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사치에는 핀란드의 한 도시에서 자그마한 식당을 열었습니다. (영화에서 정확한 지명은 나오지 않았던 것 같지만 눈에 익숙한 곳이 많은 걸 보니 아마도 헬싱키인 듯합니다) 그녀는 특이하게 해외에서 알아주는 일본의 대표적인 음식인 초밥을 외면하고 주먹밥에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카모메 식당은 연일 파리만 날리고, <갓챠맨>의 주제가로 인해 첫 손님이 된 토미는 그나마 매일 무료로 커피를 마시는 특권을 누립니다.

하루는 사치에가 핀란드의 유명한 캐릭터인 무민의 동화를 읽고 있던 미도리에게 다가갑니다. 참 엉뚱하게도, 그 이유는 바로 <갓챠맨>의 주제가를 물어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용케 그걸 다 외우고 있던 미도리는 즉석에서 술술 가사를 써내려갑니다. 노래까지 불러가며 적는 걸 보면 두 여자가 엉뚱하기로는 동급입니다. 미도리가 하고 많은 나라 중에 핀란드로 여행을 오게 된 과정마저도 엉뚱하죠. 이렇게 해서 만난 미도리와 사치에는 함께 카모메 식당을 운영하기로 합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카모메 식당에는 몇 명의 사람들이 더 찾아옵니다. 다들 겉으로 드러내진 않지만 하나같이 영혼의 상처를 간직한 사람들입니다. 사치에 또한 그러한데, 이들은 서로 어우러지면서 자신과 타인의 아픔을 보듬고 그것을 치유해갑니다. 그럴수록 카모메 식당은 손님들로 붐비기 시작하여 사치에는 어느 때보다도 행복한 감정에 사로잡힙니다. 어쩌면 사치에에게 있어서 카모메 식당은 배를 채워주는 곳이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의 상처를 보듬고 영혼을 채워주려는 목적의 공간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카모메 식당>은 제가 그토록 좋아하는 일본영화의 전형입니다. 등장인물의 아픔을 표면적으로 대두시키지 않는 절제가 있고, 풍경과 에피소드가 공히 시끌벅적하거나 요란하지 않은 채로 여백을 담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고 소소한 유머까지 가미한 덕분에 <카모메 식당>은 마치 일본의 음식처럼 정갈한 영화로 다가옵니다. 관객의 감정선을 자극하진 않지만, 그 울림이 전해주는 이야기는 가슴 속에 글꼴크기 30포인트 이상의 글씨를 진하게 써내려갑니다.

전 일본영화, 그 중에서도 특히 드라마의 어렴풋함이 참 좋습니다. 우리나라나 할리우드의 그것과는 달리 일본의 영화는 확연하고 명료한 이미지를 머릿속에 각인시키지 않습니다. 대신에 시종일관 잔잔하고, 뿌연 안개로 가려진 듯한 잔상을 남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여운을 음미하게 만든다는 것이죠. 때문에 종종 영화가 끝난 후에는 백지상태에서 한동안 멍하니 화면을 응시하게 됩니다. 이 느낌을 잊지 못해서 일본의 드라마를 사랑합니다. 며칠 전의 일본여행에서 외곽지역을 돌며 제가 받았던 느낌이 정확히 그랬습니다. 소박하고 한적하며 그윽한 풍경이 가슴을 적셨습니다.

한편으론 핀란드를 여행하기 전에 <카모메 식당>을 보지 못한 것은 아쉽습니다. 그랬다면 헬싱키에서 좀 더 보람찬 일정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미도리와 사치에가 장을 보던 시장과 마사코가 늘 통화를 하던 장소는 확실히 눈에 익은 곳이더군요. 전 해외를 여행하면서 시장에 들러 활기와 온기를 느끼길 좋아합니다. 몇 번의 여행에서 방문했던 시장 중에서는 핀란드 헬싱키의 그것도 있습니다. 화창한 날씨에 수제품을 가지고 나와서 팔던 사람들, 어눌한 한국말로 인사하던 아가씨 등이 정겨움을 더해주던 곳이죠. 물가가 좀 비싸서 시장답지 않은 시장이었지만 ㅎㅎ

여행을 하면서 얻은 최고의 수확 중 하나는 그 나라의 영화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카모메 식당>은 일본영화지만 핀란드를 배경으로 한 덕에 쉬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미도리가 핀란드인의 독특하고 낙천적인 성향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하자 토미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자신들에겐 숲이 있다고. 이 대사를 듣는 순간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더군요. 북유럽이 간직한 천혜의 자연을 칭송하는 언사는 이미 입이 마르고 침이 닳도록 쏟았지만, 핀란드는 특히나 끝도 없이 이어지던 숲이 장관을 이루었던 나라입니다. 괜히 핀란드를 두고 '숲과 호수의 나라'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도 꼭 한번 가보세요. 왜 자연보호가 필요한지 금세 깨닫게 되실 겁니다.

또 하나의 수확은 바로 그 어디에도 지상낙원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단적인 예로 영화는 물론이고 온갖 문학과 미술 등의 예술분야에서 파리는 늘 낭만적이고 기품이 넘치는 도시로 그려졌습니다. 그래서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파리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환상을 품고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저 또한 그랬지만, 실제로 본 파리는 머릿속에 담고 있던 이미지와 사뭇 달랐습니다. 도착한 첫날부터 거지들이 득실거리고 쓰레기가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모습에 충격을 받고 말았습니다. 또한 오랜 역사를 간직한 도시니 고풍스러우면서도 어쩜 그리 지저분할 수가 있는지 의아했습니다.

<카모메 식당>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미도리의 눈에 핀란드 사람들은 다 행복한 줄 알았는데 실상은 그게 아니었던 것이죠. 그 얘길 듣고 사치에가 말합니다.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슬픈 것은 슬픈 것이고 외로운 것은 외로운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다를 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인생사의 필수요소라면 필시 희로애락일 터, 살아가는 동안에는 기쁨과 행복을 맛보는 순간이 있다면, 슬픔과 노여움을 겪는 순간도 찾아오기 마련이겠지요. 그렇게 선망하는 파리에서 살게 된다면 여러분은 과연 행복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카모메 식당>의 결말은 해피엔딩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마지막까지 사치에가 안쓰러웠습니다. 제가 본 그녀는 상처 입은 고슴도치 같은 사람입니다. 오프닝에서 흘러나오는 내레이션이나 주먹밥을 일본의 소울푸드로 꼽으며 식당의 주메뉴로 삼게 된 배경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머니를 여의고 일 년에 두 번씩 주먹밥을 만들어주시던 아버지와 생활한 사치에는 아마도 누구보다 외로운 시간을 보냈을 겁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에게 따스한 손길은 내밀지언정 진심으로 마음의 문을 열어주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혹은 방법을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치에를 조금씩 변화시킨 것이 토미와 미도리 그리고 마사코 등의 사람들입니다. 이들과 어울리면서 사치에는 마음에 온기를 되찾기 시작했고 점점 카모메 식당을 찾는 손님들도 늘었습니다. 음식을 만드는 데, 관계를 맺는 데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를 알게 된 덕분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치에는 미도리가 훌쩍 떠나는 날이 오더라도 그리워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태연하게 말합니다. 이 얘기를 듣고 섭섭함을 감추지 못하는 미도리를 보면서도 사치에는 전혀 난처해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철학을 들려줍니다."언젠가는 모든 것이 다 변해가기 마련이다"라고.

일찍이 어머니와의 이별에서 온 충격 때문일까요? 사치에는 누군가와의 깊은 관계로 인해 자신이 받게 될지도 모를 내면의 상처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듯합니다. 즉 상처를 받는 것이 두려워 미리부터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그에 비하면 사치에는 '훌륭한 인사'를 할 줄 아는 다정다감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전 그녀가 지금보다 더 연약한 사람이길 바랍니다. 아파할 줄 알고 그리워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으면 합니다. 그럴수록 관계의 소중함을 절실히 알아가게 될 테니까요. 만약 그런 날이 찾아온다면 사치에도 사랑에 빠지게 되지 않을까요?


★★★★☆


덧) '관계'야말로 여행에서 얻은 최고의 수확입니다. 몇몇 글에서 "인간은 섬이 아니다"라는 표현을 수차례 사용했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비록 예전과 달리 외로움의 감정을 쉬이 느끼게 됐다는 부작용은 있지만, 적어도 지금은 상관없습니다. 외로움을 느낄수록 뒤늦게나마 관계의 소중함을 깊이 체감할 테고, 평생 혼자 살 건 아니니까요 ㅋㅋ (설마...)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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