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우) 박원순 변호사(왼쪽)와 단일화를 발표하곤 껴안은 채 활짝 웃고 있다. 안 원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서울시장에 불출마하겠다고 밝혔다.ⓒ연합뉴스
"이번엔 용이 꼬리만 흔든 셈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미 꼬리가 아니라 용을 보았다" 안철수-박원순 단일화 기자회견이 끝나고, 보수지 정치부장 출신의 한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용이 꼬리를 흔들었던 그 현장에 있었던 또 다른 기자는 이런 말을 했다. "정말, 판타스틱하구만"

실제, 그랬다. 보고 있되 믿기 힘든 풍경이었다. 현장에 분출된 기자들의 취재 열기는 굳이 서울시장 선거가 필요한 것일까를 회의하게 할 정도였다.

신드롬이다. 안철수는 단 며칠 만에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정치적 지형을 없던 것으로 만들었다. 4년이 넘도록, 철옹성을 구축한 것 같았던 '박근혜 대세론'은 안철수 바람에 이미 서까래까지 날아갔다. 박근혜 의원의 입은 여의도에서 최고로 무겁다. 그런 그녀가 지지율 추이를 묻는 기자를 향해 "병 걸렸어요?"라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단적이다. 무의식중에 안철수 신드롬에 대한 위기감을 드러낸 것이다. 지난 일주일간 안철수는 한국 사회의 모든 것을 덮는 단 하나의 명사로 존재했다. 이제 시작이다. 이 바람은 앞으로 계속 '정권교체'를 상징하는 대명사로 호명될 것이다.

정파와 계파를 가릴 것 없다. 안철수 신드롬은 여의도 전체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한나라당 홍준표 대표는 "철수가 나오면 영희도 나오겠다"며 그의 가치를 폄훼했었다. 지금 그는 원희룡 최고위원으로부터 '소인배, 구태 정치인'이란 비아냥을 듣고 있다. 물론, 홍 대표의 발언 때까지만 하더라도 안 교수의 위상은 범야권의 장외주자 정도였다. 그래서 홍 대표는 '영희는 없느냐'고 물은 것이다. 하지만 잘못 봤다. 앞을 내다보는 것은 정치인의 중요한 덕목이다. 불과 일주일 사이 안철수란 이름은 여의도 전체를 '낡은 질서'로 만들었다. 홍 대표가 뭍 영희들에 비유했던 철수란 이름은 과거의 모든 것과 맞서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단독자'가 되었다.

개인적으로 안철수를 잘 알지 못한다. V3 백신을 쓰고, '무릎 팍 도사-안철수 편' 정도를 본 게 다다. 기자회견장에 가며 취재는 둘째치고, 개인적으로 안철수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다. 신드롬에 당황해 진보, 보수 가릴 것 없이 이미지를 넘어서는 그의 콘텐츠가 무엇이냐고 묻고 있는 마당에 그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했다.

▲ 기자회견장을 꽉 채운 기자들은 문 밖에서 미동이 있을 때마다, 밖을 주시했다.
기자회견장은 복도까지 기자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안 교수가 어느 방향에서 올 것인가를 두고 내기가 벌어질 만큼 취재 경쟁은 과열돼 있었다. 기자들이 집단적 열기를 보이는 까닭은 간단하다. 직업상 다가올 시대의 냄새를 먼저 맡기 때문이다. 안철수의 어디까지가 거품이고 어디까지가 실체인지를 지금 구분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가 미래의 권력을 거머쥘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큼은 이제 부인하기 어렵다. 기자 개인이 아닌 언론사 집단이 안철수를 쫓기 시작했단 건 그런 의미다.

복도에 안 교수가 나타나자 기자들은 무리지어 그를 덮쳤다. 그것은 일종의 위력시위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제 막 여론의 중심에 선 초짜에게 기자들이 벌이는 신고식처럼 여겨졌다. 순식간에 무리에 포위된 안 교수는 그러나 엷은 미소를 보였다. "선거에 출마하시는 겁니까", "서울시장은 포기하고 대선에 출마하시는 겁니까" 대답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두서없이 밀어붙여지는 기자들의 무력시위를 안 교수는 "들어가서 얘기하겠습니다"는 짤막한 답변으로 막았다. 안 교수는 그렇게 별다른 수행원 없이 무리를 지나 홀로 기자회견장에 들어섰다.

▲ 안철수 교수가 복도에서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모습
달랑 A4지 한 장을 손에 들고 겨우겨우 무리를 헤쳐 자리한 안철수의 모습은 '옹골차다'는 표현을 딱 이런 데 쓰는 것이구나 싶은 모습이었다. 예열을 거쳐서 당도했기 때문일까, 그는 별다름 막힘없이 정말 건조하게 미리 준비해온 입장을 읽어 내려갔다. 그 원고는 어떻게 합의했으며, 왜 포기했는지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기자들은 기자회견 시작과 동시에 '안철수 불출마, 박원순으로 단일화'라는 정치적 결론을 제목을 밀어 올렸지만, 안철수의 언어는 전혀 정치적이지 않았다.

정치적 언어를 원하는 이들을 상대로 비정치적 언어를 던지는 것은 둘 중 하나다. 정치적 사고 방식의 고수거나 아니면 전혀 정치적이지 않거나.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신의 언어가 세상을 해석하는 것이 아닌 세상에 해석되어지게 던져지는 것은 모든 정치인들의 꿈이라는 점이다. 대개의 정치인들은 주야장천 정치적 언어만 해대다가 그 꿈의 언저리에도 못 가보고 정치를 마감한다. 하지만 이제 막 정치를 시작한 안철수는 누구나 구사하는 정치의 문법을 따르지 않고 세상을 자신으로 흡수하고 있다.

▲ 입장을 발표하고 퇴장하는 안 교수를 따라 움직이는 기자들의 모습
물론 안철수의 덜 정치한 모습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누군가는 '어리숙한 아마추어'라고 하고, '여기까지다'라고 하는 이도 있다. 어떤 평가에 동의하건 덜 포장된 모습은 분명했고, 그가 누군인지에 대한 궁금증은 여전히도 답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안철수의 기자회견을 보며, 한 가지 확실한 인상은 남았다. 그날의 기자회견이 그가 치른 첫 판일 뿐, 아직 많은 판들이 그에 앞에 남아있으리란 점이다. 일각에서는 더 이상 그가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기자회견장에서 만난 안철수의 기세는 예사롭지 않았다. 앞으로 다가올 선거들에서 그는 분명한 역할을 할 것이다. 한 가지 더 말하자면, 그렇게 판을 거듭하더라도 그가 쉽게 실책할 것 같지는 않다. 내기를 걸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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