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현 작가의 신작이라는 이유만으로도 화제가 되었던 멜로드라마 <천일의 약속>이 파격과 진부를 함께 보여주며 첫 회가 방송되었습니다. 부자 남자와 가난한 여자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그 지독한 사랑의 시작은 파격적인 정사 장면들과 예고된 불륜과 불행을 잉태하고 있었습니다.

수애의 연기 흥미롭고 매력적이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와 홀로 살아남아야 했던 여자가 사랑에 빠지고 맙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깊은 애정을 느낀 두 남녀는 그렇게 사랑하게 되고 그 끝없는 욕망에 모든 것을 내던집니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이미 시작부터 예고된 한계가 명확했습니다.

병원 원장인 아버지를 둔 건축사 박지형에겐 10년 전부터 집안끼리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다니는 병원의 이사장인 노홍길의 딸 노향기였지요. 오직 박지형만을 바라보고 사는 부잣집 딸 노향기는 그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오직 한 남자만을 바라보고 사랑하는 것이 천직인 양 말입니다.

다섯 살 때 전기기술자인 아버지가 감전사고로 돌아가시고 일 년 후 엄마가 재가해버린 상황에서 이서연은 어린 동생을 데리고 가장 노릇을 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세상에 오직 둘 뿐인 상황에서 그가 의지할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습니다.

어린 동생에게 엄마처럼 굴던 어느 날 그들이 살던 고모 집에 한 남자가 찾아옵니다. 생일 케이크를 들고 찾아온 이는 고종사촌 오빠 장재민의 친구 박지형이었습니다. 그들의 첫 만남은 그렇게 서로의 상황을 극단적으로 드러내며 시작되었습니다.

가난을 품고 살아야 했던 이들과 풍족함을 만끽하며 살아왔던 이들이 하나가 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모든 것을 가진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부와 명예를 영구적으로 이어가기 위해 자식들을 거래의 목적으로 활용합니다.

자식들 역시 부의 대물림과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아무런 망설임 없이 거래에 임합니다. 결혼이란 그들에게는 편안한 삶을 위한 거래일 뿐 특별한 감동도 감흥도 없는 일이니 말입니다. 그런 그들의 예정된 결혼에 서연이 끼어들게 되었고 예고된 파국을 알면서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아파해야만 했습니다.

그 누구보다 아픈 삶을 살아야 했던 서연이 좋은 남자 만나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던 사촌 오빠 재민은 지형의 고백을 듣고 화가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랜 벗인 지형이 자신이 그토록 아끼던 동생 서연을 농락했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결혼 날짜를 잡아놓고 1년 만에 연락해서 자신과 서연이 만나고 있었지만 정리했다는 고백은 충격을 넘어 배신감만 들 뿐이었습니다. 자신과 서연의 상황을 가장 잘 아는 친구가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했다는 사실에 배신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하는 여리고 아픈 동생이 불륜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은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입니다. 그것도 자신이 가장 믿고 있었던 친구라는 사실이 더욱 힘겹게 합니다. 마지막까지도 자신은 그 모든 힘겨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지만 서연이 그런 고통을 감내할 자신이 없다며 포기했다는 말로 핑계 삼는 지형이 더욱 밉기만 합니다.

우리 사회 1%의 가진 자들의 삶을 살아가고 강요받아왔던 지형에게는 거스를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이 부모에게 모든 것을 받았듯 자신도 부모를 위해 그들이 원하는 것들을 해줘야만 한다는 암묵적인 동의, 즉 침묵의 카르텔이 바로 그것이지요.

사회적 지위와 그런 지위를 지속적으로 영위하기 위해서는 서로 비슷한 혹은 자신들을 그 이너서클 안에서 영원히 안주할 수 있게 해줄 사다리를 타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상황에서 고아인 서연은 말도 안 되는 상대입니다. 지형의 어머니가 낮게 강렬하게 던진 "그건 범죄다"라는 표현처럼(예고편) 가진 자들에게 아무것도 없는 고아와의 사랑은 범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예고된 파국을 알면서도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진 서연은 어쩌면 자신이 넘볼 수 없는 행복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에 관심을 가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암울한 삶을 살아야 했던 그녀 앞에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한 남자. 그 남자에 대한 기억은 그대로 환상처럼 그녀의 마음속에 각인되었고 그런 각인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표출되었으니 말입니다.

지독한 사랑에 마음껏 행복했고 예고된 이별에 한없이 슬퍼했던 서연은 자신도 충분히 감지할 수 있을 만큼 기억이 사라져가고 있었습니다. 지형을 만나러 가는 길에 머리를 가꾸다 만 모습으로 거리에 나서고 휴대폰도 두고 나와 연락도 하기 힘들어진 그녀.

약을 먹지 않으면 하루도 살 수 없는 지독한 두통에 시달리는 그녀는 자신이 자신을 기억하기 힘들어진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합니다. 음식을 만들다가 전화를 받고 달려 나갔음에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눈으로 보기 전에는 기억해내지 못하는 그녀.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기억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천일의 약속'은 1/3이 지난 시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강렬한 사랑과 예고된 이별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뚜렷하게 증세가 심해지는 서연의 모습이 중점적으로 드러나며 남은 2/3의 시간동안 그들이 어떤 사랑과 아픔을 나눌지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지형과 서연이 예고된 파국을 바라보며 불같은 사랑을 나누었듯 시청자들 역시 예고된 결말을 알면서도 이야기 속에 끌려들어가게 된다는 점에서 정통 멜로에 가까운 이 드라마는 흥미롭습니다. 첫 회 파격적인 장면으로 시작한 <천일의 약속>은 진부한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흥미롭게 이끌어가느냐가 중요할 듯합니다.

첫 회 보여준 수애의 연기력은 그런 진부함도 새로움으로 다가올 수 있겠구나라는 기대를 하게 했습니다. 김수현 특유의 대사 톤이 주는 정겨움 혹은 낯설음을 수애는 완벽하게 극중 인물인 서연에 녹아들어 보는 이들을 흥겹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잘못된 길인지 알면서도 들어서야 했던 운명적인 사랑과 그 알량하지만 그것마저 없었다면 30년 세월을 버텨낼 수 없었던 서연의 힘겨운 삶을 노련한 연기로 보여준 수애의 연기력은 압권이었습니다. 뭔가 부족한 김래원과 뭔가 평가하기 어려운 정유미와는 달리, 기억이 사라져가는 슬픈 운명을 가진 서연을 완벽하게 소화해낸 수애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천일의 약속>은 의미를 가질 수 있을 듯합니다.

<아테나>와는 달리, 멜로드라마의 슬픈 여주인공을 감칠맛 나게 보여주는 수애는 어쩌면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연기 인생에 새로운 도약을 할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차갑고 부드러우면서도 슬픈 복합적인 모습들을 자연스럽게 드러낸 수애의 연기에 매혹될 수밖에 없었던 첫 회였습니다.


영화를 꿈꾸었던 어린시절의 철없는 흥겨움이 현실에서는 얼마나 힘겨움으로 다가오는지 몸소 체험하며 살아가는 dramastory2.tistory.com를 운영하는 블로거입니다.
늘어진 테이프처럼 재미없게 글을 쓰는 '자이미'라는 이름과는 달리 유쾌한 글쓰기를 통해 다양한 소통이 가능하도록 노력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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