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게 신, 종교, 외계인, 사랑, 미신 등은 동급의 의미를 가집니다. 전적으로 부정하지도 않지만 전적으로 긍정하지도 않죠. 그 중에서도 신, 종교, 사랑은 제가 내린 정의와는 별개로 분명 올바른 역할을 수행하는 바도 있다는 걸 인정합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전 이런 것 따위를 믿고 의지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제가 가지는 의미와는 별개로 다른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준다면, 그것까지 폄하하거나 무시하고 싶지는 않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서 신의 은총을 받았다고 감격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앞에 가서 "웃기는 소리하고 자빠졌네"라고 말하는 안하무인은 아니란 얘깁니다.

미국 박스 오피스 소식을 전하면서 여전히 엑소시즘이 먹힌다며 사뭇 놀랐습니다. 잊을만하면 쏟아지는 지겨운 엑소시스트 영화가 심심찮게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하는 걸 보면 역시 미국은 알다가도 모를 나라입니다. 어쨌든 <더 라이트>는 1위를 차지했으니 뭔가가 있지 않을까 했는데, 초반엔 그런 기미가 살짝 엿보이긴 했습니다. 엑소시즘이라고 하면 오컬트 무비의 전형을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며 현실적인 접근을 보여주죠. 아울러 백발의 노장이 되어서도 존재감이 뚜렷한 안소니 홉킨스의 열연은 단연 돋보입니다. 그러나 <더 라이트>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딱 거기까지입니다.

장의사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마이클은 집에서 벗어나려는 수단으로 신학대에 진학했습니다. 사실 그에게 신앙심은 나중의 문제였고 일단은 홀로 떨어져 지내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신학교에서의 수양으로도 달라지는 게 없다면 자퇴를 하기로 결심했는데, 끝내 그는 신과 종교를 부정하고 자퇴를 요청합니다. 그러자 평소에 마이클을 눈여겨본 교수가 바티칸에 가서 엑소시즘 수업을 참관해볼 것을 권합니다. 마지못해 이를 수용한 마이클은 엑소시즘에 관한 교육을 받으면서도 곱지 않은 자세를 보입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베테랑 엑소시스트인 루카스 신부를 만나게 됩니다.

어떤 영화든 재미를 확보하려면 관객으로부터 공감대의 형성을 담보로 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제게 <더 라이트>는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감정이입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영화의 내용은 사실상 뻔합니다. 신부의 길을 걸으면서도 신을 부정하던 사람이 일단의 과정을 거쳐 신앙심을 되찾게 된다는 것이죠. 이 비슷한 소재는 일찌감치 엑소시즘 영화의 원조인 <엑소시스트>에서부터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종교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엑소시즘 영화는 종종 신앙심을 두텁게 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다른 게 있다면 <더 라이트>의 마이클은 저보다 더 심할 정도로 신을 부정합니다.

<더 라이트>에는 이러한 주인공의 캐릭터를 재미있게 드러내는 장면이 있습니다. 바티칸에 막 도착한 마이클이 숙소에서 소변을 보며 고개를 돌리자 열린 문 저편에 성모상이 있습니다. 그걸 보곤 어떻게 했을까요? 화장실 문을 닫아버립니다. 이건 이를테면 마이클이 성모를 종교인의 우상이 아닌 여자로 생각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만큼 신앙심이 희박하다는 걸 알리고자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한 셈입니다. 피식 웃음을 짓게 하는 장면이었는데, 이 때문에 더 관심 있게 지켜봤습니다. 제가 마이클의 입장이 되어 신앙심을 가지는 과정에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 알고 싶었죠.

초, 중반만 해도 짐짓 잰 척하며 종교인의 우월한 의지와 신앙심을 보이는 영화와 달라 맘에 들었습니다. 안소니 홉킨스가 연기한 루카스 신부는 일련의 엑소시스트 영화에 나오는 그들과는 좀 달랐습니다. 유머감각도 있고 때론 경박스러워 보이기도 했죠. 그런가 하면 시간에 쫓기자 대충 기도하고, 잔뜩 의문에 사로잡힌 마이클이 첫 엑소시즘을 보고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자 뭘 기대하고 온 거냐는 투로 말하기도 합니다. 전 오히려 이것이 더욱 인간적으로 보여 호감이 가더군요. 이 호감이 끝까지 이어졌다면 좋으련만, 결과적으로 <더 라이트>도 딱히 설득력을 심어주진 못했습니다.

결정적으로 마이클이 심경의 변화를 갖게 되는 과정의 묘사가 불충분합니다. 그토록 신앙심이 희박하고 신을 부정하던 자라면 그에 걸맞은 원인이 있을 터입니다. <더 라이트>도 그걸 알고 마이클에게 어떤 트라우마를 심어줬는데, 정작 관객에게 들이밀면서 해소하는 대목, 즉 마이클이 신앙심을 되찾게 되는 과정의 묘사는 싱겁기 짝이 없게만 느껴집니다. 신이 있다면 악마도 있다는 해묵은 명제를 뒤집어 적용하려는 시도는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해 신선함을 유지하지 못했고, 종교적인 색채가 짙어 처음의 기대와는 다르게 시간이 흐를수록 역으로 거부감만 생성했습니다.

★★★

덧) 아무래도 <1408>은 미카엘 하프스트롬이 뒷걸음질 치다가 쥐를 잡은 영화였나 봅니다. 갈수록 실망스럽네요.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