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좋아하는 휴 잭맨이 출연했음에도 <리얼 스틸>에 대한 소식을 블로그에서 전한 적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권투하는 로봇의 움직임을 제대로 구현했을 확률이 그리 높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리얼 스틸>이 표방한 로봇의 권투는 이미 액션을 동반하여 훌륭한 비주얼을 선보였던 <트랜스포머>와는 또 다른 것입니다. 후자가 스케일로 승부를 볼 수 있는 데 반해, 익히 눈으로 본 인간의 스포츠를 흉내낸 전자는 디테일에서 영화의 성패가 갈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아직까지는 만족할 만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판단했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권투를 다룬 영화를 보면서 이토록 흥분하기는 <록키> 이후 <리얼 스틸>이 처음입니다.

전직 권투선수였던 찰리는 트레일러를 끌고 다니면서 시골을 전전하는 신세입니다. 여기저기 빚을 지고 있는 그에게 유일한 희망이자 돈줄은 로봇 권투입니다. 고철이나 다름없는 로봇으로 변두리 마을에서 각종 시합을 하지만 성급하기 짝이 없는 성격 탓에 패배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에 느닷없이 옛 애인의 부고와 함께 아들의 양육권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됩니다. 찰리는 탐탁지 않아 하면서 법정에 출두해 아들을 입양하고 싶어 하는 처제 부부를 만납니다. 이들은 좋지 못한 형편을 지적하면서 양육권 포기를 종용하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찰리는 그 대가로 돈을 요구합니다. 대신에 아들과 몇 개월을 보내야 하는 조건이 붙었지만 돈이 급한 찰리는 마지못해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더 말할 것도 없을 정도로 <리얼 스틸>은 흔하디흔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찰리라는 캐릭터도 이런 류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전형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는 헤어진 지 오래라곤 하지만 애인이 죽었다는 소식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동안에 아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며, 물론 아들을 돈에 팔아넘기고도 양심의 가책은 전혀 엿보이질 않습니다. 아들과 시간을 보내기로 한 후에도 찰리에게 중요한 것은 로봇 권투로 돈을 버는 것뿐입니다. 이토록 파렴치한 남자가 말미에 가서는 개과천선할 것이란 예상을 못하시는 분들이라면, 어떤 영화를 보더라도 늘 재미있게 보실 수 있을 테니 그저 부럽습니다. 그런데 이 진부한 이야기가 의외로 <리얼 스틸>에 큰 힘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우선 <리얼 스틸>의 주인공은 휴 잭맨이 연기한 찰리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의 아들인 맥스도 아니고, 두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체로 작용하는 로봇도 아닙니다. 셋 중에서 어느 하나도 단독으로는 빛을 발하지 못합니다. <리얼 스틸>은 세 캐릭터가 한 데 뭉쳐서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는 영화입니다. 아울러 두 부자의 관계 회복과 로봇의 권투 또한 각개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게 당연하지 않냐고요? 맞습니다. 만약에 어느 한쪽만을 앞세우는 영화라면 극단적인 선택으로 도박을 하는 셈일 겁니다. 보통은 그렇지 않고 두 가지 요소를 섞기 마련인데, 숀 레비가 <리얼 스틸>에서 보여주는 균형감각은 탁월합니다. 그냥 두 가지를 앞세우기만 하느냐 그걸 제대로 섞느냐는 전혀 별개의 문제거든요.

<리얼 스틸>을 연출한 숀 레비는 로봇에게 감정을 이입하거나 의미를 부여하는 등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습니다. 그는 로봇이 권투를 한다는 점을 제외하고, 일찍이 <메트로폴리스>부터 로봇이 등장하는 영화가 으레 논점으로 삼았던 것을 의도적으로 외면합니다. 예를 들어 <리얼 스틸>에서는 로봇을 통해 인간의 정의를 묻고 비판하면서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거울에 비친 로봇의 모습과 어떻게 해서 로봇 권투가 인기를 얻게 됐는지에 대한 설명이 등장하긴 하나, 적확한 계산하에서 선을 넘지 않으며 본분(?)을 지키는 묘수를 놓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리얼 스틸>의 지향점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숀 레비의 연출의도가 참 맘에 들었습니다.

<리얼 스틸>은 주제파악을 아주 잘한 영화입니다. 과욕을 줄이면서 관객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지 명확한 의사를 드러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감당하지 못할 바에는 애초에 손을 대지 않고 비켜가는 편을 택하는 것이 지혜로운 판단입니다. 이 간단한 것을 스스로 지키지 못하고 자멸하는 영화를 수도 없이 봤습니다. 반대로 선을 지키는 영화라면 무게감은 줄어들지언정 자신의 목표와 색깔은 더욱 견고하게 가져갈 수 있습니다. <리얼 스틸>이 여기에 속하는 영화입니다. 짐짓 폼이나 재면서 소위 말하는 '있어 보이는 영화'가 됨을 전면적으로 거부한 것이죠. 그 결과로 할리우드의 주특기인 가족주의 오락영화로 나서 목표한 바를 이루고 있으니 이 얼마나 진솔한 영화입니까.

사실 <리얼 스틸>에 대한 저의 이런 평가는 결과론에 근거한 것입니다. 일단 영화가 재미있으니 좋은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데, 그 결과론의 바탕에는 앞서 말한 <리얼 스틸>의 진부한 이야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리얼 스틸>과 동일한 소재를 다룬 영화는 익히 보았듯이 권투를 통한 휴머니즘의 발산에 집중하기 마련입니다. <록키>만 보더라도 권투가 얼마나 드라마틱하고 인간적인 경기인지 잘 알 수 있죠. 그런데 <리얼 스틸>에서 권투를 하는 건 인간이 아닌 로봇입니다. 그나마 로봇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행위도 차단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관객으로서는 어떤 극적인 감정을 투영할 대상이 <리얼 스틸>의 경기 주체에는 없습니다. 이것을 채우고 있는 것이 바로 찰리와 맥스입니다.

두 사람은 링 안에서 치열하게 싸우면서 관객의 동정과 연민을 자극하진 않습니다. 이는 일반적인 권투영화의 정석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미래를 배경으로 한 영화답게 <리얼 스틸>은 이들을 링 밖으로 몰아냈지만 더 큰 효과를 얻어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도구로 이용된 것이 다름 아닌 찰리와 맥스의 관계입니다. 아마 찰리만 나섰다면 <리얼 스틸>이 지금과 같은 결과를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극 중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아이를 좋아한다"는 대사가 등장하는 것처럼, 전 인류의 보편적인 감정을 삽입한 덕분에 <리얼 스틸>이 성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리얼 스틸>은 <챔프> + <오버 더 톱> + <록키>의 21세기 버전인 영화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드라마로 기능하는 부자의 관계는 외적인 면에도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두 사람 덕분에 관객은 <리얼 스틸>의 경기에 크게 몰입할 수 있습니다. 급기야 전 박수를 치고 싶었고 실제로 박수를 치는 관객도 있었습니다. 비주얼의 완성도 자체가 놀랍도록 뛰어난 것은 틀림없지만, <트랜스포머>가 여실히 증명했다시피 그것만으로는 관객에게 흥분과 감동을 선사하기엔 역부족인 것이 사실입니다. 분명히 진부한 이야기지만 <리얼 스틸>은 그것을 잘 활용했습니다. 이로 인해 종종 인간미와 대립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테크놀로지의 이기가 빚은 화면이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결과를 만들어냈으니, 조금 과장해서 영화의 미래가 가야 할 올바른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덧 1) 이 영화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로봇이 소모품으로 전락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은 것은 못내 아쉽습니다.

덧 2) '맥스'를 연기한 '다코타 고요'가 연기를 참 잘합니다. 휴 잭맨보다는 다코타 고요가 더 돋보일 정도입니다.

덧 3) 슈가 레이 레너드가 참여한 권투 장면의 연출은 <록키>를 참고했을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덧4) 하필 시간적 배경이 고작 9년도 남지 않은 2020년인 건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걸까요? 음성인식에 이어 <리얼 스틸>에 나오는 로봇의 'Shadow Mode'는 격투분야에 있어서 궁극에 도달할 기술입니다. 까마득한 옛날에 <다이모스>라는 일본의 애니메이션에서부터 이걸 동경했지만 여전히 요원하기만 합니다. 아이폰 4S의 'Siri'를 보면 <리얼 스틸>처럼 음성인식으로 싸우는 수준까진 가능할 것도 같네요. 'Shadow Mode'는 아무리 봐도 2020년엔 구현하기 힘들 기술.

덧 5) 반드시 아이맥스로 보세요.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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