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깊은나무 16회를 보면 세종의 한글창제에 대한 부당함을 지적하기 위해 최만리가 장문의 상소를 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긴 탁자를 줄줄이 이어가는 상소의 길이가 억 소리 나게 한다. 임금에게 올라오는 상소는 흔한 일이지만 그것은 대부분 작은 두루마리에 담겨질 정도에 불과했다. 그럼 과연 최만리의 장문 상소는 근거가 있는 일일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물론 근거 있는 것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유림의 상소에는 최만리의 장문 상소는 세 발의 피에 불과할 정도로 엄청난 장문의 상소도 존재했다.

그것은 만인소로 불리는 일종의 연명상소이다. 언로를 보장해야 한다는 말은 왕권을 견제하기 위한 사대부의 나라 조선의 흔들리지 않는 원칙에 속했다. 그렇지만 뿌리깊은나무 16회에서 세종과 유림대표 혜강의 논쟁에서도 보였듯이 관료를 통한 상소는 그 뜻이 왜곡되는 일이 많을 수밖에 없다. 더욱이 영조 때에는 빗발치는 상소를 제어할 목적으로 일반 유생의 상소는 성균관 장의의 확인을 받게 했다. 그것이 영조 개인의 의지였다기보다는 역시나 붕당의 결과로 볼 수 있다. 또 그런 장치를 근실이라고 했다.

근실의 시행으로 정치적으로 열세에 놓여 있는 유림은 더욱 더 자신들의 뜻을 임금에게 알리기가 어려워졌다. 그런 언로의 열세를 타개키 위해 등장한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만인소이다. 만 사람의 뜻은 곧 천하사람 모두의 뜻이라는 명분을 내건 만인소는 정치 소수자였던 세력이 공론이라는 형식으로 정국을 돌파하고자 고안해낸 대응책이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만 명이 연명한 상소를 만든다는 것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로서는 대단한 결기가 아닐 수 없다.

▲ 두 번째 사진은 이 만인소를 반만 펼쳐놓은 길이다. 총 길이가 95.5M이니 다 펼치려면 운동장만한 전시실이 필요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이다

조선시대에 만인소의 규모를 갖춘 연명상소는 7건에 해당한다. 그 중에서 완전한 형태로 전해지는 것은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와 <복제개혁 반대 만인소>이다. 후자인 복제개혁 반대 만인소는 갑신정변으로 인해 정책자체가 취소되어 발의되지 못했지만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는 실제 임금에게 제출되었다. 이 만인소는 연명한 자의 수만 해도 10.094명에 상소의 길이만 무려 95.5미터에 달한다.

개인의 상소도 결국 같은 부류의 공론이 반영되었겠지만 개인이 작성하면 되는 것이기에 과정은 단순하다. 그러나 형식을 중요시했던 유림에게 연명상소란 대단히 복잡하고도 엄격한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연명상소 혹은 공동상소의 엄청난 제작과정을 보면 참 한가한 사람들이라는 생각도 들게 하는데, 그것은 한편으로 실권을 잡지 못한 유림들에게 그 자체로 소일거리가 돼주었을 거란 다소 안쓰러운 생각도 갖게 된다.

상소라는 것이 본래 정치에 참여치 못하는 유생들에게는 정치참여의 유일한 통로 역할을 해준 것이었다. 율곡 이이가 "인심이 동의하는 것이 공론이고, 공론이 있는 곳이 국시(國是)이다"고 했듯이 위민정치를 표방한 조선에 있어서 공론의 형성과 이의 정치반영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상소는 붕당정치가 활성화된 조선에 있어 정국의 변화를 촉발시키는 주요한 전환점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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