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프로그램에서, 특히나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토크쇼에서 제일 난감한 손님은 표현을 잘 못하는 어눌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풀어낼 수 있는 풍부한 이야기와 말을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그런 어눌함은 여러 사전 준비와 MC들의 역량, 그리고 똑똑한 편집으로 충분히 보완할 수 있거든요. 오히려 조금은 예능 출연을 낯설어하고 카메라 앞에서 말을 주고받는 것을 어색해 하는 모습이 시청자들에게는 보다 진솔하고 솔직한 것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유창함보다는 진정성, 그 안에 담고 있는 뜻과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는지의 여부입니다.

그렇기에 어눌하고 능숙하지 못한 게스트보다 더 다루기 힘든 사람은 비슷한 포맷의 다른 프로그램에서 이미 많은 것들을 이야기한, 혹은 개인이나 작품 홍보를 위해 예능 프로그램을 순회해서 더 뽑아낼 것을 찾기 힘든 너무 익숙한 초대 손님입니다. 게스트에게 관심을 가지고 시청하는 이들은 이미 이전의 다른 곳에서, 혹은 그 내용을 다룬 기사들을 통해 이미 많은 정보를 알고 있습니다. 중요한 내용들은 이미 먼저 방송된 프로그램에서 대부분 털어 놓은 것일 테니까요. 그러니 시청자들이 식상하고 지루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이전 방송에서 했던 그 외의 무언가를 재포장하고, 또 다른 에피소드를 찾아내고 제공해야 합니다. 그게 결코 만만치 않기에 대다수의 게스트들은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비슷한 흐름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것이구요.

승승장구가 나가수를 통해 국민 요정으로 떠오른 박정현을 초대하고자 했을 가장 큰 고민이 바로 이런 식상함과 지겨움을 피하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녀는 이미 1대1토크에 가장 특화되어 있었던, 게스트에게 가장 깊이 집중하고 세밀하게 다루는 무릎팍도사에 출연했습니다. 그것도 나는 가수다의 열풍과 위대한 탄생의 출연이 결정되었던, 그녀의 인기와 그에 따른 대중의 궁금증이 절정을 이루었던 절묘한 시기였고, 매우 최근의 일이었죠. 강호동과 함께 박정현은 자신의 성장과정과 집안 배경, 한국과 미국 사이에서의 정체성 혼란, 한국으로의 귀국과 가수로서의 삶의 많은 부분을 미리 이야기했습니다. 박정현에 대한 매우 친절하고 모범적인 방송용 자서전이 이미 완성되어 있었던 셈이죠. 어떻게 무릎팍도사를 극복할 것이냐. 어쩌면 승승장구가 출발할 때부터 해야 했던 가장 큰 고민이 바로 그것이었을 겁니다.

그러니 승승장구에서 다시 그녀를 초대했을 때, 박정현과 함께한 시간의 방송 분량동안 나눌 이야깃거리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다른 게스트의 출연분에 비해 개인사를 세밀하게 따라가며 인생을 재구성하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어요. 도리어 그동안 이 프로그램에서 보여주었던 장점이었던 진지함이나 진솔함보다는 개인적인 연애사, 유명세에 따른 생활의 변화, CF 촬영에 대한 소소한 장난 같은 것이 많은 비중을 차지했던 것은 그녀가 무릎팍도사에서 보여주었던 것과의 접점을 최대한 피하려는 노력이었을 겁니다. 물론 이런 가벼워진 모습은 새로운 고정 패널로 가세한 탁재훈의 영향도 있었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번 주처럼 이렇게 드문드문 몇 가지 주제에 집중해서 게스트의 삶을 다룬 내용은 승승장구에서는 매우 예외적인 것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승승장구에서 바라본 박정현은 수많은 개인 정보와 인생사를 제공해준 무릎팍도사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인간 박정현의 모습을 제공해주었습니다. 두 번째 토크쇼 출연이었던지라 좀 더 익숙하고 편안했을 터이고, 초대손님으로 나온 성시경이 중간에 긴장을 풀어준 덕분이기도 했겠죠. 그렇다 해도 승승장구에서의 박정현은 조금 더 다양한 표정으로 다양한 목소리 톤으로 이야기하며 유쾌한 웃음으로 말을 이어갔습니다. 내용보다 태도가 훨씬 더 많은 것을 보여준 방송이었어요.

그녀의 모습을 보다 확실하게 전달해준 부분은 유창한 한국어나 특별한 에피소드의 공개가 아니었다는 거죠. 직설적이지만 가감 없는 표현들, 말 한마디마다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손짓들, 유창한 영어와 어눌한 한국어를 구사할 때 달라지는 그녀의 모습, 그 사이에서 살짝살짝 비춰지는 오랜 한국 생활로도 메우지 못한 한국과 미국 사이의 경계인으로서의 삶. 처음 자기소개부터 코리언 스타일이라며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이야기하지만, 교포들과의 소박한 모임만이 유일한 놀이터라고 고백하는 해결하기 쉽지 않은 외로움. 36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귀여운 요정같다는 호칭을 부여받고, 15년의 가수활동에도 이제야 연예인으로 살아가는 급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하면서도 즐기는 현재의 모습. 한 시간 동안의 방송을 통해 보여준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지금의 박정현을 조근조근 설명해 주었거든요.

방송 초기부터 한 자릿수 시청률로 고전했고, 지금도 여전히 10%대에서 오락가락을 넘나들고 있지만 승승장구가 외면 받지 않고 여전히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 있었던 장점을 보여주는 방송이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다른 어느 방송에서도 보여주지 못하는, 몇몇 색다른 에피소드나 장황한 인생사를 토로하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를 발견해서, 그 세심함과 따스함으로 초대 손님들과 시청자의 거리를 좁혀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게스트를 강하게 밀어붙이는 것보다 자유롭게 풀어둠으로써 더 많은 것들을 보여주는 여백의 미라고나 할까요? 무릎팍도사와는 다른 방식으로 게스트를 보여주는 것. 이것이 바로 승승장구가 성장하기 위해 선택했던 현명한 방식이었습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승승장구를 키운 것은 상당부분 무릎팍도사의 덕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에요.

이번 주 방송이 전해준 소소한 발견이 준 즐거움은 승승장구의 똑똑한 접근만큼이나, 무릎팍도사가 박정현의 삶의 궤적을 친절하게 풀어가며 인도해 준 덕을 많이 봤다는 거죠. 그렇기에 저는 무릎팍도사와 승승장구 두 프로그램을 합쳐놓은 것이 지금의 박정현을 방송에서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라고 생각해요. 역설적이게도 잘 만들어진 승승장구 방송을 보면서 무릎팍도사의 폐지가 더더욱 아쉬워진 이유이기도 하구요. 승승장구는 서로 자극하며 성장할 수 있게 해줄 좋은 카운터 파트너를 너무나 허무하게 잃어 버렸습니다. MBC에서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다는 주병진의 토크쇼가 어떻게 만들어질지 두고 봐야겠지만, 그건 또 다른 이야기이구요. 없어진 뒤에야 그 소중함을 깨닫는다더니, 강호동과 무릎팍도사의 친절함과 집요함은 우리에게 무척이나 고맙고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 빈자리는 쉽게 따라하거나 채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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