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이뿐입니까? 교사란 작자는 소풍에 지각했다고 학생을 무차별 구타하고, 수업시간에 휴대전화를 사용한 것을 훈계했다고 학생이란 족속이 교사를 폭행하는 일도 벌어집니다. 인성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사고가 온 나라에 팽배하니 교권은 무시당하고 인권은 유린당합니다. 교사의 자격이 없는 사람과 부모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 자리만 꿰차고 있는 상황에서 뭘 기대할 수 있을까요? 정부와 교육청은 인권 선진국을 지향하고 싶었는지 체벌을 없앴습니다. 당연히 반색할 일입니다. 하지만 합당한 대책을 세우고 시행했어야 할 텐데, 아무런 대책도 없이 뒷짐만 지고 있으면서 모든 책임과 의무를 교사에게만 떠넘기고 있습니다. 요즘 자주 느낍니다만, 대한민국은 역시 참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정치만이 아니라 일상에도 분노는 넘쳐납니다. 판사란 직업을 가진 자는 성폭행을 당해 법정에 선 피해자에게 수치스러운 질문을 일삼아 죽음으로 내몰았고, 피의자는 고작 3년형을 받는 게 전부였습니다. 물론 판사에게는 아직까지 아무런 제재도 가해지지 않았습니다. 세계 일류를 목표로 한다는 대기업은 자사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에 걸려 죽어가는 자들을 외면했습니다. 한 여자를 자신의 욕정을 채우는 수단으로 이용한 남자는 일이 터지자 공개적으로 둘의 관계를 부인했고, 끝내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도 이불을 뒤집어쓰고서라도 여자가 투신하도록 강요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인터넷이 발달한 지금은 무슨 일이라도 하나 터지면 모두 득달같이 달려들어 무형의 칼을 손에 든 채 사정없이 휘두릅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혹은 쌓여있는 분노와 스트레스를 담은 칼을 꽂을 대상이 필요하다는 듯 생채기를 내는 데 전념합니다. 행동은 물론이고 말 한 마디라도 잘못했다간 개인신상이 여지없이 까발려집니다. 그들이 사회적, 윤리적 심판의 대상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우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토해내는 분노는 결국 극단적인 폭력으로 이어진다는 것 또한 인정해야 합니다. 과연 이 분노와 폭력의 근원에는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 걸까요?
여기에 두 명의 소년이 있습니다. 덴마크에서 학교를 다니는 엘리아스는 스웨덴 출신이라는 것과 특이한 외모 때문에 다른 아이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합니다. 이 학교로 새로 전학을 온 크리스티안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가 되레 얻어맞고 맙니다. 순박한 엘리아스와 달리 반항기로 가득한 크리스티안은 적당한 기회를 틈타 보복을 가합니다. 소푸스라는 이름의 덩치 큰 아이를 흠씬 두들겨 패는 것으로도 모자라 급기야 칼까지 들이대며 위협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모종의 사건이 발생하자 크리스티안은 10대 소년의 발상이라곤 믿기지 않는 끔찍한 짓마저 서슴지 않고 자행하려고 합니다.
한편 엘리아스의 아버지인 안톤은 아프리카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온갖 병치레와 상처에 시달리는 이들은 물론, 하루가 멀다 하고 폭력에 의해 빚어지는 참사의 희생자들을 치료합니다. 그중에서도 최악은 폭력의 논리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고 하는 반군이 일삼는 잔혹한 학살입니다. 이들은 심지어 태아의 성별을 내기로 걸고 임신한 여자의 배를 갈라 꺼내는 끔찍한 짓마저 흥밋거리로 버젓이 자행합니다. 하루는 반군의 리더인 '빅맨'이 다리를 심하게 다쳐 병원으로 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를 치료하지 말 것을 요구하지만 안톤은 거절하고 자신의 의무를 다합니다. 그러나 성인군자와 같던 그도 인내와 자비의 한계에 다다르게 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하에는 일부의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결정적 스포일러는 없으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만 거슬리시는 분들은 일단 저의 추천작이라는 것만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인 어 베러 월드>와 같은 영화는 스포일러의 의미가 없습니다. 오락영화도 아니니, 직접 보고 무엇을 느끼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먼저 크리스티안은 막 어머니를 병환으로 여의고 아버지와 함께 할머니 댁에서 지내게 됩니다. 겉으로는 아이답지 않게 의연하게 대처하는 것 같지만, 실은 이 소년은 어머니를 잃은 분노를 가슴에 간직한 채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서먹한 것도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하여 오해하고 있는 탓입니다. 갈등의 골이 깊어 두 사람은 좀처럼 속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결국 크리스티안은 그릇된 방향으로 분노를 토해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과의 관계를 진전시키려고 노력했지만 크리스티안은 듣는 척만 할 뿐, 진정으로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엘리아스는 누구보다 자상하고 현명한 아버지와 친근하고 따뜻한 어머니 밑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이런 아이라면 문제가 없을 것 같지만, 엘리아스의 부모님은 별거 상태에서 곧 이혼하게 될지도 모를 판국입니다. 게다가 아버지는 대부분의 시간을 아프리카에서 의료봉사를 하며 보내기 때문에 곁에서 아들을 돌보지 못합니다. 어머니 역시 의사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어 두 사람 다 부모로서 꼭 필요한 역할을 해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엘리아스가 학교에서 겪는 일을 무조건 가해자의 책임으로만 떠넘기는 데 급급합니다. 조언이랍시고 가정환경부터 운운하는 교사도 그렇지만, 자신의 잘못을 전혀 인정하려 들지 않는 크리스티안의 어머니도 무책임하긴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인 어 베러 월드>가 이와 같은 스테레오타입에 근거하여 같은 얘기를 풀어냈더라면 지금과 같은 호평은 결코 얻어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다른 건 다 차치하고서라도 더는 신선한 얘기라고 할 수가 없죠. 하지만 약간의 과장을 더한다면, <인 어 베러 월드>의 두 소년이 처한 환경은 아주 일상적이거나 평범하다고 봐도 무방할 지경입니다. 어쨌든 이들의 부모는 제 나름의 역할을 하려고 최소한의 노력은 하고 있지 않습니까. 다만 엘리아스와 크리스티안의 부모에게는 일종의 불가항력에 가까운 일이 벌어지고, 이것은 흡사 나비효과처럼 모든 폭력의 싹을 틔우는 씨앗으로 작용하고 맙니다.
크리스티안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아버지에 대한 오해에서 빚어진 원망이 분노로 축적됩니다. 아울러 폭력으로 가질 수 있는 상대적 우월성과 특권이라는 현실의 논리를 놀랍게도 잘 체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티안은 폭력은 폭력을 낳을 뿐이라는 아버지의 교과서적 발언을 무시하고, 단번에 짓밟으면 그 누구도 자신을 건드리지 못한다는 또래 아이들의 잔혹한 법칙을 몸소 실천합니다. 더 서글픈 사실은, 이 아이의 호언장담이 그대로 맞아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크리스티안과는 달리 아버지와의 관계가 돈독했던 엘리아스도 어긋나는 결과에 빠지고 맙니다. 이것은 단 한 번의 소흘함과 실수에서 비롯된 일이었습니다. 엘리아스에게 진지한 대화 와 조언이 필요했던 그 순간에 하필 아버지는 아프리카에 가 있었습니다. 화상통신으로라도 대화를 나누려고 했으나 연결상태가 좋지 않았고, 설상가상 전에 없는 참상을 목격한 아버지가 그만 아들의 대화를 거절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모른 채 말입니다.
이 폭력은 모든 크고 작은 분노에서 촉발되는 것이고, 분노에서 촉발된 폭력은 또 다른 분노를 생성시키면서 재차 폭력을 부릅니다. 결국 이것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폭력의 사슬입니다. 그리고 폭력으로 이어진 사슬은 무한한 복수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만약 <인 어 베러 월드>를 전적으로 복수에 관한 영화로 규정한다면, '반면교사'를 앞세운 듯했으나 종국에는 '자승자박'에 빠져버린 <악마를 보았다>가 보여주지 못한 그 무언가가 담긴 수작이라고 평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폭력의 사슬은 절대 끊어지지 않는 것일까요? 안타까움과 동시에 참으로 모범적이게도 <인 어 베러 월드>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보여준다거나 주제넘은 설교를 하지 않습니다. 이건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맘에 들었던 부분입니다. 전 다분히 현실을 무시한 채 이상주의에 도취되어 누구나 아는 소리나 지껄이는 짓은 정말이지 꼴불견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걸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라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어 곤란을 겪고 혼란스러워할 뿐이거든요. 이런 상황을 간과한 채 그저 훈계하고 주입하려는 자세는 아무짝에도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런데 <인 어 베러 월드>에는 그런 우월적 존재감의 과시가 없습니다. 감독인 수잔 비에르는 초지일관 자극적이지 않은 연출을 견지하며 현실성을 잃지 않으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심도 깊은 성찰의 시선을 간직하도록 유도합니다. 대표적으로 엘리아스의 아버지이자 인도주의를 실천하는 의사인 안톤의 캐릭터를 그리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는 현실과 다소 괴리감이 있는 사람으로 보이다가도 어느 대목에서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또 다른 대목에서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우리와 별로 다를 바 없는 인간임이 드러납니다. 이를 통해서 감독은 관객들에게 폭력의 사슬을 끊을 수 있는 명확하지만 이상주의적인 해답 대신에, 한 가지의 현실적인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
덧 2) 보너스 씬이 있는 건 아닙니다만 엔딩 크레딧의 화면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짙은 여운을 음미해보세요.
덧 3) 평소에 스스로 인정했던 바이지만 <인 어 베러 월드>를 보며 새삼 느꼈는데, 전 역시 아직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인간입니다. 수잔 비에르 감독은 몇몇 대목에서 관객에게 심판의 추를 맡깁니다. 미처 몰랐습니다만 영화가 끝나갈 즈음에 돌이켜보니, 모든 경우에서 저는 안톤이나 엘리아스가 아닌 크리스티안의 손을 들어주었더군요. 어리석게도 지금 이렇게 글을 쓰면서도 여전히 크리스티안의 심정과 결정에 적잖은 공감을 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 <인 어 베러 월드>에 가진 딱 하나의 불만은, 어째서 죄를 지은 자를 용서와 인내라는 미명하에 처단하지 않는가였습니다.
덧 3) 자연스레 <배트맨 비긴즈>의 저 유명한 대사, "사회적 관용이 악을 키운다"가 떠올랐습니다. 복수는 잘못된 것이라 할지라도 응당 치러야 할 법적인 대가만큼은 짊어지도록 하게 해야 함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덧 4) 하지만 <인 어 베러 월드>를 통해 종종 간디로 대변되는 비폭력주의가 보여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폭력을 비폭력으로 이길 수 있다"라는 투쟁적인 의미가 아니라, "결코 폭력에 폭력으로 응하지 말고 굴하지도 말라"는 성인의 가르침이었을 것 같습니다. 이 또한 다소 이상주의적이지만 현실을 감안하면 애써 무시하지만은 못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스스로 실천한 자의 설교이니 부정할 도리가 없습니다.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