 나라는 망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정한 궤도에 올라와 있다’던 많은 것들이 허물어졌다. 이는 이명박 정부가 경제적 실정을 저질렀단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이명박 정부의 대한민국은 ‘망했다’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로 총체적 퇴행을 겪었다.

유 대표의 인식이 맞았던 것인지 아니면 틀렸던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각자의 몫일 수 있다. 하지만 유 대표만큼은 틀렸다. 한나라당이 집권해도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던 유 대표의 말은 참여정부의 성과란 화석과 같이 굳건한 것이어서 되돌릴 수 없단 오만함이 배어있다. 하지만 지난 9일 <힐링캠프>에 출연한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말처럼, 이명박 정부는 참여정부의 거의 모든 것을 쉽게 허물었다.

이제, 이명박 정부의 ‘정치적 경호실장들’도 고해성사를 해야 않을까

이명박 정부의 임기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참여정부의 임기가 뒤로 갈수록 ‘정치적 경호실장’을 자처했던 유 대표의 언행 역시 구겨져갔다. 이명박 정부의 정치적 경호실장 역할을 자임해왔던 이들도 마찬가지다. 임기와 함께 권세도 구겨지는 것은 만고불변한 권력의 속성이다. 당시, 유 대표의 구겨진 언행이 이명박 정부를 불러오는 주술과 같았다면 이명박 정부의 정치적 경호실장을 수행해왔던 ‘형님’들의 권세가 구겨지는 것은 ‘반MB’전선 강화로 이어지고 있다.

참여정부 말기 유 대표의 발언이 그 자체로 ‘한나라당 선거운동’이나 다름없었다면 이명박 정부 말기에 속속 마각을 드러내고 있는 ‘형님’들의 비리 혐의는 그 자체로 ‘야권 연합의 선거운동’이나 진배없어 보인다. 이제 ‘형님’들 가운데 누군가 과거 유 대표가 그랬던 것처럼 “야권 연합이 집권해도 나라가 망하는 것은 아니다”고 할 것 같다.

이상득, 최시중 그리고 박희태까지. 이명박 정부의 이른바 ‘6인회’(이명박, 이상득, 최시중, 이재오, 박희태, 김덕룡)멤버들이 몰락하고 있다. 2007년 대선 당시 MB는 자신과 형님 그리고 형님의 친구들로 구성된 선거 사령탑을 꾸렸다. 이른바 ‘6인회’다. 선거 승리 이후 이들은 분야별 권력의 최고 ‘실세’가 되었다. 이상득, 박희태 의원은 사실상 여의도를 통치했다. 최시중, 이재오는 ‘언론장악’과 ‘4대강’ 등 이명박 정부의 최우선 과제에 대한 맞춤형 요격기로 높이 날았다. 형님을 넘어서고자 했던 이재오 의원만이 약간의 부침을 겪었을 뿐, 형님과 그 친구들의 위세는 대체로 더할 나위 없이 탄탄했다.

밑동 째 파헤쳐지고 있는 형님들의 권력

하지만 지존무상, 흐르는 세월에 장사 없다고 해야 할까. 이명박 정부 자체이자 이 정권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형님들의 권력이 밑동 째 파헤쳐지고 있다. 이상득 의원은 의원실 자체가 ‘도둑놈 소굴’이란 조롱과 함께 이미 권력의 모퉁이로 밀려났다. 불출마 선언은 끝이 아니라 시작점이다. 이 정권의 문제로 누군가 감옥에 가야 한다면 상징성으로 보건대 어쩌면 그 순서는 이상득 의원부터일지도 모른다. 박희태 국회의장 역시 위태롭다. 선관위 디도스 공격의 배후로 의심받던 그는 이차저차 위기를 넘기나 싶었지만 ‘전당대회 돈봉투 살포’ 의혹으로 벼랑 끝이 한 발자국이다. 박근혜 비대위가 이미 그에 대한 사실상의 용도폐기를 결정한 가운데 이제 관심은 그 돈이 과연 누구의 돈이냐 하는 가로 모아지고 있다. 만약, 출처를 밝히지 못하거나 도저히 밝힐 수 없는 돈이라면 그 역시 꼼짝없이 철창 행을 각오해야 할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국정원장보다 한 수 위의 정보력을 갖고 있으며 가장 오래 그리고 꾸준히 대통령과 독대하며 정국을 논해왔다는 이 노련한 정객 역시 위기를 피하지 못하고 있다. ‘양아들’로 불리던 정용욱 전 방통위 정책보좌관을 향해 있는 각종 비리 혐의들은 이 정부의 성격인 ‘사익추구동맹’의 실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정 전 보좌관은 호랑이의 가죽을 빌려 쓴 여우였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모두 호랑이를 노려보고 있는 중이다.

한나라당이 집권해도 나라가 망하는 건 아니라던 유 대표의 말은 틀렸다. 이명박 정부 4년 만에 집권의 목적은 ‘사익 추구’로 변질됐고, 대한민국의 권력 건전성은 사실상 패망 선고나 다름없는 기능 정지 상태에서 부패해가고 있다. 유 대표는 이제 “한나라당이 집권했더니 나라가 망했다”고 말할까. 그런 그가 공소시효도 지난 야권의 돈 봉투 파문을 다시 꺼내든 까닭은 무엇일까. 이제 그에게 정부여당의 형님들보단 민주당의 형님들이 더 끔찍해진 것일까. ‘반MB’를 외치며 진보를 통합한 그는 형님들의 권력이 몰락해가는 판국에 또 다시 어떤 무엇의 ‘경호실장’이 되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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