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카타르에서 열린 아시안컵 준결승전에서 한국 축구는 일본에 승부차기에서 아쉽게 패해 고개를 떨궈야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결승에 오르지 못해 아쉬웠던 경기였지만 그래도 이 경기를 통해 한국 축구는 모처럼 새로운 한일전 영웅을 탄생시켰습니다. 바로 연장 후반 경기 종료 직전, 극적인 동점골을 터트린 주인공 황재원이었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기대하지 않은 상황에서 천금 같은 동점골을 넣은 황재원의 환호에 선수나 조광래 감독, 그리고 이를 지켜본 모든 팬들은 그 순간 짜릿함을 만끽했을 것입니다. 결과는 아쉬웠어도 120분 동안 투혼을 발휘하다 골을 넣은 황재원은 그날 한국 축구의 영웅이었습니다.

한일전은 축구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특별한 경기'입니다. 월드컵, 올림픽 예선 같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친선경기조차 그 신경전은 경기 전부터 대단합니다. 그런 경기에서 의외의 선수가 맹활약을 펼쳐 한일전 승리에 크게 일조한다면 그보다 더 대단한 일은 없다고 여깁니다. 이를 통해 한국 축구의 '새로운 영웅'이 탄생하는 계기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 1997년 9월, 도쿄대첩을 이뤄낸 이민성
대표적인 케이스를 꼽는다면 바로 '도쿄대첩의 사나이' 이민성이 있습니다. 이민성은 1997년 9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프랑스월드컵 최종예선에서 터트린 통쾌한 왼발 중거리슛 한 방으로 2-1 승리에 가장 큰 공을 세웠습니다.

당시 월드컵 본선에 직행하기 위해 반드시 조 1위에 올라야 했던 상황에서 일본 적지에서 열린 일본과의 경기는 당연히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후반 초반 야마구치의 로빙슛에 선제골을 헌납하며 패색이 짙은 듯 했습니다. 하지만 후반 36분 최용수의 패스를 받아 서정원이 동점골을 넣으며 균형을 이뤘고, 마침내 후반 39분 이민성이 일본측 골에어리어 왼쪽 부근에서 그대로 날린 슈팅이 골망을 시원하게 가르며 역전에 성공했습니다. 그해 뿐 아니라 한국 축구 역사적으로도 명장면으로 꼽힌 이 한 방은 평범한 수비 자원이었던 이민성의 가치를 몇 배 이상 높이는 계기가 됐습니다. 지금 봐도 결코 질리지 않는 이 통쾌한 골은 어쨌든 '한일전의 사나이, 이민성'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최고 명장면'으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이민성이 '한일전의 사나이'라면 황선홍은 '한일전의 진정한 영웅'으로 평가받았던 선수였습니다. 흥미롭게도 황선홍은 A매치 데뷔를 1988년 일본과의 아시안컵 조별예선에서 치렀는데요. 당시 그는 철저하게 무명에 가까운 공격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의아할 수도 있겠지만 학연이 심했던 당시에 '비주류'였고 '무명'이었던 그를 당시 감독이 발탁했던 것이 논란이 됐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황선홍은 일본과의 아시안컵 조별예선에 선발 출장해 A매치 데뷔를 했고, 이 경기에서 전반 13분 박경훈의 패스를 받아 다이빙 헤딩슛으로 선제골을 뽑아내며 팀의 2-0 승리에 기여했습니다. '최고 공격수' 황선홍의 존재를 제대로 알리는 순간이었습니다.

▲ 1998년 4월, 잠실에서 열린 일본과의 평가전에서 결승골을 넣은 뒤 환호하는 황선홍
이후 황선홍은 일본만 만나면 펄펄 날았습니다. 1994년 일본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는 동점골과 역전골까지 터트리며 3-2 승리에 기여했고, 1998년 4월 잠실에서 열린 평가전에서는 비가 많이 내려 진흙탕이 된 그라운드에서 바이시클 슛으로 2-1 승리를 이끌면서 다이빙 세레머니를 펼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황선홍은 일본을 상대해서 무려 5골을 터트리며 '일본 킬러'의 면모를 보여왔습니다. 무명 시절 치른 데뷔전에서 얻은 자신감이 '대형 스트라이커' 황선홍으로 성장시킨 밑거름이 된 셈입니다.

황선홍, 이민성이 '한일전의 사나이'로 떠오를 수 있었던 공통점을 꼽는다면 바로 기존에 기대가 그리 크지 않았던 선수였다는 점입니다. 통상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선수들이 중요한 경기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묵묵하게, 꾸준하게 기회를 엿본 의외의 선수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런 선상에서 황선홍, 이민성은 한일전에서 기회를 살렸고, 깊은 인상에 남을 골까지 터트리며 여전히 한국 축구의 영웅, 또는 한국 축구를 살린 명장면을 만든 인물로 꾸준하게 꼽히고 있습니다.

▲ 일본대표팀과의 친선경기를 위해 8일 오후 일본 삿포로에 도착한 축구대표팀 선수들이 시라하타야마 구장에서 몸을 풀고 있다. ⓒ연합뉴스
75번째 축구 한일전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기존에 잘 알려진 스타들 간의 맞대결이 흥미를 모을 수 있지만 그에 비해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던 선수들이 의외의 활약을 펼치는 것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회를 잡고 41번째 승리에 기여하며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새로운 영웅 탄생에 왠지 모를 기대감도 갖게 하는 이번 한일전. 기회를 엿보는 '잠재적인 새로운 영웅' 가운데 누가 떠오를 것인지 지켜볼 일입니다.


대학생 스포츠 블로거입니다. 블로그 http://blog.daum.net/hallo-jihan 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스포츠를 너무 좋아하고, 글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