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래 축구대표팀 감독에 대한 급작스런 경질로 축구계가 한순간에 격랑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대한축구협회는 7일 밤, KBS 스포츠뉴스를 통해 조광래 감독을 전격 경질한다는 뜻을 밝혔고, 후임 감독으로 압신 고트비 전 축구대표팀 코치, 최강희 전북 감독, 홍명보 올림픽팀 감독 등을 고려하고 있다고 보도해 처음 이 사실을 대외적으로 공표했습니다. 뒤이어 8일 오전,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경질 사실을 공식 발표했고 이달 안에 새 감독 인선 작업을 마무리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1년 5개월 동안 이어진 조광래 감독 체제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최근 이어진 성적 부진, 불분명한 팀 운영 등은 하락세를 부추겼고 결과적으로 불신임으로 이어지면서 경질이라는 최악의 마무리로 끝났습니다. 여론이 좋지 않았고, 무엇보다 월드컵 예선에서 탈락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조성된 것이 감독 경질이라는 초강수로 이어졌습니다. 대체로 여론은 조 감독의 경질을 어느 정도 반기는 분위기입니다. 분위기 전환 차원에서, 아예 새 판을 짜고 다시 시작하자는 의견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경질에 따른 여러 가지 의혹은 분명하게 풀고 갈 필요가 있습니다. 조광래 감독 역시 개인 성명서를 통해 "이번 상황을 통해 축구협회가 보여준 행정의 난맥상에 대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겠다"는 뜻을 밝혀 이번 경질 과정에 대한 진한 아쉬움을 토로했습니다. 감독을 경질한 과정만큼이나 이번에 축구협회가 보여준 후진적인 행정력, 절차 등은 제대로 짚고 바꿔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 조광래 감독ⓒ연합뉴스

대한축구협회 정관을 무시한 절차

이번 조광래 감독 경질은 절차, 방식부터 완전히 잘못됐습니다. 통상 감독을 선임하고 불신임해 경질하는 권리는 기술위원회가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쿠엘류, 본프레레, 베어벡 감독 등이 기술위원회 회의를 통해 불신임돼 자진 사퇴 형식으로 물러난 바 있습니다. 심지어 1998년 프랑스월드컵 본선 당시 네덜란드에 0-5 참패를 당했을 때도 기술위원회가 긴급 회의를 열어 차범근 감독을 중도 하차시킨 바 있었습니다. 모든 절차는 기술위원회를 통해 이뤄졌고, 이는 계속 지켜져 왔습니다.

이는 대한축구협회 정관에서도 보장되고 있습니다. 축구협회 정관 제47조에 따르면 기술위원회는 각급 대표팀과 선발팀, 상비군 등을 이끌 지도자를 추천하는 역할을 하면서 감독의 지도력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반면 이사회나 다른 임원진이 이에 대한 권한을 갖고 있는 것은 없습니다. 어떻게든 기술위원회를 통해 감독 선임, 경질 절차가 논의됐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8일 오전에 열린 기자회견에서 황보관 기술위원장은 정식 기술위원회 회의를 연 적이 없었다면서 "부회장단의 결정에 의해 이뤄졌다"는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을 했습니다. 부임한 지 1달도 지나지 않아 기술위원회조차 구성하지 않은 상황에서 임원진의 결정에 의해 감독 경질이 이뤄진 셈인데, 자신들 스스로 만든 정관 자체를 무시한 채 '밀실'로 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왜 방송사를 통해 먼저 공개 했나

그렇다면 왜 경질 사실을 방송사 뉴스를 통해 미리 흘렸는지도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통상 이런 논의가 있을 경우,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사전에 밝히겠다고 흘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 없이 방송을 통해 급작스레 가장 먼저 공표했고, 다음날 기자회견을 하는 전례 없는 방식으로 경질 사실을 알렸습니다. 일반 방송사도 아니고 국가기간방송이라 하는 KBS가 이 사실을 먼저 알렸다면 사전에 이와 관련한 논의를 일부러 미리 KBS에 흘린 것 아니냐는 의혹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일각에서는 축구협회 방송 중계권을 갖고 있는 KBS와 축구협회 고위 관계자가 사전에 접촉해서 '언론 플레이'를 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너무나 급작스럽고 전격적인 보도였던 만큼 이 의혹은 쉬이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 황보관 기술위원장ⓒ연합뉴스

기술위원장의 이해할 수 없는 처신

기술위원장에 취임한 지 1달밖에 되지 않았다 해도 상당한 갈 지(之)자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황보관 위원장의 처신도 문제입니다. 황보관 위원장은 레바논전 패배 다음날 YTN과 가진 인터뷰에서 "같이 발전적인 방향에서 대안을 제시하고 분석을 하면서 이야기 해야 될 것 같다"면서 조광래 감독을 일단 신임하는 쪽으로 방침을 정했습니다. 하지만 1달 사이에 회장단 내 불신임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급작스레 태도를 바꿨고 결국 조광래 감독을 6일 따로 만나 경질 사실을 통보하며 '꼭두각시 위원장'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하게 됐습니다. 이 자리에서도 역시 황보 위원장은 "부회장단의 결정"이라고 밝혔지만 이회택 축구협회 부회장이 경질 사실 보도가 나온 7일 밤, 한 언론사와의 통화에서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뉴스보고 알았다"고 해 더 의혹만 부추겼습니다.

8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여러 가지 더 큰 의혹을 부추긴 것도 그랬습니다. 황보 위원장은 기술위원회가 구성되지 않았음에도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았고, 월드컵 본선을 앞두고 계약을 맺은 스폰서들과의 문제 때문에 감독 경질을 했다는 일부 의혹을 그대로 인정하는 등 오히려 의혹과 의문만 부추긴 발언을 잇달아 했습니다. 곧 기술위원회를 구성해 절차를 밟겠다고 했지만 이미 물이 엎질러진 상황에서 의혹만 부추긴 황보 위원장의 태도는 많은 이들에게 실망감만 안겼습니다.

기자회견장에 나타나지 않은 축구협회장

조광래 감독을 경질하기로 방침을 정했다면 왜 경질을 했는지 명쾌한 답을 내놓을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회장단, 즉 그 가운데서 수장인 조중연 축구협회장이 책임을 지고 공개적으로 나와 밝혀야 했습니다. 하지만 조 회장은 기자회견장에 나오지 않았고 김진국 축구협회 전무와 황보관 위원장만 나왔습니다. 황보 위원장은 "전례를 봐서도 이런 문제는 기술위원장의 소관이다. 아직 기술위원회도 소집되지 않은 상황에서 회장님이 나온다는 것은 절차상 맞지 않는다."고 했지만 회장단의 결정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 해놓고 이렇게 말해 역시 앞뒤가 안 맞는 발언만 했습니다. 이번 일에 대해 조 회장이 자신이 책임이 없다는 식으로 나온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이해할 수 없는 처신이었습니다.

대안 없이 이뤄진 경질

경질을 하기로 했다면 확실한 대안을 갖고 다음 절차를 이어가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뚜렷한 대안이 없다고 스스로 시인했습니다. 뉴스 보도를 통해 고트비, 홍명보, 최강희 감독 등이 물망에 올랐지만 모두 다른 언론을 통해 "지금 하고 있는 것에만 몰두하겠다"며 고사해 거의 백지 상태에서 모든 작업을 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했습니다. 무방비 상태로 물만 엎질러놓고 뚜렷한 대책도 세우지 않은 무능력한 처신은 그야말로 후진적인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이런 상태면 새 감독에게 충분한 시간도 없이 2월 말에 열리는 쿠웨이트전을 준비해야 하는 처지가 됐습니다.

어쨌든 이번 일로 축구협회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큰 오점만 남겼습니다. 조광래 감독의 경질이야 최근 심각하게 나빠진 여론 때문에 이어진 것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이를 처리하는 과정은 한마디로 최악이었습니다. 구태의연하고 똑같이 반복되는 이 같은 모습은 한국 축구를 사랑하는 많은 팬들에게 상처만 입히고 등 돌리게 만드는 계기로 이어질 것입니다. 감독 경질만큼이나 책임 있는 모습, 혁신된 자세를 보여주는 축구협회의 처신이 지금 필요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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