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가 객체화되지 않는 시대다. 물론 그런 징후는 이전부터 있었다. 텔레토비가 나왔을 때다. 배에다 텔레비전을 장착한 인형이 나왔을 때 미디어와 사람이 한 몸이 되었구나라며 직감했다. 미디어가 객체가 아니라 주체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손 안의 스마트 폰. 앞으로 더 작은 모습으로 손 안에 쏘옥 들어올 수도 있다. 손 안으로 작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것에 그치지 않는다. 폰은 더 이상 전화기 만으로 존재하길 거부한다. 전화이면서, 텔레비전이고 또 라디오며, 워크맨이고, 또 카메라 이고 캠코더다. 사전이기도 하고, 녹음기이며, 게임기이고 또 인터넷이기까지 하다. 이에다 붙여줄 적당한 이름은 없다. 모든 것을 다 붙여놓은 이른바 “슈퍼 플랫폼”이다.

손 안에 넣어두고 이동하면서 즐길 수 있는 “슈퍼 플랫폼.” 이 사건을 두고 먼저 미디어 사건으로 축소해 풀이해보자. 미디어는 메시지라는 말을 했던 맥루언을 떠올리면 앞으로 이 새 미디어는 우리를 다양한 방식으로 맛사지할 것이다. 서로 다른 곳에 놓이던 미디어를 합체한 것을 예로 들어보자. 텔레비전은 거실에 있어 마땅한 것이고, 사전은 공부방에 있어야 할 물건이다. 카메라는 장롱 깊숙이 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는 사치물건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내 손 안에 있고, 내가 갖고 다닌다. 당연히 그 물건들이 원래부터 차지하던 공간에 대한 개념은 바뀐다. 그 공간들에는 이제 다른 것들이 자리해야 할 것이다. 거실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공부방에 대한 느낌이 달라지고, 장롱에 대한 인식도 달라질 것이다. 내 손 안의 “슈퍼 플랫폼” 덕분에.

그럼에도 기존 거대 미디어에 있던 이들은 엉뚱한 이야기를 한다. “슈퍼 플랫폼”이 왔다 하더라도 여전히 과거의 콘텐츠는 필요할 것이므로 자신들의 존재가치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참으로 엉뚱한 답이다. 플랫폼이 바뀌면 그 안의 내용도 바뀌는 것은 당연하다. 매체가 메시지란 말을 받아들인다면 매체가 바뀌면 메시지도 바뀐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거실과 공부방 그리고 장롱이라는 공간을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면 그 공간을 재현할 때는 다른 방식이어야 한다. 컨텐츠의 성패는 “슈퍼 플랫폼”과 한데 어우러지는 여러 사회 분위기를 어떻게 맞춰가는가에 달렸다. 서로 다른 여러 매체를 한데 묶어 “슈퍼 플랫폼”을 만들었듯이 서로 다른 여러 분위기를 별 자리 처럼 잘 모아서 의미가 생성되도록 해야 한다.

방송과 신문이 등장하던 시기에 여러 문명의 이기가 같이 등장한다. 자동차, 전화, 전신, 기차, 비행기가 대중들에게 편리함을 전해주는 친근한 수단이 된다. 이들은 대체로 대중에게 한꺼 번에 서비스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 시대의 매스 미디어였고, 대중 수단이었다. 이들이 모여 만든 별자리는 “대중 서비스”가 아닐까 한다. 이 별자리는 독특한 향기를 뿜어낸다. 대량이라는 말이 늘 따라다니니 그로부터 뿜어지는 향기는 모두가 함께 같은 것을 즐긴다는 “유행(fad, fashion)"에 가깝다. 누군가가 대단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고 모두가 따르는 방식을 의미한다. 대단하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 쪽은 영웅(star) 대접을 받는다. 대부분의 매체가 따로 존재하던 이 시기 즉 매스 미디어인 신문과 방송의 시대인 이 때는 <대중-유행-스타-대량-각종 플랫폼>의 시대였다.

“슈퍼 플랫폼”이 등장하면서 그 향기는 깨진다. 새로운 별자리가 생기고 새로운 향기를 뿜는다. “슈퍼 플랫폼”에는 대량이라는 말 대신 다양한 이란 말이 따른다. 남을 따라하는 유행의 시대가 아니라 자신의 취향대로 움직이는 개성(style)의 시대가 된다. 대량 서비스가 아닌 맞춤형 서비스가 환영을 받는다. 모든 것이 균등 발전한 가운데 대단한 것을 만드는 일은 어려워졌다. 새롭게 조합하는 배치의 문제로 바뀌었다. 서로 이질적인 것을 어떻게 잘 조합해내는가가 성공의 길로 이어주었다. 새롭게 조합하는 이는 과거의 스타라기 보다는 평범한 이웃 개념의 스타로 대접을 받았다. 떠받드는 존재가 아닌 공감의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분중-개성-공감-취향-다양성-슈퍼플랫폼>의 시대가 온 셈이다.

“슈퍼 플랫폼”의 등장 하나가 어찌 온 사회를 다 바꾸어 놓으랴. “슈퍼 플랫폼”의 등장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 사회 온 분야에서 생긴 변화를 모아 모아서 만들어진 결정체로 볼 일이다. 미디어가 사회를 바꾼다라고 생각하는 대신 미디어와 사회는 함께 바뀐다고 생각해보자는 말이다. 그렇다면 바뀐 플랫폼 안에 들어갈 내용도 그 향기, 별자리에 맞추어야 하지 않을까? 미디어가 바뀌고, 사회 내 분위기가 바뀌고, 대중이 감각이 바뀌었는데 예전 방식대로 밀고 가겠다고 말한다면 그건 고집에 지나지 않는다.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를 고민해야 할 뿐 바뀌어야 함에 토를 달 수는 없는 그런 시대다.

안철수 교수의 바람이 며칠 온 사회를 강타했다. 마치 “슈퍼 플랫폼”의 바람을 훅 불고 지나갔다는 생각을 했다. ‘슈퍼 플랫폼“이 만들어내는 향기를 그가 뿜고 있었다고 확신한다. 그가 많은 말을 하진 않았지만 그 자체로 그 향기를 뿜어냈다. 그 주변에 시민, 양보, 무욕, 참신, cool, 미소, 배려 등이 모여 별자리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 각각은 이름없는 별이었지만 ”슈퍼 플랫폼“이란 향기 세례 덕에 별자리를 형성했고, 사람들의 눈에 띠게 된 것이다. 그런 분위기의 시대이고, 그런 미디어의 시대다. 신문도 방송도 보지 않으며 생각없이 사는 듯 보이나 손 안에 든 ”슈퍼 플랫폼“으로 네트웍을 형성하고 살아가는 시민의 시대다. 오히려 신문이나 방송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쪽이 더 정보빈자(information poor)로 사는 그런 시대다.

정가, 언론계 모두 변신을 이야기하지만 몸은 그리 날래지 않다. 느리기가 한정없다. 여의도 정치가 낡았다고 말하지만 대통령의 모습에선 낡은 축음기의 기가 느껴진다. 믿음을 주어야 할 곳이 모두 그 꼴이니 세상은 어쩔 수 없이 ‘각자도생’이다. 무능한 사회 제도에 분노하며 스스로 살 길을 찾는데 분주하다. ‘각자도생’의 인식이 번져가면서는 도대체 사회라는 존재(the social)가 생기지 않는다. “슈퍼 플랫폼”이 자아낼 저 괜찮은 향기를 한데 모으지 못하고 그냥 표류하고 있을 뿐이다. ‘각자도생’을 피해 “슈퍼 플랫폼”을 실천할 트윗터나 페이스북이 있는 것이 그나마 위로라면 위로일까. 그래서 그 공간이 가장 앞서 보이는 것이다.

정치, 언론의 성패는 각자도생의 분위기를 지우면서 함께 하자며 공감을 이끌어내는데 달렸다. 그를 이뤄내지 못하면 안철수 교수는 언제든 시민들의 호출을 받고 뛰쳐 나올 것이다. 큰 바람이 훅 불었는데도 앞뒤 못 가리는 정치, 언론을 보면 안철수 교수든, 그를 토템으로 한 집단이든 그들이 앞으로 세상을 이끌고 가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도 덧 붙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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