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영화에 등장한 장례식 장면 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건 <러브 액츄얼리>의 그것입니다. 도입부에서 리암 니슨이 하늘로 떠난 아내에게 몇 마디 말을 남긴 후에 노래를 띄우죠. 이어서 장례식장에는 생전의 모습을 담은 아내의 사진과 함께 베이시티 롤러스의 'Bye Bye Baby'가 울려퍼집니다. <러브 액츄얼리>를 보지 못하고 여기까지 글로만 읽으신 분들에게는 별로 특별할 게 없을 겁니다. 그런 분들에게 잠시 설명하자면, 'Bye Bye Baby'는 제목과 달리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장례식에 어울릴 법한 노래가 아닙니다. 가사는 둘째 치고 빠른 템포에다가 흥겨운 분위기를 지닌 편이죠.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는 "그래, 장례식이라고 꼭 숙연하고 비통할 필요는 없잖아"라고 생각했습니다. 일종의 고정관념을 깬 것으로 여겨서 아주 신선했습니다. 나중에 제가 죽으면 저 영화처럼 색다른 곡을 들려주고 싶다는 바람도 가졌습니다. 그런데 몇 번이고 다시 보니 이건 단순한 발상의 전환이 아니더군요. 피상적인 관찰자로 머물지 않고 내부를 잠시 들여다보면, 해당 장면은 더 없이 큰 상실의 고통을 애써 속으로 삼키려고 발버둥치는 것이었습니다. 슬퍼도 슬프다고 말하지 않고, 아파도 아프다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억지로 웃으려고 하는 자의 비애는 얼마나 깊을까요?

이렇게 때로는 직접적인 화법을 통하지 않는 것이 역설적으로 더 큰 반향을 주곤 합니다. 아무래도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서 효과는 반감될 수도 있겠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허구한 날 비극의 주인공을 끌어다가 눈물이나 짜내려고 안달하는 신파극은 이제 질릴 대로 질렸습니다. 반면에 동일한 소재를 가지고도 거부감을 덜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동정심, 연민, 측은지심 따위의 감정을 유발하는 데 반드시 신파를 동반해야 하는 건 아니거든요. 그걸 이 영화 <50/50>이 몸소 보여주고 있습니다.

라디오 방송국에서 근무하는 애덤은 느닷없이 희귀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습니다. 그저 등이 아픈 걸로만 알았는데 종양이 생겼다고 하니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죠. 게다가 그의 나이는 고작 20대 중반입니다. 때문에 애덤은 스스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퍼뜩 실감하지 못합니다. 절친인 카일은 더 심각해서 이 사실을 알기 전이나 후에나 달라진 게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알고 난 후에 장난이 더 짓궂어졌습니다. 애덤을 데리고 술집에 가거나 그의 암을 무기 삼아 여자를 꼬시는 것도 주저하지 않을 정도죠. 주저하긴커녕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으니 관객으로서는 기가 찰 노릇입니다.

뒤로 쭉 이어지는 <50/50>의 이야기는 시종일관 저런 식입니다. 영화를 보는 시간의 상당수 동안에 주인공이 절반의 생존율을 가진 난치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간혹 "뭐지, 이건? 저 친구는 이제 곧 죽을지도 모를 판국 아닌가?"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이러한 반응은 <50/50>이 품고 있는 생소함 때문입니다. 보통 병으로 인해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사람을 다루는 영화는 드라마틱한 연출을 지향하기 마련입니다. 비극을 비극적으로 보여주어 카타르시스나 감동을 얻어내려는 계산이 깔린 거죠. 그에 반해 <50/50>은 비극을 희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이것을 보는 관객은 자연스레 기묘한 감정에 사로잡힙니다. 흡사 제목인 <50/50>처럼, 비극도 아닌 것이 희극도 아닌 애매모호한 상황에 빠지는 것입니다. 두 가지를 절묘하게 배분하고 혼합하는 윌 라이저의 각본과 조나단 레빈의 연출은 굉장히 능숙합니다. 놀랍게도 윌 라이저는 자신이 20대 초반에 겪었던 실제 경험담을 각본으로 썼습니다.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을 만큼 그는 <50/50>에서 아주 유쾌한 태도를 유지합니다. 지난 일이라 웃으면서 얘기할 수도 있는 것이겠지만, 사실 희귀암으로 요절할 지경에 놓인 애덤의 캐릭터만으로도 비극을 형성하는 요소로 모자람이 없습니다.

애덤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다가 차츰차츰 죽음을 대면하기 시작합니다. 심리상담을 하고, 물리치료를 받고, 함께 투병하던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 등을 접하면서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의식하죠. 그러면서 점차 주변에 도움을 구하고 그들과 이어진 크고 작은 관계에 감사함을 느낍니다. 특히 심리치료사인 캐스린을 대하면서 애덤이 조금씩 변화하는 대목은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50/50>에 필요한 드라마는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소재 자체의 무게가 이미 육중하니 과도하게 신파를 가미하지 않는 대신에, 코미디로 포장하며 현실을 관망하는 시점은 객관성마저 지닙니다.

<50/50>에는 참으로 무미건조한, 그래서 더 객관적이거나 현실적으로 묘사하는 순간이 종종 등장합니다. 다른 영화들과 달리 <50/50>은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극적으로 전달하고자 과장하는 연출을 지양합니다. 예를 들어 의사는 애덤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검사결과를 알려주지도 않고 녹음이나 하면서 제 할 일에만 여념이 없고, 불과 몇 시간 전까지 함께 웃는 얼굴로 대화했던 사람이 갑자기 고인이 됐으며, 암을 앓고 있는 환자를 위해 실내의 온도를 높여주는 것 하나도 배려하지 않는 것 등인데, 되레 태연하게 보여주고 있는 덕분에 우리는 영화가 아닌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아울러 윌 라이저의 시나리오나 조나단 레빈의 연출은 <50/50>이 단지 차별화만을 위해 코미디를 택한 것만은 아닐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합니다. 이를테면 찰리 채플린이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고 했죠? 이 말 그대로 <50/50>은 코미디 장르로 자아와 타자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은 극 중에서 애덤의 심정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공감하지도 못하면서 무턱대고 동정심이나 호기심을 표하는 사람들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위치라는 전제를 냉소적이되 유머러스하게 그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위험에 처하거나 곤란한 일을 겪고 있는 주변사람들에게 성급한 위로를 남발하곤 합니다. <50/50>의 애덤처럼 심각한 병에 걸려 사지를 넘나드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설사 그 순간에는 진심을 담은 말이라고 하더라도 십중팔구는 뒤돌아서자마자 남의 일이 되어버립니다. 그들이 겪는 일상의 고통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지내는 외부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필요가 없는 관계인 것도 사실이고요. 현실이 이럴진대 하물며 영화를 보는 관객은 어떻겠습니까? 막말로 눈물을 뚝뚝 흘린다 한들 값싼 동정심의 표출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 있겠죠.

이 모든 것을 떠나서 분명 <50/50>은 일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도 나름의 진정성과 깊이를 갖췄습니다. 때로는 음란하고 저속한 대화가 오가는 와중에도 마냥 웃을 수만은 없게 만드는 희한한 구석이 있습니다. 그런 데는 자신의 경험을 진솔하게 풀어낸 윌 라이저, 그의 이야기를 비교적 충실하게 재현한 조나단 레빈의 연출, 윌 라이저의 곁에서 실제로도 <50/50>의 카일 같은 친구였다는 세스 로건, 볼 때마다 장래를 더 기대하게 만드는 조셉 고든 레빗의 공이 컸습니다. 이들의 조합으로 <50/50>은 마치 슬픔을 감추고 웃는 얼굴로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삐에로와 같은 영화가 됐습니다.

★★★★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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