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국으로 치닫던 스파이 명월 사태는 한예슬이 급히 돌아와 사과하고 강경 일변도로 나갈 것 같았던 KBS가 사과를 수용하면서 일단락되는 듯 했다. 그러나 그 시점에 스파이 명월 현장을 지켜본 상반된 주장들이 상충하면서 논란의 끝은 아직 묘연해 보인다. 먼저 한예슬의 최측근 중 하나인 스타일리스트의 ‘개고생 운운’의 트위터 글이 화제가 되자 이어 현장 스태프들이 공동 서명한 성명서로 반박하는 양상이 빚어졌다.

그렇게 논란의 주변부에 소란이 생겼지만 분위기는 무개념 톱스타병 한예슬 성토에서 차츰 드라마 제작환경의 문제 개선으로 주제가 흘러가는 즈음에 한예슬이 급거 귀국하고, 서로 간의 속내야 어떻든 간에 일단 드라마를 계속해야 한다는 현실적 이유에 의해서 상황은 극적인 화해로 포장될 수밖에 없었다. 한예슬과 KBS의 화해는 형식의 화해이고, 언제 다시 터질지 모르는 위험을 등에 진 외줄타기임을 알 수 있다. 몰라서 화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태를 일단 진정시키고자 하는 암묵적 묵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가식도 아니고, 진심도 아닌 어정쩡한 화해에 빈 박수라도 치는 상황에 모든 것을 다시 원점으로 돌리는 발언이 나와 한예슬 사태의 2라운드를 예고하고 있다. 스파이 명월의 상대역 에릭(문정혁)이 자신의 트위터에 장문의 글로써 한예슬 사태의 진실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에릭의 주장대로라면 스파이 명월 제작에는 쪽대본도 살인적 스케줄도 없다. 또한 감독과 한예슬의 갈등도 없다. 그저 한예슬에게만 문제가 있는 것이다.

에릭은 장문의 글을 “잘못을 바로잡지 않으면 그것은 용서가 아닌 용납”이라는 내용으로 맺었다. 에릭의 글은 우선 문장력에 먼저 놀라게 했다. 그리고 한예슬을 묘하게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두 번째로 놀라게 했다. 보통은 같은 배우인 한예슬을 옹호할 거란 생각을 같기 마련인데 에릭은 그런 의사는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해서 에릭은 그 말을 한예슬에게 하기 전에 자신에게 먼저 했어야 했다.

바로 자신의 트위터에서 벌어진 말다툼 끝에 법정스님에 대해 모욕적인 발언을 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논란 이후 에릭이 사과했다는 기사는 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속사의 형식적 사과일 뿐 정작 본인은 그에 대해서 사과하거나 진실로 반성하는 흔적을 남기고 있지 않고 있다. 그래서 에릭이 분명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이를 대하는 누리꾼들 중에는 “너나 잘 하세요”라는 냉소적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사전제작에 대한 그의 의견이나 미래보다는 현재 현장의 스태프들이 더 중요하다는 신념은 에릭 개인의 생각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다. 비록 동의하지 않더라도 어쨌든 현장의 중요한 증언이니 경청할 필요 또한 있다. 그렇지만 가장 아쉬운 점은 타이밍이었다. 때로는 침묵이 진실보다 값질 때가 있다.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워지는 바로 그 타이밍이었다. 현실적으로 스태프의 공동성명보다는 같은 배우 입장인 에릭의 발언이 훨씬 더 무게감을 갖기 마련이다.

현시점에서 에릭의 발언이 한예슬을 매장시키기 위한 악감정을 품고 있다고는 생각되지는 않는다. 배우들 사이에 배신자로 오해받을 위험도 무릅쓴 것을 보면 에릭 본인의 성격이 똑 부러지는 결과를 선호하는 것 정도로 보일 뿐이다. 그러나 에릭은 현재의 흐름이 한예슬 구명이 아니라 드라마 제작의 난맥상을 이번 기회에 바로잡자는 어젠다가 만들어지는 것까지는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만일 모르고 한 것이 아니라면 할 말이 없을 정도로 큰 문제다.

또한 “배우는 현장에서 죽어야 한다”는 말은 장인 정신이 몸에 밴 원로배우의 신념으로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렇게 현장을 지키려는 충정과 자기희생이 결국 드라마 환경을 개선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젊은 배우들이 가져야 할 문제의식일 것이다. 원로의 말과 경험은 언제나 금과옥조의 깊은 가르침이 있지만, 그것을 그대로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 미래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다소 결례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드라마 촬영 중인 주연 배우가 아무리 짬짬이 한다고 하더라도 세상일에 너무 관심이 잡다하다. 그 시간에 좀 더 완벽한 강우를 만들기 위한 분석과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더 필요하다. 독고진 아류가 아닌 에릭만의 강우를 남은 기간 동안 보여주길 기대한다. 한예슬의 미국 도피 직후 터진 많은 루머들이 사실과 달랐지만 에릭의 현장 증언만은 반드시 사실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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