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분들에게 <의뢰인>이라는 제목은 낯설지 않으실 겁니다. 1990년대에 이쪽 장르에서 거의 독보적인 존재였던 존 그리샴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던 영화 중에 <의뢰인>이 있었죠. 자칭 '대한민국 최초 본격 법정스릴러'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단 영화가 굳이 왜 이 제목을 택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는 걸까요? 영화를 보고 난 지금은 딱히 <의뢰인>을 제목으로 고집해야 할 이유도 없는 것 같습니다. '법정스릴러'라고 경계를 정확히 긋고 있지만 흔히 기대하게 되는 치밀한 두뇌싸움의 밀도가 낮아 법정물보다는 수사물에 가깝습니다.

<의뢰인>은 불과 얼마 전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김명철 실종사건'과 유사한 소재에서 출발합니다. 하철민이라는 남자는 결혼기념일 새벽에 집으로 돌아오지만 그를 맞이한 것은 피바다가 된 침실입니다. 아내가 살해됐다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에 느닷없이 경찰은 그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현장에서 체포합니다. 장모의 증언에 따라 정황증거가 뚜렷하고, 아랫집 남자가 목격자로도 나서면서 범인으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완강하게 결백을 주장하는 철민의 변호사로 검사 출신이자, 이 사건의 담당검사인 안민호와 동기였던 강성희가 나섭니다.

강성희는 전형적인 영화 속 변호사 캐릭터입니다. 활달하고 거칠 것 없는 그는 사건의 진실보다는 승소와 수임료에 더 관심이 큽니다. 그런 강성희가 시체 없는 살인사건이라 할지라도 승소할 확률이 높지 않은 철민을 변호하게 된 것도 역시 돈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성희가 사건을 처음부터 복기하면서 석연치 않은 점을 하나둘씩 발견하게 됩니다. 급기야 검사 측에서 사건의 종결을 성급하게 재촉하고 있다는 낌새마저 포착됩니다. 이에 성희는 무죄를 선고받는 것도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라는 자신감을 갖지만, 안민호 검사도 만만치 않은 공세를 가합니다.

각 영화에서 오프닝이 얼마나 중요한지, 왜 중요한지에 대해 몇 번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의뢰인>을 볼 때도 오프닝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영화의 그것은 여러모로 흥미진진합니다. 결혼기념일에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철민은 경찰과 구급차가 아파트 정문에 있는 것을 봅니다. 동네 주민들도 여럿 나와서 웅성대지만 관심을 주지 않고 집으로 향합니다. 철민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걸어가면서 자신의 집 앞에 경찰이 서 있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이윽고 조용히 집으로 들어간 그는 수사 중인 경찰을 지나 침실로 갑니다. 충격적이게도 피로 흥건하게 젖은 침대와 바닥을 보게 되는 철민. 그는 슬픔에 잠길 새도 없이 즉각 경찰에 의해 수갑이 채워지고 밖으로 끌려 나갑니다.

이러한 <의뢰인>의 오프닝이 흥미롭다고 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영화적 효과와 사실주의 사이에서 이것을 어떻게 평가해야 좋을지 확신이 안 섭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살인사건이 난 현장을 민간인이 걸어들어가는데도 누구 하나 제지하질 않습니다. 거실에서 철민을 본 형사조차 혼잣말만 하지 "누구세요?"라고 묻지도 않습니다. 마치 그가 침실을 보기 전까지 기다렸다가 체포하기로 계획했다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게 현실성은 엄청 떨어지지만, 영화적인 효과를 가져오기 위한 장치로는 그럴 듯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관객에게 철민이 받은 극단적인 충격을 잔인할 만큼 고요하게 전달하는 것이죠. 동시에 집 내부의 상황도 보여줘야 하니 그가 유령처럼 걸어 들어가야만 했을 겁니다.

둘째는 이때 철민이 보여주는 행동입니다. 그는 최소한 자신의 집 앞에서 경찰을 보고 파국을 직감했을 것임에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한 자세를 유지합니다. 심지어 현관에서 신발까지 벗고 안으로 들어가는 고도의 침착성까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상황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건 두 가지 의도 중 하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철민이 범인임이 틀림없다는 확증을 가지게끔 심적 증거를 흘린 것이거나, 반대로 그저 굉장히 이성적인 사람이라서 그랬던 것일 뿐이라는 설정을 후반에 들이밀면서 반전의 도구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관객을 빠뜨릴 함정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정작 <의뢰인>은 저걸 어떻게 이용하냐고요? 그건 여러분께서 직접 확인하세요.

방금 말씀드린 오프닝은 <의뢰인>의 전체적인 구조를 상징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솔직히 말해 이 영화는 오프닝에서 보여준 것처럼 꽤 영악하고 잔망스럽습니다. 분명 법정에서의 공방은 느슨한 감이 있어 '법정스릴러'라는 표현이 무색하지만, 곳곳에 단서와 단서를 빙자한 함정을 던지면서 관객의 몰입을 유도하는 수사물로는 합격점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물간의 관계와 조사를 진행하면서 속속 드러나는 사실 등의 결합이 유기적으로 잘 이뤄진 시나리오도 괜찮은 편입니다. 게다가 전개도 빨라서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습니다. 저는 보통 영화를 보면서 머릿속으로 계속 생각을 하는 편인데, <의뢰인>은 그럴 여유 따위는 줄 생각이 없습니다. 그만큼 빨라서 평소의 절반도 시간을 갖질 못했습니다.

반면에 <의뢰인>은 그에 비례하여 단점도 뚜렷한 영화입니다. 언뜻 치밀해 보이지만 <의뢰인>은 지나칠 만큼 소홀하게 다루는 장치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하나만 예로 들자면, 오프닝의 사건 현장에는 결혼기념일을 축하하려는 듯한 푸짐한 식탁이 곱게 차려져 있었습니다. 이걸 결말이 드러나기 전까지 그 누구도 언급하질 않습니다.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았네, 남편이 의처증이었네, 딸로부터 남편이 자길 죽이려고 한다는 말을 들었네 등의 진술을 정황증거로 삼아 철민을 범인으로 몰아갔던 와중에도 말입니다. 상식적으로 전혀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이죠. (제가 밝힌 걸 스포일러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오히려 머리가 더 복잡해질 수도 있습니다. 비록 결말을 예측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긴 하지만 말입니다)

철민이 범인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우선적으로 다뤄야 할 사체에 대한 언급도 결말 전까지 일절 없습니다. 앞에서 <의뢰인>은 '김명철 실종사건'과 유사하다고 했죠? 해당 사건은 <의뢰인>과 동일하게 정황증거가 명백하지만 폭력 외에 살인죄는 적용되질 않아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원성을 샀습니다. 그렇게 판결이 난 데는 살인도구와 사체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 결정적이었죠. <의뢰인>은 이와 유사한 사건을 다루며, 증거제일주의가 원칙이란 대사도 나왔던 것 같은데 사체만큼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아울러 재판에 전환을 가져다주는 어떤 이의 증언도 개연성이 적잖이 떨어집니다. 이건 사실상 오프닝의 그것처럼 영화적 효과, 즉 극적인 전개를 펼치기 위해 의도적으로 뒤에 배치한 억지에 가깝습니다.

★★★☆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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