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고브릭의 실눈뜨기] 불경한 상상을 해보자.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다분히 기독교적 세계관에 기대고 있다. 근거를 대자면 우선 많고 많은 직업의 세계에서 댄의 직업을 굳이 목수로 설정한 것. 다음으로 영미권에서는 흔한 이름이겠지만 유대의 예언자 이름인 다니엘(Daniel)을 쓰는 것. 마지막으로, 댄과 유사가족을 만들어가는 케이티의 평범하지 않은 직업은 불경한 상상을 보완할 결정적 근거로 쓰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를 기독교적으로 분석한 평론가가 있다면 아마 ‘극장에서 나와 세상을 바라보라’는 질타를 받았을 것이다. 댄과 케이티가 겪는 일들이 이미 우리 사회에서 너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안전망에서 벗어나 추락하는 서민의 삶이 뉴스가 되는 세상인가. 개가 사람을 무는 건 뉴스거리가 아니다. 오히려 새로 만들어낸 사회부조로 덕을 봤다는 시민이 있다면 기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확률이 높다. 그런데도. 36년생 켄 로치 감독은 뉴스가 되지 않는 뉴스를 거침없이 영화 소재로 삼았다.

켄 로치 감독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시작되면 검은 화면에 오가는 말소리만 들린다. 심장마비 때문에 직장에서 추락사고를 당할 뻔한 댄과 질병 수당 지급을 심사하는 공무원의 대화다. 심장이 안 좋다는 댄의 거듭된 재촉에도 불구하고 (얼굴도 보이지 않는) 공무원은 무의미해 보이는 질문을 이어나간다. 참다못한 댄은 까칠한 유머로 맞대응하고 결국 질병수당지급에서 탈락한다. 댄은 다시 일터에 나가려 하지만 주치의는 취업활동을 금지한다.

이번에는 실업수당 신청을 위해 직업센터를 찾은 댄. 실업수당 신청은 온라인으로만 가능하다는 황당한 안내를 받는다. 실업수당 신청은 고사하고 컴퓨터도 익숙지 않은 댄은 교육부터 수강하지만 마우스를 위로 올리란 소리에 마우스를 들고 손을 번쩍 든다. 어쨌든 갖은 고난을 뚫고 실업수당 신청에는 성공하지만, 인증 기간을 놓쳐 지급 명단에 오르고 만다. 다시 실업수당을 받으려 항고를 하지만 그동안 생활비가 없어 가구까지 내다 파는 처지에 몰린다. 그러나 기약이 없는 항고심 날짜. 참다못한 댄은 스프레이를 들고 직업센터 담벼락에 ‘I, Diniel Blake‘로 시작하는 그래비티를 남기기 시작한다.

켄 로치 감독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보는 사람만 보는 켄 로치의 영화

2017년 <나, 다니엘>을 처음 보고 짤막한 메모를 남겼다. ‘누구를 위한 영화인가’라는 내용이었다. 관객층에 대한 의문이 생겼기 때문이다. 댄, 케이티 같은 계층의 사람들이 극장에서 이 영화를 고를 확률은 얼마나 될까. 아트하우스 상영관이 있는 극장에 갈 시간은 낼 수 있을까. 긍정적인 대답을 떠올리기 어려웠다. 결국 <나, 다니엘>의 주 소비층은 유럽의 좌파감독 영화를 찾아볼 문화 자본이 축적되고 얼마 안 되는 상영 시간을 맞춰 극장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

모든 관객의 정치적 입장이 균일할 리는 없겠지만 애초에 비슷한 경향을 보이는 관객들. 즉, 경제성장보다 복지에 무게중심을 두는 진보적 계층에게 굳이 이 영화의 메시지가 다시 필요한지 의문이었다. 본인의 필요와 취향에 맞는 편향된 정보만 얻게 되는 필터 버블이 사회적 단절을 불러온다는데 그 현상이 꼭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SNS 세계에서만 나타나는 건 아닌 듯하다. 어쩌면 더 자연스럽고 광범위한 필터 버블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그래서 <나, 다니엘>이 잘 만든 영화라는 건 알겠지만 황금종려상을 거머쥘 만큼의 영화인지에 대해서는 깊은 의문을 가졌다.

4년이 지난 지금. 당시 가졌던 의문은 판단오류였다고 말해도 될 것 같다. <나, 다니엘>은 시대를 잘 만나 반짝 유행하고 마는 사회부조리 고발 영화로 그치지 않고 계급과 노동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꾸준히 언급되고 인용되는 레퍼런스로 서서히 자리잡고 있다. 당시의 오류는 켄 로치 감독에 대한 몰이해, 정확히 말해 감독의 연출 의도를 파악하기보다 애먼 트집을 잡으려는 뒤틀린 감상 자세가 앞섰던 것 같아 겸허히 반성하게 된다.

켄 로치 감독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해석이 필요하지 않은 명작

켄 로치 감독의 영화는 독법이 중요하지 않다. 어쩌면 이런 영화 평론의 가치에 가장 큰 의문을 만드는 역설적 작품세계인지도 모르겠다. 복잡한 영화이론은 물론이고, 과시적인 연출, 숨겨진 상징도 없다. 소재로 쓰이는 사회문제에 대한 제반 지식도 거의 필요 없다. 깊이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과 심정을 그대로 따라가면 느낄 수 있는 직관적이고 감성적이며 친절한 영화를 만들려는 의도에 정확히 부합하는 작품들이다.

특히 댄이 비슷한 처지의 이웃들과 호의와 관심을 나누는 장면들은 머리보다 가슴이 앞서는 뭉클한 순간들을 만들어낸다. 이웃집에 사는 흑인 청년 차이나는 쓰레기 분리수거도 제대로 하지 않아 댄의 잔소리를 듣지만,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은 댄을 친절하게 돕는다. 취업센터에서 만난 싱글맘 케이티와 함께 보내는 시간, 함께 이겨내는 고난들은 시스템의 사각지대에서도 더 나은 내일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게 만드는 따뜻하고 효과적인 설득의 도구다. 이처럼 이해보다 공감이 필요한 영화에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대는 것이 영화를 오독하는 지름길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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