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두절미하고 모처럼 맘에 드는 한국 액션영화를 만났습니다. <최종병기 활>이라는 제목을 봤을 때는 이런 유치한 제목은 누구의 머리에서 나오는 것인지 궁금했는데, 막상 관람한 결과는 "제목 따위 아무렴 어때!?"로 바뀌었습니다. 다른 건 다 차치하더라도 <최종병기 활>의 액션은 보는 이의 눈이 번쩍 뜨이게 만듭니다. 소재의 폭이 제한적이라 한국형 블록버스터라고 하기에는 망설여지지만, 반대로 그 때문에 지극히 한국적인 블록버스터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다카하시 신의 만화 <최종병기 그녀>에서 따왔을 것으로 보이는 제목의 <최종병기 활>은 - 여전히 조금 아쉬운 제목이긴 하지만 -,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십수 년이 흐른 시점에 발생한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합니다.

남이와 자인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남의 집에 얹혀 은둔하는 신세가 됩니다. 역적의 자손이라는 멍에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으로 허송세월을 하는 남이와 달리, 자인은 어여쁜 규수로 반듯하게 자라 혼인을 앞두는 경사를 맞이합니다. 그러나 하필 혼례가 치러지던 중에 청나라의 군대가 압록강을 넘어 조선을 침략합니다. 이로 인해 삽시간에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청나라의 포로가 되어 끌려갑니다. 이 중에는 자인과 자인의 신랑 서군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항상 자인의 안위가 최우선이었던 남이는 곧장 동생을 구하러 청나라 군대를 뒤쫓기 시작합니다.

어째 익숙한 이야기로 보이지 않나요? 작년에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던 <아저씨>처럼 <최종병기 활>도 구조극 및 탈출극으로 짜여 있습니다. 적어도 이것만큼은 실질적으로 새로울 게 없는 셈입니다. 최근 본 영화 리뷰에서 거듭 동일한 부분을 지적하게 되는데, 그처럼 <최종병기 활>도 이야기는 허술하고 진부한 축에 속합니다.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삼았다고 해서 민족주의를 자극하려고 애쓰는 것이나, 서군의 캐릭터에게 존재의미를 부여하고자 구태의연하게 자인과의 혼인관계를 형성하게 한 것은 극을 간결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특히 중반부와 결말부에 흘러나오는 자막은 <7광구>의 그것만큼이나 불필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부하고 허술하다고 해서 영화의 완성도가 전적으로 타격을 입는 것은 아닙니다. 참신함만이 시나리오의 완성도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7광구>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 바람이 세다 못해 메머드급 태풍이 불어닥칠 수준만 아니라면 연출로 얼마든지 커버가 가능합니다. 액션의 오르가즘으로 몸서리를 쳤던 <아저씨>가 그 좋은 예가 될 수 있겠군요. <최종병기 활>은 이야기의 구조뿐만 아니라, 그 이야기의 부족함과 과한 드라마를 액션의 연출로 훌륭하게 메우고 있다는 면에서도 <아저씨>와 동일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련의 전쟁영화에서 스나이퍼는 굉장히 매력적이고 독특한 캐릭터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적을 사살하는 능력은 흡사 그를 다른 차원의 인물로 격상시킵니다. 이는 관객에게 묘한 쾌감을 안겨주는 동시에, 조준점을 잡기 위해 숨을 죽이는 대목에선 관객에게까지 스릴을 전가합니다. <최종병기 활>의 연출은 이러한 스나이퍼 캐릭터를 잘 살려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총이 아닌 활을 사용하는 궁수를 가지고 잘도 현대판 전쟁영화 못지않게 완성해냈습니다.

굳이 꼽자면 <최종병기 활>은 두 명의 매력적인 스나이퍼를 등장시켰던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와 비견할 수 있습니다. 조선의 신궁 남이와 쥬신타를 중심으로 한 청과의 대결은, 상대적으로 두뇌싸움의 묘사가 떨어져 서서히 죄어들어오는 맛은 부족하지만, 숨 쉴 틈 없이 몰아붙이는 액션의 직선성에 있어서만큼은 <최종병기 활>이 우세합니다. 특히 건물이 아닌 험준한 산세를 활용하여 액션을 구성한 면에서는 제작진의 탁월함에 박수를 보내고 싶을 정도입니다. 김한민 감독의 전작 <극락도 살인사건, 핸드폰>을 연출한 경험이 <최종병기 활>에 효과적으로 녹아든 것도 같습니다. 스릴러였던 두 편의 영화를 통해 쌓은 노하우가 액션과 만나 시너지 효과를 창출했다는 의미입니다.

역사적 사실의 고증이라는 면에서도 <최종병기 활>이 쏟았을 부단한 노력이 돋보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시종일관 청나라의 군사들이 쓰는 희한한 언어가 대체 뭔지 궁금했는데, 전 세계에서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사용하는 만주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지구상에서 거의 사라진 언어인 겁니다. 이런 만주어를 영화에 쓴 것도 대단하고, 그걸 고생하면서 익혀 일일이 암기하고 대사로 내뱉은 배우들의 노고도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청의 갑옷을 비롯하여 각 무기를 충실히 재현한 것도 <최종병기 활>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화살로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녔던 청의 육량시, 빠른 속도로 적의 두려움을 샀던 편전(애기살)의 특징을 영화에서 고스란히 살렸더군요. 임시방편으로 만든 통아에 넣어 애기살을 쏘던 남이의 모습은 <최종병기 활>의 명장면으로 꼽고 싶습니다. 이렇게 고증에도 소흘하지 않고 만든 영화니 성공작이 될 수밖에요. <최종병기 활>이 고증은 나 몰라라 하고 '화면발'에만 집착하는 대다수의 작품 - 특히 티비 드라마 - 에 무언의 가르침을 전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

덧 1) 류승룡의 연기는 시쳇말로 갑입니다. 그로 인해서 악역인 쥬신타의 무게감이 한층 더 묵직해진 것 같습니다.

덧 2) <괜찮아 아빠 딸>로 제 마음을 앗아간 문채원의 비중이 조금 적어서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미모는 역시!!!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