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7일 메이저 리그에도 진출했던 일본인 투수 이라부 히데키가 LA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가족 문제와 사업 부진 등으로 인해 자살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1969년생으로 일본 프로야구와 메이저 리그를 거치며 17년간의 선수 생활 동안 도합 106승을 거둔 이라부는 1993년 158km/h로 일본인 투수 중 최고 구속 신기록을 수립한 강속구 투수였습니다.

▲ 이라부 히데키 ⓒ연합뉴스

이라부는 생전에 한국 프로야구, 특히 김성한과 깊은 인연을 맺은 바 있습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일본 프로야구와 한국 프로야구가 처음으로 만났던 제1회 한일 슈퍼 게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한국 프로야구 출범 10주년과 한일 국교 정상화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개최된 제1회 한일 슈퍼 게임 1차전은 1988년 개장된 일본 야구의 심장부 도쿄돔에서 1991년 11월 2일 열렸습니다.

4회초 한국은 2:2 동점을 만들었지만 경기 중반 무너지며 7:2로 밀렸습니다. 5회말 쌍방울의 젊은 마무리 조규제가 두 번째 투수로 등판했지만 아키야마(세이부)와 오치아이(주니치)에 연속 타자 홈런을 허용하며 분위기가 완전히 일본으로 넘어간 것입니다. 한일 양국 프로야구 수준의 현격한 실력 차이를 TV를 통해 지켜보는 한국의 야구팬들은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경기가 후반으로 진행되며 승패보다 한국 프로야구가 자존심을 세울 수 있을 것인지 주목되는 순간 ‘검빨 유니폼’을 착용한 해태 김성한이 8회초 1사 후 좌월 솔로 홈런을 터뜨렸습니다. 김성한에게 홈런을 허용한 것이 바로 롯데(당시 일본 프로야구의 롯데는 1992년 지바 롯데 마린스로 팀 이름이 바뀌기 전 롯데 오리온스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소속의 이라부였습니다.

이라부는 그해 프로 3년차로 빠른 구속으로 인해 주목받는 선수였으나 8승 5패의 성적이 말해주듯 완성된 에이스는 아니었기에 당시 생중계를 맡은 KBS TV의 하일성 해설 위원은 ‘김성한이라면 이라부에게 홈런을 터뜨릴 수 있다’는 작두 해설을 적중시켜 화제가 되었습니다. 1차전은 8:3 일본의 완승으로 끝났지만 한국 프로야구 선수로서 도쿄돔에서 첫 번째 홈런을 터뜨린 것을 기념하기 위해 도쿄돔의 야구박물관에 김성한의 방망이가 전시되기도 했습니다.

이라부와 김성한의 인연은 그로부터 2년 뒤인 1993년으로 이어집니다. 1993년 시즌 종료 후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와 지바 롯데의 연합팀이 한국을 방문해 부산과 서울에서 친선 경기를 세 차례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 중 2경기의 상대는 LG와 롯데의 연합팀이었고 나머지 1경기는 한국 시리즈 우승팀 해태에게 배정되었습니다.

11월 14일 잠실야구장에서 벌어진 해태와 주니치, 지바 롯데 연합팀의 대결은 승패 못지않게 2년 만에 다시 만난 김성한과 이라부의 대결로 압축되었습니다. 이라부를 상대로 2년 전 홈런을 터뜨리며 일본 프로야구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김성한이 다시 홈런을 뿜어낼 수 있는지 여부에 집중된 것입니다.

해태는 선발 투수로 그해 10승을 거둔 고졸 신인 이대진을 앞세웠으나 1회초부터 실점하며 4:0으로 끌려갔습니다. 이라부는 3회말 구원 등판해 승리 투수가 되었지만 5회말 다시 김성한에게 좌월 솔로 홈런을 허용했습니다. 이라부의 투구를 받아쳐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좌측 담장을 넘어간 김성한의 홈런은 이날 해태의 유일한 득점이었고 경기는 4:1 해태의 패배로 종료되었습니다. 승부는 한국 프로야구의 패배로 귀결되었으나 이라부에게 김성한이 홈런을 빼앗은 장면은 리플레이처럼 반복된 것입니다.

이라부의 사망 후 국내 언론은 롯데의 1992년 우승 주역 ‘슈퍼 베이비’ 박동희와 비교하며 강속구 투수로서 잠재력을 꽃피우지 못하고 요절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이 닮은꼴이라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1991년 한일 슈퍼 게임 1차전에서 박동희는 한국의 선발 투수로, 이라부는 일본의 네 번째 투수로 나란히 등판한 인연도 있습니다. 아울러 2002년 텍사스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오릭스의 박찬호가 이라부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라부와 가장 깊은 인연을 맺은 한국 프로야구 선수는 역시 2개의 홈런을 빼앗은 김성한입니다. 이라부가 자택에서 발견되기 꼭 1주일 전 군산상고와 경남고의 레전드 리매치에 등장한 53세의 김성한이 특유의 ‘오리 궁둥이’ 타법으로 날카로운 타구를 날리며 건재를 과시했음을 감안하면 42세를 일기로 이라부가 세상을 등진 것은 매우 안타깝습니다.


야구 평론가. 블로그 http://tomino.egloos.com/를 운영하고 있다. MBC 청룡의 푸른 유니폼을 잊지 못하고 있으며 적시타와 진루타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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