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대구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를 앞두고 국내에서 육상에 대한 관심, 열기가 고조되고 있습니다. 한국 땅에서 세계 기록을 갈아치우는 세계적인 육상 스타들의 모습에 벌써부터 설렘과 기대가 커지고 있는 분위기인데요. 16일 오후에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 우사인 볼트(자메이카)가 입국해 대회 열기가 더 후끈 달아오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같은 날 우리 선수단의 입촌 소식은 그다지 크게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개최국답게 역대 최대 규모의 선수단을 파견하게 됐지만 실력 면에서 세계적인 수준과 다소 거리가 먼 탓에 언론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지 않은 듯 했습니다.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이번 대회를 계기로 1980년대 중후반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그나마 희망을 봤던 순간을 다시 맛보기 위해 한국 육상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고, 목표 달성을 위해 각오를 다지고 있습니다.

두각을 나타내고 있지는 못했어도 한국 육상은 묵묵히 달리고 또 달려왔습니다. 특히 마라톤이 한국 육상의 위상을 알리는 데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가슴 속에 품고 달리며 세계적인 마라톤 스타로 떠올랐던 손기정 선생을 시작으로 마라톤 스타 계보는 수십 년 넘게 이어져 왔습니다. 그 외에도 트랙, 필드 종목에서 비교적 다양하게 우리 육상의 자존심을 살린 선수들이 꾸준하게 있어 왔습니다. 세계 1등은 못 해도 국가대표로서 명예를 걸고 최선을 다해 달리고 뛰고 던졌던 '우리나라의 육상 스타'는 누가 있었는지 소개하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합니다.


'마라톤 전설' 손기정

▲ 손기정 선생, 황영조 선수
한국 마라톤 스타의 계보는 고(故) 손기정 선생에서 시작됐습니다. 그만큼 손기정은 한국 육상의 자존심이요, 육상 역사를 빛낸 최고의 스타였습니다. 비록 일장기를 달고 뛰었지만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은 이를 악물고 달린 끝에 2시간29분19초라는 경이적인 기록, 세계신기록을 작성하며 한국인 최초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당시 2시간30분 벽을 깬 선수는 손기정 선생이 처음이었는데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고, 한국 마라톤의 전설을 쓴 손 선생의 활약상은 길이길이 오늘날에도 빛나고 있습니다.

'올림픽 영웅' 황영조

이후 올림픽 마라톤에서 태극기를 달고 금메달을 딸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손 선생 이후 66년 만에 꿈같은 쾌거가 터졌습니다. 바로 황영조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것입니다. 그것도 일본 선수와 치열한 경쟁을 벌인 끝에 막판 스퍼트로 따돌리며 이룬 더없이 값진 금메달이었습니다. 이 광경을 직접 현장에서 지켜본 손기정 선생은 감격과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마라토너 후배 황영조의 금메달을 진심으로 축하해 했습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이어 2년 뒤, 일본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건 황영조는 한국 마라톤의 부흥을 다시 이끌어내는 데 큰 역할을 해낸 영웅이었습니다.

'최고의 마라토너' 이봉주

그리고 이 바통은 그대로 이봉주에게 전달됐습니다. 20살이 돼서 늦깎이로 마라톤 풀코스 선수로 뛰었던 이봉주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남아공 투과니와 접전을 펼친 끝에 은메달을 따내며 2회 연속 한국 마라톤이 올림픽 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이뤄내고 간판으로 떠올랐습니다. 이어 이봉주가 낸 성과는 대단했습니다. 1998년 네덜란드 로테르담 마라톤에서 첫 한국 신기록을 세운 뒤, 2000년 일본 도쿄 마라톤에서 2시간 7분 20초의 기록으로 또다시 한국 신기록을 작성하며 현재까지 깨지지 않은 전무후무한 기록을 썼습니다. 그밖에도 아시안게임 2연패, 보스턴 마라톤 우승, 풀코스 완주 41회라는 기록도 작성하는 등 꾸준한 활약으로 한국 마라톤의 역사를 연달아 새로 썼습니다. 성실한 성격과 철저한 자기 관리를 통해 이뤄낸 쾌거들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뛴 41번째 풀코스 대회, 2009 전국체전에서도 그는 금메달을 따내며 영예롭게 은퇴했습니다. 마지막까지 진정한 마라톤 영웅, 육상 스타로서의 면모를 보였던 그였습니다.

'단거리 스타' 장재근

그렇다고 마라톤에서만 우리 육상 스타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1980년대 탄탄한 체격에 잘 생긴 얼굴, 여기에 실력까지 겸비한 단거리 선수가 한국 육상의 희망으로 떠올랐습니다. 그 주인공은 바로 '한국 단거리 최고 스타' 장재근이었습니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육상 최초로 남자 200m에서 21초대 벽을 깬 20초89 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며 화려하게 등장한 장재근은 1980년대 중후반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 스프린터로 떠오르며 주목 받았습니다. 특히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남자 200m 2연패를 거두고, 뛸 때마다 아시아 기록을 세우며 기록 제조기로도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그가 1985년 아시아육상선수권 남자 200m에서 세운 20초41은 여전히 26년째 깨지지 않는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꾸준한 기록 향상을 보이며 한국 단거리의 수준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장재근은 지난해 김국영의 남자 100m 한국 기록 경신에도 보이지 않는 도움을 많이 주는 등 '단거리 전설'로서의 명성을 지금도 이어가고 있습니다.

'여자 육상 희망' 임춘애

장재근과 더불어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을 빛낸 육상 스타는 '라면 소녀'로 명성을 날렸던 여자 중장거리 스타 임춘애였습니다. 나중에 과장된 발언으로 밝혀졌지만 "라면만 먹고 뛰었다"는 발언으로 새삼 화제를 모았던 임춘애는 800, 1500, 3000m에서 금메달을 따내 한국 육상 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국제 대회 3관왕에 오르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이후 더 떠오르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헝그리 투혼'을 발휘하며 새 희망을 보여준 임춘애의 활약상은 충분히 한국 육상의 전설로 기억될 만하고도 남았습니다.

'투척 종목 선구자' 백옥자

임춘애가 등장하기 전, 여자 육상 스타로는 '아시아의 마녀' 백옥자가 있었습니다. 투포환 절대 강자였던 백옥자는 1970년, 1974년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여자 선수로는 처음으로 금메달, 2연속 우승이라는 쾌거를 동시에 이룬 스타였습니다. 이미 18살 때, 17년 묵은 투포환 한국 기록을 갈아치우고 당시 올림픽 최연소 출전 기록을 세웠던 백옥자는 남다른 어깨와 기술을 바탕으로 투포환 뿐 아니라 원반던지기에도 출전하는 진기록도 갖고 있는데요. 실제로 투포환 뿐 아니라 원반던지기에서도 그녀는 1974년 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을 따내며 투척 종목 한 대회 2개 메달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후에는 잠시 교사 생활을 하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 복귀해 4위에 올라 나이를 무색케 한 활약으로 팬들의 박수를 받기도 했습니다. 던질 때마다 새로운 기록을 쓰고, 아시아에서 주목한 백옥자는 투척 종목의 선구자이자 한국 여자 육상의 큰 희망이었습니다.

'도약 종목 최고 간판' 이진택

도약 종목에도 영웅은 있었습니다. 바로 1990년대 중반 좋은 활약을 펼쳤던 남자 높이뛰기 간판 이진택이었습니다. 1992년 전국육상선수권에서 한국신기록을 세우며 높이 떠오른 이진택은 주요 국제 대회에서 인상적인 성적을 내며 아시아의 대표 높이뛰기 스타로 주목받았습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1999년 세계육상선수권에서는 결선까지 올라 각각 8위, 6위에 오르기도 했고, 1998년, 2002년 아시안게임, 1997년 하계 유니버시아드에서는 잇따라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아직도 그가 세운 기록, 2m34가 한국 기록으로 남아있을 만큼 이진택의 존재는 대단했습니다. 무엇보다 마라톤 외에 내세울 것 없었던 한국 육상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도약 종목의 가능성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선수가 바로 이진택이었습니다.


이렇게 정리해 놓고 보니 필드 단거리, 중/장거리, 도약 종목, 투척 종목, 마라톤까지 골고루 한국 육상을 빛냈던 선수들이 꾸준히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타 종목 선수들에 비해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해도 이들의 존재, 활약이 없었다면 한국 육상은 희망도 없었을 것입니다. 불모지와 다름없는 환경 속에서 열심히 뛴 이들의 바통을 이어 이제는 후배 선수들이 사상 처음 우리 땅에서 열리는 세계육상선수권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줄 차례입니다. 2000년대 들어 이렇다 할 새로운 육상 스타가 나타나지 않는 상황에서 이들의 계보를 이을 만한 선수가 꼭 나와주기를, 이들을 비롯한 육상계 많은 이들은 기대하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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