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우리나라에서 중국권 영화는 일본의 그것보다 비주류로 밀려난 신세가 됐지만, 1980년~1990년대에는 할리우드와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는 인기를 누렸습니다. <영웅본색>으로 대표되는 홍콩 느와르, <도신>을 비롯한 갬블러 무비, 영환도사와 강시가 등장하는 코믹 호러, <동방불패>로 정리할 수 있는 무협영화 등등. 이 밖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영화가 장르를 넘나들며 국내 관객들의 폭넓은 사랑을 받았었죠. 여기에 장이모와 첸 카이거, 차이밍량, 허우 샤오시엔, 에드워드 양 등의 소위 말하는 예술영화까지 더하면, 그 시절은 바야흐로 중국권 영화의 황금기였습니다.

영화가 높은 인기를 누렸던 만큼 자연스레 배우들도 유명세를 떨쳤습니다. 실제로 이 당시에 해외 배우들이 국내에서 광고를 찍기 시작했는데, 그 첫 포문을 열었던 사람이 다름 아닌 주윤발이었습니다. 주윤발 이후 왕조현, 유덕화, 장국영이 가세했고 소피 마르소, 멕 라이언, 샤론 스톤 등의 서양권 배우도 등장했었습니다. 티비 광고에서는 주로 중국권의 남자배우들을 선호했지만 여자배우들의 인기도 상당했습니다. 임청하, 장만옥, 공리, 구숙정, 장민, 양자경, 종려시, 글로리아 입, 관지림, 오천련, 원영의, 종초홍 등이 수많은 남정네들의 흠모를 받았었죠.

그 중에서도 으뜸은 단연 왕조현일 것입니다. 여자배우로는 거의 유일하게 광고를 찍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왕조현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안드로메다를 향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가공할 인기를 얻는 데 절대적인 공헌을 했던 영화가 바로 <천녀유혼>입니다. <천녀유혼> 없이는 왕조현을 논할 수 없고, 왕조현 없이는 <천녀유혼>을 논할 수가 없을 정도죠. 다시 말해 왕조현과 <천녀유혼>은 동음이의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왕조현의 이미지 자체가 <천녀유혼>에서 얻어진 것이나 진배없으니까요.

새삼스럽지도 않은 얘기지만 이런 영화를 리메이크한다는 것은 도박입니다. 무릇 리메이크는 관객들이 가진 원전에 대한 향수를 뛰어넘어야만 하는 임무를 갖고 태어납니다. 하지만 오리지널에서의 왕조현을 감안하면 이건 애당초 '미션 임파서블'이라고 단언해도 무방하리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게다가 <천녀유혼>은 작년에 개봉했던 <무적자>와는 또 다릅니다. 후자는 그나마 우리나라에서 제작했다는 핸디캡(?)이라도 있었지만 전자는 아니거든요. 그러니 더욱 마음을 비우고 관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었습니다.

2011년의 <천녀유혼>은 1987년작과는 다른 설정에서 출발합니다. 주요 등장인물은 여전히 섭소천, 영채신, 연적하입니다. 이들 중에서 섭소천이 요괴라는 것은 동일하지만 영채신은 남루한 서생에서 나라를 위해 일하는 관리로 등장합니다. 그는 극심한 가뭄으로 사람이 살기 힘들어진 마을을 방문해 물을 찾아나섭니다. 오리지널에서 절정의 무공을 지녔던 연적하는 캐릭터가 변하면서 비중도 더욱 커졌습니다. 속세에 대한 환멸로 절간에서 살다가 영채신 때문에 요괴와의 싸움에 휘말렸던 그는, 이참에 아예 퇴마사로 나와 본격적으로 <천녀유혼>의 액션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이 연적하의 캐릭터는 2011년의 <천녀유혼>을 차별화하고 있는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오리지널에는 없던 설정, 즉 그는 과거에 퇴마사라는 신분임에도 요괴인 섭소천과 사랑에 빠졌던 사이입니다. 이로 인해 사제들을 배신하는 행동까지 하게 됐으나 결국 인간과 요괴는 함께 할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과로 섭소천의 기억을 지워버린 후에 그녀의 곁을 떠났다가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2011년의 <천녀유혼>에서 섭소천, 영채신, 연적하는 삼각관계입니다. 다만 섭소천은 기억이 지워진 탓에 연적하가 자신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모릅니다.

오리지널에 없던 설정에는 이를테면 세 사람의 관계를 부각시켜 비극적인 운명을 더욱 강조하려는 의도가 담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2011년의 <천녀유혼>은 오로지 액션만이 두드러질 뿐입니다. 연적하와 섭소천의 과거사가 다시 불거지는 대목에서 미약하게나마 감성을 자극하려 하지만, 딱히 요괴와 인간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왕조현이 연기했던 섭소천이 청순가련형이었다면 유역비의 섭소천은 말괄량이에 가깝게 그려지고 있다는 것도 이질감을 부추깁니다. 아울러 연적하의 존재감이 커지면서 영채신은 거의 들러리로 전락했습니다.

오리지널과 별개로 보더라도 2011년의 <천녀유혼>은 각색과 연출에서 조악합니다. 이 영화를 보면 1987년에 <천녀유혼>을 만든 정소동의 연출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재삼 실감하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섭소천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가를 보면 두 영화의 완성도가 극명하게 갈림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미모라면 유역비도 왕조현에 견주어 부족하지 않은데, 그걸 엽위신 감독이 제대로 살려주질 못하고 있습니다. 옷자락을 휘날리며 영화 안팎에서 남자들의 애간장을 태우던 왕조현의 섭소천과 유역비의 섭소천은 레벨 자체가 달라서 비교조차 불가할 지경입니다.

이건 단순히 제 기억에 남은 오리지널에 대한 향수에서 비롯된 핀잔이 아닙니다. <천녀유혼>의 이야기에서 섭소천의 역할을 보면 저와 같은 엽위신의 연출은 재해석의 여지로 용납하기에는 무리가 따릅니다. 요괴와 인간의 비극적인 사랑을 부각시키려는 계산을 깔고 삼각관계로 엮었는데, 요괴가 매력적이지도 않고 로맨스가 애절하지도 않은 건 치명적인 오류죠. 뿐만 아니라 유머감각이나 시대적 배경과의 결합에서도 2011년의 <천녀유혼>은 정소동 감독의 그것에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냥 <천녀유혼>에서 로맨스를 대거 퇴색시킨 그저 그런 무협영화라고 보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

덧 1) 엔딩 크레딧에 나오는 장국영을 추모한다는 글귀가 무색할 정도로 영채신의 비중이 낮은 건 대체 어쩔 건지... 그게 송구스러워서 오리지널의 주제곡을 그대로 가져다 쓴 건가? 조금이라도 만회하려고?

덧 2) 왕조현이 요괴 할머니로 출연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바람을 가져봤습니다.

덧 3) 1987년작을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천녀유혼>은 원작이 따로 있으며, 1960년에도 영화로 제작된 바가 있습니다. 따라서 '오리지널'이란 표현은 잘못된 것이지만 편의상 그렇게 사용했음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덧 4) 지금 봐도 왕조현은 넋을 빼앗길 만큼 아름답습니다. 부족한 연출을 감안하면 유역비도 나름 선방했습니다.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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