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많은 드라마들의 마지막 회가 그랬던 것처럼, 공주의 남자의 마지막 분 역시도 매우 바쁘게 이야기들을 털어 놓았습니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것들, 하고 싶었던 것들, 해야 하는 것들을 모두 쏟아놓기엔 70분이 조금 안 되는 단 한 회의 시간은 너무나 부족하고 아쉬웠겠죠. 의기양양하게 시작된 함경도의 반란은 순식간에 진압되어 버렸고, 이미 그동안 많은 장면을 통해 순간이동에 능한 것을 보여준 주인공들은 쉽사리 도성으로 이동하고 사찰을 오가며 내용을 풀어냅니다. 시간은 또 어떤가요. 24회 동안 지나간 시간의 흐름은 무척이나 불규칙적이고 숨가빴습니다.

그 안에서 이 드라마가 그동안 가지고 있던 여러 불균형의 문제가 삐죽삐죽 튀어 나옵니다. 아무리 김승유와 세령의 사랑이 애절하다 해도 경혜공주와 정종 사이의 비극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수양과 김승유의 두 대립점이 보여주는 향한 공감과 명분의 추는 절대적으로 김승유를 비롯한 반 수양의 편에게 쏠려 있습니다. 신면의 비장한 최후에도 불구하고 김승유, 세령과 있었어야 할 이 세 사람간의 삼각관계가 주는 묘미는 살아나지 않습니다. 그동안 모른척했던, 혹은 안타깝게도 살리지 못했던 모습들이 더더욱 아쉬움으로 남은 마지막 회였어요.

만약 지금처럼 수양대군이 절대 악처럼만 그려진 것이 아니라 조금만 더 그런 피로 물든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수양대군 측의 대의명분이 부각되었다면 세령의 선택과 머뭇거림에 무게감을 줄 수 있었을 겁니다. 김승유를 향한 신면의 열등감과 그럼에도 그녀에게 매료될 수밖에 없었던, 그렇기에 오히려 삐뚤어진 신면의 순정이 좀 더 부각될 수 있었다면 더더욱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겠죠. 경혜공주와 정종의 비극은 짧게 다루기엔 그 영향력이 너무나 강렬했기에 그들만을 다룬 다른 이야기가 기대될 정도구요.

물론 과중한 불평과 아쉬움입니다. 이런 아까운 매력적인 잔가지들을 생략했기에 나올 수 있었던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나올 수 있었겠죠. 그리고 이런 공백, 약간의 허술함을 충분히 채워준 연기자들의 호연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구요. 이토록 연기자들의 힘에 의지했던 드라마는 매우 오랜만에 봤을 정도입니다. 맛깔 나는 조연들의 조화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해 주었습니다. 순간순간 주인공 커플의 자리를 빼앗아 버렸던 이민우와 홍수현의 열연은 물론이고, 초반 분위기를 주도했던 이순재의 건재함은 여전했구요. 불안함으로 출발했지만 충실히 마지막까지 중심을 지킨 박시후, 문채원 두 남녀 주인공의 연기는 이 드라마의 가장 큰 장점이자 힘이었습니다. 공주의 남자가 가장 성공한 부분이라면 바로 캐스팅이었을 거예요.

그리고 그 중에서도 단연 발군의 힘을 보여준 사람은 다소 삐뚤어진, 결코 소화하기 힘든 악의 화신으로 분해야 했던 수양대군, 김영철입니다. 순수하게 복수의 대상으로만 남아야 했기에 오로지 욕망으로 가득찬, 권력욕의 화신이어야만 했던 그는 승리자이면서도 그 죄과 앞에서 서서히 무너져야 하는 절망을 품어야 했고, 왕이면서 동시에 아비로서의 심정을 가진 묘한 따스함을 보여 주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순간에 이 모든 것의 허무함으로 가혹했던 피의 잔치였던 그의 생애를 마무리해야 했구요.

이 모든 임무를 멋지게 마무리한 그의 연기는 어떤 칭찬도 아깝지 않습니다. 만약 제게 공주의 남자 중 가장 인상 깊었던, 혹은 진정한 해피엔딩을 보여준 장면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단연 노회하고 병든 세조가 세령 부부를 나무 뒤에서 보며 눈시울을 붉히는, 그리도 돌아서서 이 모든 것을 계획했던 중전의 손을 말없이 꼭 잡아준 그 1분을 꼽을 겁니다. 그야말로 폭풍감동. 이 승자 없는 복수극의 허무함을 되씹는, 잔혹했던 폭력의 뉘우침을, 힘들었던 사랑의 결말을 축복해주는, 작품의 모든 것을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장면이었으니까요. 그 장면 하나만으로도 다소 양 원수 집안의 한쪽으로 치우쳤던 감정의 추가 조금이나마 균형을 맞추는, 그야말로 최선의 결말을 이끈 순간이었습니다.

드라마의 진정한 성공이 단지 주인공 몇 사람만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고, 그들의 유명세와 인기에만 의존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죠. 조금은 덜컹거리고 위태위태해 보여도 그 중심을 잡아 줄 버팀목이 있느냐 없느냐. 김영철은 그렇게 선배 연기자의 영향력을 강렬하게 보여주면서 이 드라마의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단독 주연의 어려움을 충분히 극복한 박시후도 있고, 초반의 불안한 캐릭터를 결국 자신의 것으로 만든 문채원도, 자신의 가치를 또 한 번 증명한 이민우와 이제야 겨우 재조명받은 홍수현도 당연히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제작진이 가장 감사해야 할 출연자가 있다면 이들 모두의 상대편에서 그 모든 원망과 미움, 저주를 받으면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수양대군, 김영철이에요.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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