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부터가 <안티크라이스트>인 이 영화에 대해 더 이상 무슨 정보가 필요할까요? 감독의 배짱이 보통은 넘는구나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반골기질이 다분하고 고집도 셀 것 같은 라스 폰 트리에입니다. 그는 이른바 '도그마 95'로 명명된 운동의 주창자입니다. 야심차게 영화의 순수성을 되살리자는 기치를 내걸었지만 당시에는 단 네 명을 제외하곤 아무도 동참하지 않았었죠. 그나마 라스 폰 트리에를 포함한 그 네 명은 모두 덴마크 감독이었습니다.

<안티크라이스트>는 벌써 2년 전에 전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았던 작품입니다. 국내에서는 올해 초에 개봉한다는 소식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이제서야 극장에서 만날 수 있게 됐습니다. 개봉 전부터 이 영화가 연일 관객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는 포스터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칸 영화제에서 상영이 됐을 때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죠? 그런데 난리를 일으킨 당사자가 라스 폰 트리에라면 사실 뭐 새삼스럽지도 않습니다. 일찌감치 <백치들>로 칸 영화제를 발칵 뒤집었던 전적이 있으니까요. 더군다나 이건 <안티크라이스트>라는 발칙한 제목을 달았으니 안 봐도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습니다.

어쭙잖은 리뷰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이실직고하겠습니다. 국내에서는 삭제된 버전으로 상영된다기에 과감하게 암흑의 세력과 결탁하여 <안티크라이스트>를 봤습니다. 어느 정도의 수위길래 칸 영화제에 참석한 기자들까지 격분했는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본 것도 아마 칸 영화제 상영버전은 아닐 것 같습니다만, 어쨌든 소감은 차차 밝히겠습니다. 이하에는 스포일러가 기술될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읽어도 별 지장은 없을 것으로 사료되오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안티크라이스트>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오프닝부터 파격적입니다. 그걸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그만 피식 웃어버렸습니다.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를 본 건 오랜만이라 언제부터였는진 모르겠지만, 도그마 95를 그 스스로도 버렸는지 흑백으로 촬영했더군요. 게다가 슬로우 모션으로 잡아낸 미려한 움직임의 영상에 걸맞은 음악도 가미했습니다. 그것도 헨델의 '울게 하소서'를 말입니다. 워낙 유명한 곡이라 다들 잘 아시겠지만 '울게 하소서'는 오페라 '리날도'에 삽입된 아리아입니다. 오프닝을 보면서 제가 웃을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 원인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음악의 어머니라 불리는 헨델은 오페라의 대가입니다. 중세의 예술이 대개 종교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듯이 헨델의 음악도 그것을 찬양하는 색을 띄고 있었습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오라토리아의 제목만 해도 '메시아'입니다. 이 이전에 완성한 오페라 '리날도'는 십자군 원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십자군 원정의 실체가 무엇인지 구구절절 읊을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리날도'의 내용을 보면 아주 가관입니다. 겉으로 보면 애절한 사랑이야기인 것 같지만 어처구니없게도 무슬림이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막을 내립니다. 실질적으로 기독교 만세를 부르짖는 것에 다름 아니죠.

라스 폰 트리에는 이런 오페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인 '울게 하소서'를 배경음악으로 깔았습니다. 제목부터가 <안티크라이스트>인 영화에서 말입니다. 당연하게도 이건 두 말할 것 없이 의도적인 연출입니다. 대놓고 조롱하거나 비아냥거리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해도 저만의 억측 혹은 망상은 아니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니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개인적으로는 이런 잔망스런 감독을 보는 게 언제나 즐거운 일입니다. 이에 비하면 윌럼 데포와 샤를롯 갱스부르의 섹스씬에서 성기의 삽입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건 제게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안티크라이스트>는 갖가지 상징과 은유가 난무하고 있어서 이해하기 쉬운 영화는 결코 아닙니다. 솔직히 저도 이 영화를 온전히 받아들였다고 말하진 못하겠습니다. 라스 폰 트리에가 <안티크라이스트>에서 취하고 있는 표현의 도구가 꽤 노골적이라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여기저기서 충격과 공포를 운운하는 논란이 빚어졌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메시지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진 않습니다. 명확한 것이라곤 <안티크라이스트>라는 제목이 거의 유일합니다. 그만큼 난해합니다만, 몇 가지만 알아두면 최소한 이 영화가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는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오프닝도 그렇지만 샤를롯 갱스부르가 쓰려던 논문의 주제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극 중에서 그녀는 아들과 함께 '에덴'으로 들어가서 논문을 쓰려고 했는데, 이때 자료로 활용한 것이 바로 '여성학살(Gynocide, Gendercide)'에 관한 책이었습니다. 이 여성학살의 역사는 곧 신의 뜻이라는 미명하에 특정종교가 행했던 참혹한 사건을 지칭합니다. 대표적으로 마녀사냥이 그러하죠. 일전에 한번 어떤 글에서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마녀사냥이란 결국 종교가 차마 해결하지 못하던 일을 얼버무리거나 무마하고자 여성을 희생양으로 삼은 무자비하고 야만적인 행위라고.

당시 그들이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혼돈의 시대일수록 종교는 나약한 인간을 아우를 수 있는 무소불위의 힘을 갖춘 전지전능함으로 포장되었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고 종교가 인간과 하등 다를 바 없음이 들통 나면 권위는 물론이고 더 나아가 존립 자체가 위협을 받게 됩니다. 이 때문에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약자인 여성을 모함하여 희생양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를테면 일종의 위기를 모면하고자 내놓은 간악한 술책이었죠. 이것에 대해 보다 더욱 근원적으로 접근하자면, 남성은 태생적으로 여성에 대한 컴플렉스 및 공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만 보더라도 이러한 남근적인 사고방식의 관점에서 여성을 매도하고 있는 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을 꾀어 신이 허락하지 않은 열매인 선악과를 먹도록 부추긴 존재가 바로 하와, 즉 이브라고 더 잘 알려진 여성이죠. 다시 말해 성경의 세계관에서 인간에게 원죄가 덧씌워지는 빌미를 제공한 자가 여성이라고 낙인을 찍어버린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와를 아담의 갈비뼈에서 파생된 인간으로 묘사하면서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는 존재임을 선언했습니다. 반대로 성모 마리아는 예수를 잉태했으니, 남성이 바라보는 여성은 창녀와 성녀의 두 가지 이미지로 나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또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마리아는 애당초 원죄가 없는 여성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여기서 말하는 원죄라 함은 남녀간의 원시적인 육체적 관계를 뜻합니다. 그런데 종교를 벗어난 시선에서 바라보자면 황당하기 그지없게도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예수를 잉태했습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마리아는 동정이었다고 하죠. 따라서 '성모'라고 추앙하는 마리아는 인간의 여성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신격화한 초월적인 인간에 더욱 가깝습니다. 이는 곧 지극히 남성적인 종교가 여성의 인간다움을 멸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웃긴 건, 색욕에 눈이 멀기로는 현실적으로 여자보다는 남자가 월등합니다. 이건 뭐 최근의 공창제도에 대한 논란만 보더라도 부연 설명이 더 이상 필요 없죠. 물론 성 정체성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보통 색욕을 해소하는 데는 반드시 여자가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남성들의 궁극적인 성적 판타지는 늘 섹스로 귀결되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을 성녀 아니면 창녀로 구분짓는 남성중심의 판단은 굉장히 이기적이고 우매한 처사죠. 종교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사회의 기준으로도 여성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같은 남성의 입장에서도 심히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남성중심의 종교는 여성에게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남성의 색욕을 자극하고 죄를 짓게 만드는 존재로 비하시키기며 책임을 전가하기도 했습니다. 기록으로 남겨진 성경이 아닌 구전으로 내려오는 그것의 릴리스가 단적인 예입니다. 유대교 신화에 등장하는 릴리스는 아담과 동일한 과정을 거쳐 창조된 인간이었습니다. 성경의 이브와 달리 하나의 독립된 개체였던 것이죠. 그러나 릴리스는 아담에게 복종하기보다는 동등하기를 원했습니다. 급기야 섹스에서도 이것이 문제가 되자 릴리스는 에덴 동산을 떠났는데, 그녀는 후에 악마를 양산하는 존재로 타락했다고 합니다.

동의하지 않으실 분들이 많겠지만 기독교는 본디 죄악의 부여를 기반으로 하여 신앙심을 강요합니다. 앞서 말한 아담과 이브의 일화에 깔린 기저도 동일한 의도를 내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종교가 그릇된 사고관을 주입하면서 인간은 본디 악한 존재이며 신앙을 통해 구원받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특히 여성을 왜곡하여 묘사하면서 억압하고 학대하며 죄악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안티크라이스트>의 샤를롯 갱스부르는 여성학살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점차 세뇌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도 종교의 심판이 가해졌던 사람들처럼 악마성을 가진 여성이라고 인식하고 맙니다.

그런데 <안티크라이스트>는 또 단순히 '여성 잔혹사'라고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 영화에서 윌럼 데포는 종교, 교회, 예수 등으로 해석할 수 있고 샤를롯 갱스부르는 여자 이전에 인간을 상징하는 듯이 보입니다. 일례로 "Nature is Satan's Church"라는 대사의 'Nature'는 자연이라는 뜻과 함께 인간의 본성을 가리키는 중의적인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인간이란 나약한 존재이기에 악마의 꼬임에 쉬이 넘어간다는 종교적 발언을 치환한 표현이겠죠. 아울러 샤를롯 갱스부르가 클리토리스를 잘라버리는 가학적인 행동도, 여자에게만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쾌락을 추구하는 혹은 쾌락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인간의 본성을 거세시키는 종교의 탄압(?)을 극단적으로 표출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를 두고 종교의 올바른 역할이라고 보는 것은 과도한 이상주의적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라는 종교적 세계관을 인정한다면 쾌락 또한 신이 준 선물임을 수긍해야 합니다. 다만 그것이 과도하게 어긋나지 않도록 조율하는 것이야말로 종교가 전도해야 할 윤리입니다. 그렇지 않고 쾌락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죄악이라고 명시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본성을 차단하고 성인(聖人)이 되라는 강요나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그래서 예전부터 기독교의 일부에서도 사제의 결혼을 허용하자는 움직임이 있어왔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하튼 <안티크라이스트>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가히 제목에 걸맞은 작품임입니다. 이것을 시각적인 충격으로 덮어버리기는 분명 아깝습니다. 제 경우에는 여성의 성기, 그 중에서도 가장 민감한 성감대인 클리토리스를 절단하는 장면을 클로즈업으로 잡은 걸 보면서 경악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끔찍한 장면이긴 하지만 이것이 그저 자극을 일삼으려는 얄팍한 수단이 아님에 동의했기 때문입니다. 이 밖에도 해석의 여지가 많은 작품입니다만 이쯤에서 끝맺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어차피 별로 읽히지도 않을 리뷰에 정력을 낭비하는 짓은 삼가하기로 했습니다. 사실 시간도 부족하고...


★★★★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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