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라인>은 먼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어느 행성인지도 밝혀지지 않은 곳에서 주인공 JP, 그의 짝사랑 소노시를 비롯한 드라이버들이 자동차를 타고 치열한 경주를 벌입니다. 이 자동차 경주 대회의 결승전 이름이 바로 레드라인이며, 5년에 한번씩 열려 우승자를 가립니다. 미래인 만큼 반중력 에너지를 이용한 차량 - 이를테면 날아가는 자동차 - 이 등장했지만, 참가자들은 보다 원초적인 질주본능을 자극하는 사륜차에 탐닉합니다. 공식적인 룰조차 없는 이 경주에서 우승하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합니다. 중화기로 상대방의 차량을 날리는 것도 허용됩니다.
더 골 때리는 건, 결승전이 열릴 행성인 로보월드가 레드라인을 인정하지 않음에도 경기를 강행합니다. 다시 말해서 남의 땅에 맘대로 들어가서 경기를 펼치겠다고 공언한 것입니다.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한 로보월드 정부에서는 이들을 응징하겠다고 나섰으니, 참가자들은 자신들끼리 다투는 것으로도 모자라 로보월드 군대의 공격까지 받을 판국입니다. 이 와중에도 우리의 주인공 JP는 오래도록 짝사랑했던 소노시의 꿈을 이루어주고자 목숨을 걸고 극한의 질주를 벌입니다.
이야기가 단순하다고 해서 작품의 가치를 폄하할 수는 없는 법, <레드라인>은 자신의 존재목적에 충실한 결과물을 보여줍니다. 오프닝부터 극한으로 치닫는 질주를 보면 심장이 벌렁벌렁합니다. 때로는 실사영화 - 예를 들어 <분노의 질주> - 가 미처 담아내지 못한, 아니 담아낼 수 없었을 묘한 극적 오르가즘까지 전달합니다. 표현영역의 한계라는 테두리 안에서 볼 때, 제아무리 CG가 발달했다 하더라도 분명 애니메이션이 실사영화보다 자유롭다는 점을 십분 살리고 있는 것이죠. 예를 들어 니트로를 터뜨리는 대목만 해도 <레드라인>에는 실사영화가 보여주지 못한 무언가가 있습니다.
하지만 <레드라인>이 가진 진정한 가치는 전통적인 셀 애니메이션 방식을 고수했다는 것이겠더군요. 보도자료에 따르면 이 애니메이션 한 편을 만드는 데 자그마치 7년, 수작업으로 총 10만 장의 원화를 그리는 데만도 4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아울러 CG를 배제한 상태로 작업을 진행했다고 하니, 이 정도면 제작진들은 자신들이 만든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드라이버들에 버금가는 불굴의 노력을 기울인 셈입니다. 이건 마치 대량생산이 가능하고 편리한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수작업을 고수하는 장인의 정신마저 엿보일 정도입니다.
물론 전부 그렇지는 않지만, 몇몇 분들은 일본만큼은 그래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디지털 음원이 대세임에도 CD를 고집한다거나, 더 거슬러 올라가 CD가 대세임에도 LP나 테이프를 고집했던 것처럼, 일종의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 때문이랄까요? 일전에 일본에서 애니메이션 공부를 하고 계시는 한 이웃님께서는 진한 아쉬움을 토로했습니다. 점점 사람들이 컴퓨터 애니메이션만을 선호하고, 심지어 셀 애니메이션을 무시하는 풍토가 조성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우시다며... 부디 그분을 비롯한 애니메이션 학도들의 꿈이 접히지 않도록 셀 애니메이션이 영원하기를 바랍니다!
★★★★
덧 1) 기무라 타쿠야와 아사노 타다노부의 목소리는 알겠던데, 아오이 유우는 도저히 분간할 수가 없었습니다. 분명히 소노시의 목소리를 더빙한 걸 알고 들었음에도 아오이 유우의 목소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더군요.
덧 2)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사라고 하면 가이낙스, 지브리, 선라이즈 등이 제가 아는 전부였습니다. 이제는 <레드라인>의 매드 하우스도 이 목록에 추가해야 할 시점이네요. <시간을 달리는 소녀>도 동일한 제작사의 작품일 줄이야...
덧 3) 할리우드에서 만든 동명의 레이싱 영화가 있습니다. 자동차 좋아하시는 분들은 재미삼아 보시는 것도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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