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는 이 세상 모든 게임 가운데서 가장 '승패'가 명확한 게임이다. 단 한 표 차이 뿐이라고 해도 승자는 모든 걸 얻고, 패자는 무엇도 얻지 못한다. 그래서 모든 선거에서 상황을 치열하게 복기하는 것은 그래서 언제나 패자의 몫이다.

승자는 승리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모든 것이 족하고 용서가 된다. 반면, 패자는 차분히 자신이 왜 졌는가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는 것 외엔 패배의 나락에 떨어진 자신을 돌볼 방법이 없다.

항상 북적이던 후보자 주변은 선거 패배가 확정되는 순간, 냉정하리만큼 고독해진다. 누구하나 남지 않고, 아무도 패자의 내일에 대해선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민주당의 승리라고 쓰고, 한나라당의 패배라고 읽는 4.27 재보선 이후 강재섭, 엄기영 후보는 일순간에 언론의 프레임에서 사라진 이름이 됐다. 손학규, 최문순의 승리가 드라마틱했던 것과 정확히 반비례해 그들의 존재감은 사라졌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자신들이 선거에서 졌다고 생각할까? 이건 승리자의 분석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매우 유의미한 시사점을 던진다. '국민의 승리'(손학규 대표), '강원도민의 승리'(최문순 도지사) 정도로 당선 소감을 전한 승자의 추상성에 비해 패자들의 자기 분석은 훨씬 구체적이고 냉정한 것이어야 마땅하다.

▲ 강재섭 전 한나라당 대표
5선 의원이었던 한나라당 강재섭 전 대표는 이번 선거의 소회를 밝히며 "한나라당이 내년 총선에서 ‘제1당’이 되기는 힘들 것 같다"고 단정했다. 강 대표는 '천당 아래 분당'의 패배를 내년 총선 한나라당 필패의 전주곡으로 받아들여야 한단 점을 분명히 했다. 그는 한나라당 필패론을 제기하며, "SNS를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투표 종료 1~2시간 전에 SNS가 쫙 돌아 젊은이들이 투표장 앞에 줄을 서는 일이 되풀이 될 것"이란 지적이다.

실제로 야당의 압승이긴 했으나 모든 선거구에서 박빙의 승부가 연출됐던 4.27 재보선에 SNS가 끼친 영향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SNS를 주로 사용하는 연령층의 '반한나라당 정서'를 감안할 때, 강 전 대표의 경고는 한나라당에게 닥쳐올 재앙을 구체적으로 예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문제는 한나라당이 이 재앙을 막을 뚜렷한 방법이 없고, 재앙을 인식하고 있는 이들조차 제한적이란 점이다. 알고도 당한다는 옛말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셈인데, 실제로 정권의 실세라는 이재오 특임장관 같은 이는 분당 패배에 대해 "강남 출신의 분당 주민들이 용인 수지로 많이 이사를 갔다"는 꿈보다 해몽 수준의 인식에 머무르는 모습을 보였다.

젊은층의 투표율이 높아지면 패배를 직감하게 되는 정당에게 어떤 미래가 있을 수 있을까? 당장에 '천당 아래 분당'에서 패배했다는 것보다 여권이 더 아파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 딛고 있는 존재 기반 자체가 점점 노쇠화된다는 점일지도 모른다.

비교 자체가 무색할 정도로 월등한 인지도를 보였던 엄기영 강원도지사 후보가 패배한 결정적 이유는 그가 선거 기간 내내 추상적 언술로 일관했기 때문이란 분석이 많다. 실제로 최문순 도지사는 TV 토론에서 엄 후보를 압도하며 선거 판세를 다잡아갔다. TV 앵커 출신으로 사회 전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을 것 같던 엄 후보는 막상 뚜껑을 열자 '콘텐츠 부족', '알맹이가 없다'는 비판을 받으며 능력치에 결정적 타격을 입었다. 이에 대해 네티즌들은 "엄 후보 책상에 대본하나 놔드려야겠어요"라며 비아냥됐고, 그의 어록은 '개콘'이란 이름으로 유통됐다.

▲ 엄기영 한나라당 강원도지사 후보
그리고 무엇보다 선거 막판 터진 '펜션 불법 콜센터' 문제는 그의 사회적 신뢰도를 결정적으로 파산지은 악수였다. 언론인 출신으로 '공명정대함'을 최대 자산으로 하던 엄 후보는 불법 선거운동을 했다는 사실로 이미지에 치명상을 입었고, 이후 그 불법에서 홀로 빠져나가려 무리한 '발뺌'을 하면서 최소한의 사람됨조차 신뢰할 수 없는 낙제의 지경으로 접어들었다.

엄 후보의 구체성 없음과 무책임함은 선거 패배가 확정된 이후 소회에서도 여지없이 반복되었다. 엄 후보는 "어느 곳에 있든지 강원도의 발전을 위해 힘을 보태겠다"며, "그동안 강원도민으로부터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는 하나마나한 선거 소회를 밝혔을 뿐, 자신의 패배 이유에 대해 구체적 언급을 하지 않았다.

엄 후보의 패배는 여야 모두에게 후보 개인의 대중적 인지도만으로는 선거를 치룰 수 없다는 교훈을 남겼다. 유명한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후보는 모든 정당에게 재앙적 결과가 될 수 있다.

또한, 엄 후보와 관련해 또 한가지 두고 봐야 할 것은, 강원도민의 사랑을 잊지 않겠다는 그가 당장에 자신때문에 선거법 위반자가 되어 벌금 폭탄을 맡게 된 가정주부들을 어떻게 할런지의 여부이다. 현행 선거법대로 한다면 그 가정주부들은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지게 된다. 제공받은 점심값 역시 125배를 물어내게 되어 있어, 최소 25만 원에서 최대 125만 원까지의 과태료를 벌금과는 별도로 내야 한다.

선거 기간 중 엄 후보는 이들의 존재를 자신은 아예 몰랐으며 따라서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앞뒤가 맞지 않는 변명이었지만, 선거 기간 중이라 불가피했다고 하면 이제 선거가 끝났으니 엄 후보도 이 문제에 대해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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