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기영은 세상을 향해 '어처구니'를 묻던 언론인이었다. 그가 세상을 향해 단호한 목소리로 '어처구니없다'를 연발할 때, 그는 한국 사회의 후진성을 나무라는 한 상징이었다.

그가 뉴스룸의 스타였을 때, 그의 말대로 세상의 풍경은 참 어처구니없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성수대교가 끊어졌을 때 그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며 곤혹스러워 했다. 이제는 그가 속해있는 당이 배출했던 전직 대통령들이 천문학적 비자금을 조성했을 때도, 또 바로 그 당이 사과 상자로 비자금을 날랐을 때도 뭇사람들 대변해 '어처구니'를 따졌었다.

'어처구니'는 주로 '없다'의 앞에 쓰이며, 생각 밖으로 엄청나게 큰 사람이나 물건을 일컫는 명사이다. 어처구니의 유례에 대해선 두 가지 설이 있다. 맷돌질을 할 때 맷돌을 돌리는 나무로 만들어진 손잡이에서 유래된 말이라는 해설도 있고, 전통 기와지붕의 처마 끝 용마루 부분에 놓이는 조형물을 일컫는 말이란 해설도 있다. 하지만 마찬가지 의미다. 맷돌을 돌리려는데 손잡이가 없거나, 처마 끝 용마루에 건물을 지켜줘야 할 해태나 용 같은 수호신들이 없는 상황이야말로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다.

▲ 두달째 공석인 MBC 본부장 인사를 위해 8일 오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방송문화진흥회 이사회에서 엄기영 사장이 굳은 표정으로 회의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엄사장은 이날 오전 사퇴를 표명했다. 2010.2.8 ⓒ연합뉴스
엄기영 후보는 MBC 사장을 그만두며 "MBC 파이팅"이라고 외쳤었다. 그 파이팅의 의미를 대체로 사람들은 '싸움'이라고 읽었다. 자신은 미처 다 싸우지 못하고 떠나지만, 남겨진 자들의 기운을 북돋는 것이란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이제 와서 그가 MBC 사장을 그만 둔 것이 자의라고 해봤자, 달라질 건 없다. 엄기영 사장이 물러난 것은 엄기영 개인의 성향, 정치적 지향과는 상관없다. MBC 간판의 지위를 누리던 엄기영 사장은 'MBC를 바꾼다'는 권력의 의중에 존재 자체로 걸림돌이었다.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압력은 노골적이었고, 그 압력을 엄기영 개인이 감당하긴 쉽지 않으리란 MBC 내외부의 공감이 생길 때쯤, 그는 먼저 자리에서 물러났다.

사장에서 물러난 엄기영은 곧 강원도로 주소를 옮겼다. 그는 강원도 지사 출마를 염두에 둔 것이냐고 묻는 기자들을 향해 "심장이라도 빼서 지역에 봉사하고 싶다"는 말로 심경을 대변했다. 누군가는 '과격한 표현'이라고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욕구의 강렬함이 너무 확연하고 공공연한 것이어서 오히려 단순해 보이는 말이었다.

이후 엄기영의 행보는 대표적 언론인에서 초짜 정치인으로 꺾였다. 엄기영은 자신이 누려왔던 과잉된 상징성을 기꺼이 파란 점퍼랑 맞바꾸었다. "MBC 파이팅"을 징후적으로 독해해낸 모든 이들을 머쓱하게 만들었던 엄기영의 행보는 그러나 "심장이라도 빼서 지역에 봉사하고 싶다" 말에서 이미 틀어졌던 것이었고, 아주 오래 전부터 엄기영을 알아왔던 사람들에겐 이미 예견된 움직임이었다.

4.27 재보선 강원도지사 선거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한 엄기영 전 MBC 사장의 행보는 그 자체로 후진적 행태였다. 공영방송 사장이 언론을 장악하기 위해 자신을 몰아냈던 집권당 후보로 보궐 도지사에 도전하는 것 자체는 언론이 여전히 정치에 종속적인 기능을 수행할 뿐임을 드러냈다. 엄 후보는 애써 자신의 선택에 시간차가 있었음을 강조했지만, 사장을 그만 둔 이후 그가 걸어온 길이 이미 정해진 항로대로 착착 진행되어왔음을 부인하긴 어렵다.

▲ 4.27선거를 3일 앞둔 24일 강원도지사에 출마한 엄기영 한나라당 후보가 춘천시 게이트볼 경기장을 찾아 악수를 하며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치인이 된 이후 그는 더 이상 세상에 어처구니를 묻지 않았다. 단순히 묻지 않은 정도가 아니다. 그는 그토록 비판하던 세상의 어처구니가 되고자 했던 사람처럼 움직여가기 시작했다. 선거 초반 '삼척 원전'을 둘러싼 그의 가벼운 행보, 말 바꾸기는 세상을 향해 단호한 논리를 던지던 자신을 스스로 부정하던 행위였다. 권력의 이면을 고발하던 언론인 엄기영은 순식간에 권력의 크기에 따라 얼마든지 존재를 변신시킬 수 있는 반언론적 정치인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엄 후보는 또 한번 결정적으로 퇴행했다. 이제 그는 아예 한국 사회의 후진성 그 자체가 되어가는 모습이다. '불법 콜센터'를 운영한 사실이 적발된 이후 그가 보여주고 있는 행보는 그가 왜 심장을 꺼내면 안 되는지 또 지역에 봉사하겠단 그의 소명의식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참상이 되고 있다.

엄 후보는 평창올림픽 지지 명부를 활용해 제3의 장소에서 불법적인 선거운동을 했다. 야당의 공세도 정치권의 주장도 아니다. 선관위가 현장을 적발해낸 사실이다. 엄 후보측으로부터 일당 5만 원을 받았다는 평범한 주부들이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기를 꺼려 담요를 두르고 연행됐을 정도로 사건의 성격은 명확하다.

이에 대해 엄 후보는 한 치의 반성도 내비치지 않고 있다. 그는 모든 것이 자원봉사자들의 일탈일 뿐, "자신은 관계가 없다"며 오히려 범죄를 적발한 사람들 때문에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강짜를 부리고 있다. 선거전이 과열되고, 경합이 치열한 선거일수록 누구든 유혹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룰을 지키지 않는 게임이 되어버리면 가치를 판단할 수 없게 된다. 이미 소신을 버린 엄 후보는 이제 룰을 버리고 또 민주주의의 가치마저 가벼이 여기는 후안무치가 되어가는 중이다.

엄 후보가 강원도지사에 얼마나 적합한 사람인지를 판단하긴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심의 판단에 따를 뿐이다. 하지만 민심의 판단에 이르는 과정은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지금, 엄 후보가 한 행위는 훗날 법원의 판단에 따라 재선거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막중한 불법이다.

"MBC 파이팅"을 외쳤던 엄 후보가 "강원도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에 도전할 수 있게 된 이유는 단 하나이다. 그가 대부분의 이력을 언론인으로 채워왔기 때문이다. 언론인 엄기영이 단순히 다음 자리로 가기 위해 그를 빛내줄 한 줄의 이력이 아니라면 그가 세상사를 판단함에 있어 여전히 언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선거 하루 전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그는 최소한 진심이 담긴 사과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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