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훈 감독의 신작 <고지전>은 영화 외적인 부분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일각에서는 관람거부까지 불사하겠다는 의견도 난무했었죠. 장훈 감독과 제작사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웠을 겁니다. 저도 인간적으로 조금 실망했지만, 일단 영화는 영화대로 보고 평가하자는 생각에 관람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전 <고지전>이 꽤 맘에 듭니다.

<고지전>은 한국전쟁 말기를 배경으로 합니다. 휴전협정이 지리하게 이어지던 와중에 남과 북은 조금이라도 더 영토를 넓히고자 치열한 전투를 연일 치르고 있었습니다. 특히 악어중대가 사수하는 애록고지는 빈번하게 점령국이 바뀌는 결전지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중대장은 석연치 않은 연유로 죽었고, 중대원 중에 북한과 내통하는 자가 있다는 첩보가 입수됩니다. 이에 방첩대 중위인 은표가 악어중대에 얽힌 비밀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고 애록고지로 향합니다. 뜻밖에도 그는 애록고지에서 오래 전에 헤어진 친구인 수혁과 재회하고, 이윽고 몇 가지 사실을 밝혀내게 됩니다.

일찌감치 밝혀지지만 그래도 스포일러라 조심스럽습니다만, 북한과의 내통의 실체는 이렇습니다. 워낙 자주 애록고지의 주인이 바뀌다 보니 매번 옮기기가 번거로워 한 번은 물건을 숨겨두고 떠납니다. 이걸 북한군이 발견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면서 담배, 술, 음식 등을 주고받게 된 것이었죠. 심지어 남쪽에 있는 가족에게 편지까지 대신 보내줍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앞으로 어떤 시나리오가 펼쳐질지 눈에 선합니다. 이를테면 전쟁으로 갈라진 형제의 비극적인 운명을 남북분단의 현실과 고스란히 일치시켰던 <태극기 휘날리며>,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던 군인들이 작은 마을에서 조우하며 전쟁을 잊고 화합한다는 <웰컴 투 동막골> 등, 자연스레 이런 류의 영화가 숱하게 들려줬던 이야기가 <고지전>에서도 등장할 것이라고 점치게 됩니다. 그래서 순간 마음속으로나마 우려를 표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북 관계를 소재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들먹이며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영화는 이제 좀 진부할 때가 됐지 않나요?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고지전>은 제법 신선한 이야기를 가진 영화로 다가옵니다. <고지전>에는 민족주의와 남북분단 혹은 한국전쟁과 엮인 이념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북한과 내통(?)하는 현장이 발각되고 이에 은표가 흥분을 감추지 못했을 때 수혁은 "별일 아니다"라고 얘기합니다. 실제로 전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행동하기도 하죠. 아닌 게 아니라, 수혁을 비롯하여 당사자인 악어중대원들에게 해당 사건은 별일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에게는 그저 서로가 가진 물건을 주고받은 것일 뿐, 그 이상이나 이하의 의미는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고지전>에서의 남, 북한군은 피를 나눈 비극적인 운명의 형제가 아니라 순수하게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합니다. 이는 곧 앞서 열거한 동류의 영화들이 감상주의에 젖어 바라보던 이념을 제거하고, <고지전>을 전쟁의 실체와 본질, 비극에 보다 더 근접한 극사실주의적인 영화로 대두되게끔 만들어주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더 나아가서 <고지전>이 견지한 이러한 관점은 반전(反戰)영화의 메시지를 더욱 확실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제가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최고로 꼽는 장면은 사실감 넘치는 연출을 보여준 오마하 해변 전투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다음의 두 장면이야말로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리얼리티를 높여줬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맬리쉬가 건물 안에서 독일군과 육탄전을 벌이다 칼에 서서히 찔려 죽는 장면, 그리고 밀러 대위가 죽음에 이르게 되는 치명적인 총상을 입는 장면입니다. 전자는 논점에서 조금 벗어나니 논외로 하고, 후자는 그야말로 전쟁의 본질을 여과 없이 묘사한 것이었습니다. 아울러 지금껏 본 전쟁영화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의 하나입니다.

밀러 대위를 쏜 독일군은 포로로 잡혔다가 목숨을 부지하고자 미국을 찬양하다못해, 미국의 국가까지 부르면서 히틀러를 욕했던 자입니다. 그를 밀러 대위가 부대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베풀어 살려 보내줬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밀러 대위는 결국 죽고 맙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배은망덕한 독일 나치 새끼"가 아니라,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라는, 지구상의 모든 전쟁을 지배하는 유일무이하고 혹독한 논리입니다.

<고지전>이 말하고 있는 것 또한 이와 거의 유사하며, 동일한 의미선상에서 인상적인 장면이 몇몇 등장합니다. 특히 '2초'라는 별명을 가진 원 샷 원 킬의 여성 스나이퍼가 남한군을 죽이고 돌아서며 초콜릿을 먹는 것을 슬로우 모션으로 잡은 장면은 자그마한 전율마저 일으키게 합니다. 이는 표면적으로 북한군은 남한군과, 남한군은 북한군과 온정을 나누는 것 같지만 결국 전쟁에서는 죽고 죽이는 것만이 전부라는 냉혹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토록 참혹한 전쟁에서 민족주의에 경도되는 것은 비현실적이며 차라리 사치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기껏해야 애인이나 친구와 함께 어두컴컴한 극장의 푹신한 좌석에 앉아서, "우와~ 이 영화 죽이는데! 완전 실감나잖아!"라고 감탄하는 것은 전쟁을 대리체험하는 자들이 누리는 일종의 특권에 가깝겠죠. 영화를 보며 비극적인 분단 현실과 동족상잔에 눈물짓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건 단지 저처럼 전쟁을 직접 겪어보지 못한 자들이 철저히 외부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전쟁의 비극일 따름입니다. 진짜 전쟁에 뛰어들었던 사람들의 현실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을 텐데 말입니다.

한번 상상을 해보세요. 내일 한반도에 제 2차 한국전쟁이 발발해 여러분이나 여러분의 가족이 참전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동족상잔이니 한민족이니 하는 민족주의적 정서가 머릿속에 떠오를까요? 총탄에 희생되는 북한군을 보며 내 동포가 죽는다며 가슴 아파할까요? 당장 내가, 내 가족이 죽어나가는 마당에 북한을 걱정하게 될까요? 정치적 이념에 따라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떠올리며 비통해할까요? 언제 핵폭탄이 떨어질지 몰라 불안해하지 않고? 물론 전 전쟁을 겪은 세대는 아닙니다만, 모르긴 몰라도 아닐 확률이 몇 곱절은 높을 겁니다.

이와 같은 면에서 <고지전>은 한국전쟁을 무대로 삼았던 여타의 영화와 차별화됩니다. 군인정신이 투철하신 분들이나 보수주의자들은 전우애마저 버리고 생존에만 집착하는 <고지전>의 남한군을 보며, 인도주의자들은 제네바 협정 따위 개나 줘버리고 북한군을 즉각 사살하는 남한군을 보며 비판을 쏟아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 말했다시피 전쟁을 겪지 못한 입장이지만 감히 한마디 하자면 - 저는 그것이 묘하게도 높은 설득력을 갖췄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인간성의 말살이라는 반전 메시지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데도 효과적으로 쓰였습니다.

<고지전>에도 아쉬운 점은 있습니다. 지금까지 말한 <고지전>만의 독특한 시각은 중반부에 접어들면서 무게를 잃고 쓰러집니다. 이 말인즉슨, <고지전> 역시 후반부로 가면서 민족주의적인 색채로 물이 든다는 의미입니다. 시종일관 초심을 잃지 않았다면 훨씬 더 완성도 높은 영화가 됐을 텐데 말입니다. (하긴 매몰차게 외면하기엔 힘든 소재이긴 합니다)

더 심각한 것은, 휴전협정의 발효를 12시간 남겨둔 상황을 덧붙이면서 영화가 불필요하게 길어집니다. 그 전에 수혁이 남긴 말도 지나치게 친절하다고 느낄 만큼 영화의 주제를 노골적으로 설파하더군요. 굳이 그리 장황하게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영화가 내포한 메시지는 충분히 전달됐는데, 이 때문에 도리어 영화의 완성도와 세련미에 손상이 가해졌고, 더 나아가 흡사 1960~70년대에 절정을 이뤘던 반공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습니다. 영화의 후반부를 조금 다듬었다면 지금보다 더 훌륭한 작품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는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


덧 1) <공동경비구역 JSA>의 원작자인 박상연 씨가 <고지전>의 각본을 썼습니다. 두 영화는 미스터리로 출발한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이를 얼마나 살려내고 있느냐에서는 차이가 큽니다. 시각에 따라 단점이 될 수도 있는 부분이죠.

덧 2) <고지전>은 촬영 테크닉이 두드러지는 영화였습니다. 상황과 연출 의도에 따라서 스테디 캠, 핸드 헬드, 크레인 (와이어?)을 활용하며 역동적인 화면을 연출했더군요. 바스트 샷으로 잡았다가 롱 샷으로 미는 장면도 특이했습니다.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