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애니메이션의 한계와 개선점에 대해서는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많은 얘기가 오갔습니다. 오래도록 들었던 것 중 제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는 말은 이것입니다. "하드웨어는 갖췄으니 소프트웨어만 갖추면 된다". 예나 지금이나 미국과 일본 애니메이션의 하청작업이 주로 이뤄졌던 곳이 우리나라니 작화 등의 실력은 출중합니다. 다만 문제는 그것을 채워줄 양질의 이야기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의미가 담긴 말이었습니다. 그로부터 강산이 두 번은 변했을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나아진 게 별로 없습니다. 한국 애니메이션이 개봉한 것도 드물지만 그나마 성공한 것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영화든 애니메이션이든 제대로 된 이야기가 뒷받침되지 못하면 존재가치가 절반 이하로 뚝 떨어집니다. 영상매체라고 해서 이미지가 관건이라고 생각하면 크나큰 오산입니다. 이미지는 영상매체에 담긴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이미지 자체가 목적이라면 그건 그냥 회화를 추구하는 동영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아무리 뛰어난 완성도의 영상이라 하더라도 두 시간 동안 관객을 매료시키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 주장의 근거로 쓰일 수 있는 예는 숱하고, 한국 애니메이션이 실패를 거듭했던 원인 중 하나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2003년에 큰 화제를 모으며 개봉했던 <원더풀 데이즈>가 대표적입니다. 5년이라는 제작기간을 거쳤던 이 애니메이션은 지금까지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제작비(최소 100억 이상)가 투입됐습니다. 그에 걸맞은 영상미를 뽐내면서 많은 사람들의 기대 속에 개봉했지만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스페셜 에디션으로 사운드 트랙을 구입하면서 관람했던 제게도 <원더풀 데이즈>의 초라한 이야기는 기대치에 비례한 실망을 안겨줬습니다. 솔직히 이때부터 한국 애니메이션에 대한 기대를 접다시피 했는데, 최근에 암탉 한 마리와 돼지 한 마리가 뛰어들어오면서 불씨를 재점화했습니다.

<마당을 나온 암탉>과 <돼지의 왕>은 같은 애니메이션이면서도 지향하고 있는 방향은 전혀 다릅니다. 전자는 할리우드가 그러하듯 가족용을 택했고, 후자는 또 한 번 성인용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됐습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블루 시걸>을 떠올리시면 곤란합니다. 둘 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이긴 하지만 <돼지의 왕>은 <블루 시걸>과는 다른 의미에서의 성인용 애니메이션입니다. 보고 나면 왜 굳이 실사영화가 아닌 애니메이션을 택했는지, 왜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았는지 절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과장을 좀 보태 우울증 환자가 <돼지의 꿈>을 본다면 곧장 옥상으로 올라가고 싶어질 겁니다.

<돼지의 왕>은 한 중학교를 배경으로 근간까지 썩어 있는 우리의 부조리한 사회를 노골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인이 되어 대필 작가로 초라한 삶을 살고 있는 종석은 15년 만에 경민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만납니다. 학창시절에 단짝이었던 두 사람은 술잔을 기울이며 과거를 떠올리는데, 그것이 가히 달갑거나 아름답지는 않은 추억으로 가득합니다. 종석과 경민은 있는 집안의 자식에다가 공부도 잘하는 녀석들로부터 허구한 날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둘은 체격도 작고 연약했던 터라 싫은 내색 한 번 제대로 못 하면서 그들의 놀림감이 된 채로 지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악몽이던 종석과 경민은 흡사 구세주처럼 나타난 철이를 만납니다. 다른 둘보다 더 가난하고 불화가 큰 가정에서 자란 철이는 무서울 것이 없는 아이였습니다. 싸움도 곧잘 해서 악랄한 놈들을 물리치는 그를 보며 종석과 경민은 동경하는 마음까지 갖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세 사람은 필연적으로 어울려 다니게 됩니다. 하지만 달라질 줄 알았던 종석과 경민의 학교생활은 점점 더 거대해지는 악에 부딪히며 예전보다 못한 상태에 다다르고 맙니다. 오직 철이만이 굴복하지 않고 맞서 싸웠는데, 관객은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장성한 종석과 경민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됩니다.

<돼지의 왕>이 자리한 교실 혹은 중학교는 이견의 여지가 없는,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폭압하고 짓밟는 현대 사회의 축소판입니다. 이처럼 학원물의 외형을 가졌으나 실은 현실의 지독한 은유를 내포했던 영화는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멀게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그랬고 가깝게는 <말죽거리 잔혹사>가 그랬습니다. <돼지의 왕>이 이들과 다른 점은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과 유사하게도 우화적인 인물 설정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종석과 종민은 누군가의 먹이가 되기 위해 살을 찌우는 돼지고, 둘을 괴롭히는 자들은 인간의 사랑을 받는 개라고 표현합니다.

인물을 동물에 비유하긴 했지만 <돼지의 왕>은 가족은커녕 청소년 애니메이션의 근처에도 가지 않습니다. 이것에서 <돼지의 왕>이 여타 유사한 작품과의 비교에서 가지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발생합니다. 그림체에서도 여실히 느껴지듯이 이 애니메이션은 여느 실사영화보다 몇 배는 더 잔혹하고 참담한 현실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노골적이고 적나라합니다. <헬프>의 리뷰에서 "불편한 진실을 불편하지 않게끔 보도록 하는 것도 능력"이라고 했는데, <돼지의 왕>은 그 따위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만큼 희망이나 구원 같은 은혜로운 단어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습니다.

아마 많은 관객들은 철이가 종석과 경민을 구렁텅이에서 구하리라는 기대를 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도 잠시나마 그런 역할을 하는 듯합니다만, 이 순간을 지나면서부터 <돼지의 왕>은 아주 독창적인 노선을 향해 나래를 펼칩니다. 철이는 메시아도 아닐 뿐더러 또래의 폭력을 초월하는 무시무시한 힘과 분노를 가진 존재입니다. 극 중에서 '괴물'로 불리기도 하는 그는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힘의 논리를 소름이 끼칠 만큼 꿰뚫어보고 있습니다. 일찍부터 그것을 체득한 철이는 종석과 경민에게 당하지 않으려면 악마가 되어야 한다는 냉혹한 현실의 진리를 설파합니다.

물론 이런 철이는 우리 사회가 만들어내고 있는 괴물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선 거들떠도 보지 않는 우리의 손으로 빚은 피조물입니다. 작금의 세상에는 공식적인 제도만이 없을 뿐이지 철저한 계급과 빈부의 격차가 구석구석까지 대물림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2011년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돼지의 왕>에서 보여지듯이 우리는 10대들조차 어떤 옷을 입고 다니는지, 또는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지로 학내 계급이 나뉘는 현실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괴이한 현실을 창조한 것에 대한 책임을 과연 누구에게 물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방금 던진 질문의 답에서 비켜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돼지의 왕>에서 철이를 더욱 비참한 꼴로 전락시키고 있는 건, 강자가 아니라 약자가 그를 대하는 방식입니다. <돼지의 왕>은 애니메이션 속의 세상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왜 대중은 항상 영웅이라는 아이콘을 필요로 하는지, 또 그 영웅은 대중에 의해서 어떻게 이용되고 소모되는지를 처절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돼지의 왕>은 돼지의 탈을 쓴 비루한 약자를 비판하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비겁하게 뒤로 물러서서 누군가가 나서 희생해주기를 바라는 바로 우리를 말입니다.

<마당을 나온 암탉>과는 다르게 <돼지의 왕>이 또 하나의 지평을 열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바로 이런 부분 때문입니다. 단순하게 보면 그저 약육강식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그린 것 같지만, 실은 이 애니메이션이 쏜 화살이 향하고 있는 대상은 약자입니다. 즉 <돼지의 왕>은 우리가 처한 현실이 과연 사회가 전적으로 강제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일부 선택한 것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종석과 경민을 괴롭히는 아이들에 대한 묘사가 제한적인 것도 이런 이유에 기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적어도 제가 알기로는 이만큼이나 극렬하게 약자를 가장한 비겁자들에게 일침을 가한 작품은 없었습니다.

물론 <돼지의 왕>에도 여전히 단점은 산재해 있습니다. 거칠고 투박한 그림체야 의도적인 결과로 보이지만 그것들이 모여 이룬 결과물인 작화가 상당히 어설픕니다. 사실 이건 1억 5천만 원이라는 초저예산으로 이룬 성과임을 감안하면 되레 칭찬해야 마땅하긴 합니다. 그러나 개연성이 부족하고 간결하지 못하며 때론 자의가 넘쳐나는 시나리오는 지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무릇 좋은 이야기란 감정선을 차곡차곡 점진적으로 쌓아가는 전개를 통해 관객으로부터 설득력을 얻기 마련입니다. 이에 반해 <돼지의 왕>은 스토리텔링도 서투른 데다가 시종일관 극으로 치닫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방식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감독의 의도가 훤히 눈에 보이거든요. 예컨대 포스터에서부터 눈물을 짜내려고 안달하는 신파성 멜로드라마와 유사합니다. <돼지의 왕>이 관객에게 역설하고자 했던 주제에는 저도 전적으로 동의하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시나리오와 연출에는 마냥 고개를 끄덕이기 힘들었습니다. 좋게 보면 감독의 뚝심이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나쁘게 보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모든 시선을 그것에만 맞추려 하는 아집과 독선을 경계해야 할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일전에 모 영화가 개봉했을 때 한 이웃님께서 자녀들에겐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좋은 것만 보고 자랐으면 하는 부모의 마음에서였을 텐데, 저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외면하지 말아야 할 진실을 조금씩 알아가는 것도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랬던 제게도 <돼지의 왕>은 쉬이 감내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이토록 우리 사회의 극단을 새어 들어오는 빛줄기 하나 없이 암담하게 그리고 있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그 점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럼으로 인해 <돼지의 왕>은 감히 실사영화가 해낼 수 없는 어떤 지점에 올라섰습니다.

★★★★

덧) 영화를 보면서는 여자가 중학생의 목소리 연기를 한 것이 어색하다고 느꼈는데, 돌이켜보니 탁월한 선택입니다.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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