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를 부르는 그 이름 직장상사>를 보고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전 역시 할리우드의 화장실 유머와 코드가 정말 잘 맞습니다. 여타 국적의 영화보다 할리우드의 영화가 적나라하게 내뱉는 화장실 유머를 들으면 웃음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 어떤 방식의 코미디도 이보다 더 웃길 수는 없어요. 제 속엔 서로 다른 유형의 제가 많다는 걸 잘 알지만, 필시 변태남도 한 명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제목이 왜 이리 장황한 건지 이해 못하겠다면서 불평하며 본 <스트레스를 부르는 그 이름 직장상상>는, "제목 따윈 아무렴 어때?"라는 관용을 베풀게 했습니다.

직장상사를 죽이려고 작당하는 주인공 세 명은 고등학생 때부터 단짝으로 지낸 사이입니다. 먼저 닉은 회사에서 누구보다 일찍 출근하고 누구보다 늦게 퇴근하는 일중독자입니다. 승진을 미끼로 은근슬쩍 협박하는 직장상사의 비위에 맞추려고 휴일에도 근무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치과의사 보조이자 결혼을 앞둔 데일은 틈만 나면 성희롱하는 직장상사 때문에 미칠 지경입니다. 마지막으로 커트는 세상에서 가장 착하고 모범적인 직장상사와 함께 일하면서 즐거운 삶을 영위하는 중입니다. 그렇다면 커트는 다른 두 명과 다르지 않냐고요? 에헤이~ 인생이란 어찌 될지 모르니 기다려보세요.

퇴근 후에 맥주를 마시던 셋은 직장상사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다가 그들을 죽이고 싶다는 얘길 나눕니다. 이건 사실 맘이야 굴뚝같지만 차마 실행에 옮길 순 없는, 이 세상 모든 직장인이 공유할 수 있는 바람이자 농담이었죠. 그런데 이 빌어먹을 직장상사들이 세 사람을 괴롭히는 수위가 점차 높아지자 다들 뚜껑이 빵~ 하고 열려버립니다. 급기야 너덜너덜해진 이성을 휴지통에 던지고 "기필코 내 너희들을 정의의 이름으로 처단하겠다!"라는 의협심(객기?)에 시달립니다. 물론 마음먹은 것처럼 쉽지는 않아서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하는 일부터 거듭 꼬이기만 합니다.

얼마 전에 수능이 끝나서 누군가는 기뻐할 테고 누군가는 더욱 우울하겠지만 진짜 지옥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걸 유념해야 해요. 특히 어렵사리 취업에 성공했다면서 환희로 가득했는데, <스트레스를 부르는 그 이름 직장상사(이하 직장상사)>처럼 망나니 뺨을 걸레로 만들고도 남을 직장상사를 만나면 아주 환장합니다. 이 영화의 제목이 길긴 하지만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죠. 직접 직장생활을 해보면 "일이 힘든 건 괜찮지만 사람이 힘든 건 못 견딘다"라는 직장생활의 진리가 어떻게 해서 성립이 된 건지 몸소 체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직장상사>는 폭넓은 층으로부터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는 이야기인데, 세 사람이 살인을 도모하지만 코미디 장르를 택한 만큼 시종일관 밝고 유쾌합니다. 당연히 "저러다 살인자가 되면 어쩌지?"라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볼 필요도 없습니다. 어차피 짜여진 대로 쉽게 예측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모든 일이 이루어집니다. 그게 바로 코미디 장르의 한계이자 장점이죠. 이것을 감안하고 본다면 <직장상사>는 굉장히 유쾌하고 웃긴 영화로 다가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저처럼 화장실 유머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최소한 본전 생각은 나지 않을 겁니다.

한편으론 또 시나리오가 좋아 마냥 가볍지도 않습니다. 소재로 한 사이코 직장상사와 인종차별, 불법 다운로드, 글로벌 경제를 이 꼴로 만드는 데 일조하고 파산한 리먼 브러더스 등등, 사회적인 차원의 문제를 코믹하게나마 갖다 붙여서 적절한 지점에 세워뒀습니다. <직장상사>를 보면서 가장 먼저 빵 터진 부분도 리먼 브라더스 관련 에피소드였습니다. 세 사람이 맥주를 마시다가 동창 중에 월등하게 잘 나갔던 친구를 만나는데, 그는 다름 아닌 리먼 브러더스에 다니다가 졸지에 직장을 잃고 희한한 짓거리(?)를 하고 다닙니다. 이건 일종의 페이소스마저 자아내는 유머였어요.

시나리오를 칭찬하고 싶은 이유는 또 있습니다. 극 중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듯이 <직장상사>의 큰 틀 자체가 히치콕의 <열차 안의 낯선 자들>에 등장한 '교차살인'을 차용하고 응용한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에다가 직장인의 비애를 녹인 코미디 버전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시나리오만큼이나 세스 고든의 엽기적인 연출도 상당히 좋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우리나라의 코미디 영화가 흔히 저지르는, 어쭙잖게 드라마와 교훈을 주입하려는 볼썽사나운 시도를 하지 않아요. 관객에게 필요한 선에서 현명한 길을 살짝 보여주는 것으로 끝맺는 솜씨가 제 맘에 쏙 들었습니다.

<직장상사>를 칭찬하려면 절대 빠질 수 없는 또 한 가지는 주연보다 몇 배 더 화려한 조연들의 활약입니다. 주인공들의 직장상사로 나오는 세 사람을 연기한 배우가 무려 케빈 스페이시, 제니퍼 애니스톤, 콜린 패럴입니다. 아~ 정말 이들의 연기는 명불허전이에요. (제니퍼 애니스톤의 - 포스터의 문구를 빌어서 - '색광녀' 연기는 끝내줍니다) 주인공들의 살인계획을 도와주겠다고 접근하는 제이미 폭스, 잠깐 등장했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도널드 서덜랜드, 하드코어의 절정인 캐릭터를 연기하는 이안 그루퍼드까지, <직장상사>는 이들의 연기를 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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