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르>의 연출을 케네스 브래너가 맡았다는 소식에 의외라는 반응을 보인 사람이 저뿐만은 아니리라 확신합니다. 더 솔직히 말하면 의외 정도가 아니라 깜짝 놀라고도 남습니다. 적어도 케네스 브래너의 이력을 아는 분들이라면 그럴 겁니다. 연극으로 경력을 시작한 이 남자는 주로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고전문학의 영향 아래에서 영화작업을 했습니다. 전 부인인 엠마 톰슨과의 관계도 연극이 계기가 됐었죠. (최고의 파트너라고 여겼던 두 사람의 이혼은 여전히 안타깝습니다)

케네스 브래너가 이쪽으로 계속해서 집중했다면 아마 역대 최고로 꼽히는 로렌스 올리비에의 뒤를 이었을 겁니다. 이런 사람이 난데없이 히어로 무비를 택했으니 의외일 수밖에요. 케네스 브래너가 <토르>를 연출한 건 마크 웹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예상 밖의 결과입니다. 물론 이전에도 그가 꼭 셰익스피어의 작품만 연출했던 것은 아닙니다. 할리우드 데뷔작이자 제가 처음으로 봤던 케네스 브래너의 작품 <환생>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본격 오락영화의 표본 장르 - <다크 나이트>의 파급 이후에도 여전히 - 인 히어로 무비라면 얘기가 또 다릅니다.

어쨌든 마블이 케네스 브래너를 <토르>의 감독으로 지목한 데는 명백한 이유가 있을 터, 가만 생각해보니 전혀 의외인 것만은 아니더군요. 우선 <토르>는 타 히어로와 달리 북유럽 신화를 바탕으로 하여 탄생했습니다. 국내 광고에서 내세우는 것처럼 여타 히어로가 인간인 데 반해 토르는 엄연히 '신(神)'이죠. 따라서 정확한 공통분모를 제시할 순 없지만, 신화와 고전문학은 어떤 접점을 마주하고 있을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합니다. 더 나아가 신화 역시도 고전문학의 범주에 들어갈 것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이런 배경이 케네스 브래너로 하여금 <토르>를 탐하게 했을 듯합니다.

실제로 영화를 보면 이런 추측이 꽤 설득력을 얻습니다. 오딘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큰 아들인 토르와 둘째 아들인 로키가 암묵적인 경쟁을 하고, 이것이 발단으로 작용하는 것부터 고전문학의 그것이 떠오릅니다. 오만방자한 꼴을 보이다 오딘의 눈밖에 나서 지구로 추방당한 토르가 내뱉는 어투도 고전문학의 문체를 가지고 있음은 당연지사입니다. 토르와 함께 지구로 떨어져 바위에 박힌 '묠니르'를 뽑으려고 각지에서 몰려드는 사람을 보며 <아더왕>을 연상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겁니다. 이런 것들이 의도적인 계산의 결과물인지는 모르겠지만 케네스 브래너에게는 잘 어울리는 요소입니다.

<토르>에서 케네스 브래너는 유머 감각도 꽤 발휘하여 근엄해야 할 신이 종종 웃음을 선사합니다. 병원에 누워서도 전지전능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토르는 딱 <비지터>의 고드프로이를 연상시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부분에서 케네스 브래너답지 않은 것은 못내 아쉽습니다. <토르>는 이를테면 <헐크>보다는 <인크레더블 헐크>에 가까운 영화입니다. 심각하거나 진중하려 하지 않고 보다 오락적인 면에 포커스를 맞춘 듯이 느껴지죠. 개인적으로 그것까지 탓하고 싶은 맘은 없습니다만, 토르가 각성하는 과정이 그다지 매끄럽지 않은 것은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에게 서슴없이 망발을 퍼붓던 그가 지구로 몰락한 직후에 처연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다소 성급한 변화이자 전개였습니다.

시간에 쫓겨서인지 생각이나 고민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토르만큼이나 우직한 이야기를 제외하면 영화는 대체로 맘에 들었습니다. 특히 케네스 브래너에게 기대하지 않았던 <토르>의 시각적인 면에 반했습니다. 오프닝을 수놓았던 '프로스트 자이언트 VS 오딘'의 전투는 예상 외로 박력이 넘쳤고 일부에서는 처절하기까지 했습니다. 아울러 예고편을 보고서 신화를 바탕으로 한 히어로 무비가 아니라 SF에 더 가깝지 않냐고 했었는데, 영화를 보면서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토르>의 신계(神界), 즉 아스가르드는 우리에게 익숙한 그리스/로마 신화의 그것과는 확연한 차별화를 두었더군요. 스탠 리가 애초에 일부러 북유럽 신화를 택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탁월한 선택일 것 같습니다.

아마 <토르>에게 주어진 최우선적인 역할은 스스로의 존립보다는 <어벤저스>와의 연계에 있을 것입니다. 앞에서 말했던 광고문구마따나 인간도 아닌 신이 어떻게 하여 지구의 히어로로 등장하게 되는지를 사전에 설명한다고 할까요? 그런 점에서 보자면 <토르>는 자신의 임무를 제법 성공적으로 완수했습니다. 비록 거창하진 않으나 그렇다고 어설프지도 않게 신계와 인간계 사이에 가교를 놓았습니다. 브루스 배너와 토니 스타크의 이름이 거명되는 것도 <토르>를 보는 또 다른 재미이기도 하고요. 여전히 <토르>가 가진 매력적이고도 독창적인 소재인 신의 고뇌를 볼 수 없었다는 것은 아쉽지만, 제 몫은 했다고 보이므로 합격점을 주고 싶습니다. 때론 가볍게 즐기는 것이 마블의 영화가 추구하는 바이기도 하니까요.

★★★☆


덧1 ) 헤비메탈 그룹 중에 '헤임달'이 있습니다. 이 이름이 북유럽 신화의 수문장이라는 걸 <토르>를 통해 알았습니다.

덧 2) 본편과 엔딩 크레딧이 끝나고 나면 보너스 씬이 있습니다. 그러니 극장 직원의 눈치 따위는 보지 말고 버티세요!

덧 3) 진작에 북유럽 신화를 재탐독할 걸 그랬습니다. 북유럽에 여행가기 전에 읽으려고 샀지만 까맣게 잊고 있었네요.

덧 4) 크리스 헴스워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무해 우려가 됐었는데, 영화를 보니 토르 역으로 딱이더군요. 로키를 연기한 톰 히들스턴은 그보다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로키가 <어벤저스>의 악당으로 등장할 것이라는 루머가 반가울 정도입니다. 애석하게도 나탈리 포트만의 존재감은 거의 두드러지질 않습니다. 아사노 타다노부는 말할 것도 없고...

덧 5) 말했다시피 <토르>의 아스가르드는 신화에 등장할 법한 세계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만큼 낯설면서도 맘에 드는 건, 어쩌면 <스타워즈 에피소드 1, 2, 3>에서 보았던 나부 행성과 닮았다는 인상을 받은 것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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