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량의 사실에 다량의 추측을 더해 세워진 음모이론은 언제나 흥미롭습니다. 그만큼 불신이 팽배한 시대이기도 하고, 때론 이 음모이론이 더럽고 아니꼬운 현실을 보면서도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자신을 위로하는 수단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비정한 세상을 지배하는 힘의 논리 앞에서 나의 몸부림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쯤에 해당하는 무모한 짓에 불과하다며 스스로를 합리화합니다. 이런 심리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항상 실체를 알 수 없는 ‘빅 브라더’가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는 믿음이 성립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전 음모이론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가끔 도가 지나쳐서 무슨 일만 터지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이들을 보면 눈살이 절로 찌푸려집니다. 또 한편으로는 “오죽하면 이럴까?”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한국형 음모이론 영화를 표방하고 나선 <모비딕>의 개봉은 참말로 시의적절합니다. 천안함 사건을 필두로 최근의 농협 해킹 사건까지, 어영부영 설득력도 없이 북한의 소행으로 돌리는 정부를 보면서 저조차도 음모이론의 손을 들어주고 싶어졌습니다. 이 경우에는 음모이론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은 모종의 사건에 해답을 주는 선지자의 역할이라도 하는 것만 같습니다. 정부의 발표를 믿느니 차라리 누군가가 어쭙잖게 짜맞춘 음모이론에 더 신뢰가 갈 지경이니까요. 개인적인 정치성향과는 별개로 한 나라의 대통령이 쥐로 비유가 되는 현실이 씁쓸하면서도, “오죽하면 이럴까?”라고 자문하면 절로 수긍을 하게 됩니다. 아마도 현 정부와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무능한 지배세력으로 남게 되겠죠?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됐을까요?

의도적인 것인진 모르겠지만 <모비딕>에는 현 정부의 단골 메뉴 ‘북한 드립’이 등장합니다. ‘정부 위의 정부’로 묘사되는 조직이 국민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자작극을 벌이는데, 이것을 정부는 북한 간첩의 소행이라고 발표합니다. 이 사건을 취재하던 기자 이방우에게 후배인 윤혁이 오랜만에 찾아옵니다. 알고 보니 윤혁은 테러의 배후에 있는 조직에서 그들의 실체를 밝혀줄 증거를 가지고 탈출한 것이었습니다. 모처럼 기자로서의 사명감에 불이 붙은 이방우는 두 명의 동료 기자들과 함께 진실을 파헤치고자 동분서주합니다. 하지만 이를 좌시할 리 만무한 조직에서 점점 이들의 목을 죄어오고, 이방우를 비롯한 세 명의 기자와 윤혁은 생명에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혹시나 하고 찾아봤더니 <모비딕>은 역시 실화에서 영감을 얻었더군요. 1990년에 만천하에 밝혀진 ‘보안사민간인사찰파문’이 그것입니다. 당시 윤석양 이병은 자신이 복무했던 보안사령부가 1,000명이 넘는 민간인을 정치적인 목적에서 사찰했다는 사실을 폭로했습니다. 영화 속의 윤혁도 처음에 이방우에게 자신이 보안사에서 빠져 나왔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모비딕>은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하여 가상을 보탠 음모이론 영화인 것입니다. 철저한 픽션을 가장한 것이 아닌 만큼 굉장히 흥미로워 보입니다만, ‘영화’가 보여주어야 할 그것을 점수로 매긴다면 합격점을 주기 어렵습니다.

우선 <모비딕>은 음모이론 영화의 기본에 충실하지 못합니다. 모름지기 ‘빅 브라더’가 등장하는 음모이론이라 함은,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게 고작인 수준에 그치는 개인의 무기력함을 밑바닥에 깔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음모이론이라는 가상의 소재가 흥미를 키울 수 있습니다. 토니 스콧 감독의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를 예로 들어볼까요? 이 영화의 주인공은 우연히 만난 대학동창 때문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습니다. 직장도 잃고, 가정도 잃고, 목숨마저 잃을 판국에 처하지만 이 위기를 타개할 방책이 없습니다. 방책은커녕 어디에도 몸을 숨길 수조차 없는 신세입니다. 그야말로 ‘빅 브라더’의 막강한 힘을 보여주는 것이죠. <모비딕>은 이처럼 ‘넘사벽’과 대적하는 미약한 개인이라는 분위기의 조성이 미흡합니다.

전자는 ‘에셜론’을 비롯한 미 국가안보국의 최첨단 장비를 등에 업은 반면, 후자는 1990년대의 한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에서 오는 차이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개 정보국도 아니고 ‘정부 위의 정부’로 등장하는 판국에 <모비딕>의 그들은 참 보잘것없는 조직입니다. 국가고위직에 압력을 넣고 언론을 통제하는 것을 보면 음모이론 영화의 기본에 충실한데, 정작 관객의 감정이입에 필요한 이방우 일행들을 압박하는 행위는 일련의 음모이론 영화에 비해 그다지 위협적이질 못합니다. 고작해야 도청을 하여 뒤를 쫓는 것이 전부라 무슨 동네 건달이나 심부름 센터 직원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때문에 이방우가 전화기 너머에서 도청하는 그들을 향해 절규하는 대목은 좀 성급한 시점이라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물론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감각에 충실한 묘사라고 치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음모이론을 다루기로 한 영화라면 좀 더 과감하게 타이트한 상황으로 몰아가는 연출이 필수입니다. 관객으로 하여금 현실에서의 불안감으로 이어져 과대망상에 빠지게 만들 수도 있게끔 할 정도로 말입니다. 이것이 미흡하다 보니 <모비딕>의 음모이론은 적잖이 싱겁습니다. 결말부의 사건 해결을 가급적이면 현실적으로 풀려고 한 노력 또한 가상하지만, 결과적으로 개연성은 현저하게 떨어집니다. 부당한 현실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효과는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모비딕>은 현실감각과 극적감각의 조화를 제대로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디에 현실감각이 필요하고, 어디에 극적감각이 필요한 것인지에서 계산착오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실패하다 보니 2011년의 관객에게 <모비딕>이 가진 1994년의 음모이론은 대수롭지 않게 보일 뿐입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전 도무지 이 영화가 왜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영감을 준 사건이 1990년에 일어나긴 하지만 굳이 영화의 배경을 1990년대로 설정해야 했는지 의문입니다. 그 탓에 영화가 긴장감을 형성하는 데 실패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1990년대의 이야기를 그 시대에 걸맞아 보이게끔 충실하게 묘사한 것은 좋지만, 이것이 결국 자충수가 된 꼴이란 말이죠. 윤혁이 가지고 나온 디스켓에 걸린 암호를 푸는 황당한 과정도 그렇습니다. 1994년이면 지금의 수준은 아니더라도 각 학교에 컴퓨터가 보급이 됐던 시절입니다. 그렇다면 모르긴 몰라도 제대로 된 해커 하나쯤은 있었다고 설정했을 법도 한데, 그걸 수작업(?)으로 풀고 있는 대목은 오히려 현실감각도 떨어지고 흥미는 더 떨어집니다.

이하 스포일러 주의

윤혁이라는 캐릭터의 활용도도 불만입니다. 목숨을 걸고 정보를 빼온 사람이라면 극의 핵심 키워드나 다름없는 캐릭터인데, 참으로 답답할 만큼 쓰임새가 적어 전개가 더디게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캐릭터를 왜 마지막까지 지리멸렬하게 살려두면서 흐름을 깨뜨리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왜 윤혁이 그런 행동을 했는가에 대한 설명을 하려고 마지막까지 살려둔 것인데, 분명히 극적인 효과를 노리고 의도적으로 결말부에 배치했을 거란 말이죠. 이건 음모이론을 음모이론으로 끝내지 못하고 드라마를 삽입하고자 하는 데서 온 명백한 오류이자 무리수입니다. 이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모비딕>은 연출도 연출이지만 시나리오의 구성이 결코 탄탄했다고 보기 힘듭니다.

말했다시피 <모비딕>의 개봉은 시의절절합니다. 그러나 개봉시점에 비해 영화의 이야기는 얌전하기만 합니다. 그렇게 보자면 이 영화는 개봉시점이 역으로 적절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제 <모비딕>에 나오는 음모이론쯤은 시도 때도 없이 들을 수 있는 동화나 다름없는 세상이니까요. 이왕에 음모이론을 다룬 영화라면 배경을 바꿔서 과거의 현실감각이 아닌, 현재의 그것에 충실했더라면 어땠을까 합니다. 하긴 그랬더라면 정부에서 수색영장이라도 발급받아서 제작사 사무실로 쳐들어갔으려나요? 이런 상상도 결코 허무맹랑하지 만은 않죠? 도대체 어쩌다 이런 꼴이 됐을까요?

★★★

덧) 설마 이걸로 저도 감시목록에 오르는 건 아니겠죠? 어디가 현실이고 어디가 음모이론인지 알 수가 있어야 말이지...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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