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에 유럽 여행을 하면서 축구 경기장을 다수 방문했습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올드 트래포드, FC 바르셀로나 캄프 누, 아스널 에미레이트 스타디움 등 유수 클럽팀의 홈경기장을 비롯해 뮌헨 알리안츠 아레나, 파리 생 드니 등 불과 몇 년 전 월드컵이 열린 경기장도 찾았습니다. 팬들의 꾸준한 관심, 최고 수준의 관리를 통해 경기가 없는 날에도 늘 생기가 돌았던 유럽의 경기장들을 돌아보며 부러움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관심을 갖고 둘러본 경기장이 있었으니 바로 올림픽 경기가 열린 메인 스타디움, 독일 베를린 올림픽 슈타디온과 스페인 바르셀로나 아니요 올림피코였습니다. 1936년에 올림픽이 열리고, 한참 지나 2006년 독일월드컵 결승전이 개최됐으며, 2009년 세계육상선수권까지 연 세계에서 유례없는 '3대 스포츠 이벤트 개최 경기장' 올림픽 슈타디온과 1992년 올림픽이 열린 아니요 올림피코는 올림픽이 열린 지 어느 정도 지난 가운데서도 꾸준하게 지역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오늘날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두 경기장 모두 올림픽 이후에도 각종 스포츠 이벤트를 유치하고, 축구팀(헤르타 베를린, RCD 에스파뇰)의 홈경기장으로 쓰이면서 평일에는 시민들에게 개방(아니요 올림피코는 무료)해 365일 사람이 끊이지 않는 경기장으로 자리매김했는데요. 도심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음에도 사람들이 찾고, 오늘날까지 잘 보존돼 있는 모습을 보며 문득 우리의 올림픽 경기장에 대한 생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 알다시피 올림픽 주경기장은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린 '서울시, 그리고 대한민국의 상징'과도 같은 경기장입니다. 개발도상국도 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는 계기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동-서방 간 화합의 물꼬를 트는 데 기여해 세계 체육사에도 길이 남을 올림픽으로 서울올림픽을 꼽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 서울올림픽의 메인 스타디움이 바로 이곳이었으며, 이곳에서 열린 올림픽 개회식은 역대 최고 수준이라는 찬사를 지금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 축구사에도 길이 남을 경기장으로서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을 결정짓고(1986년), 남북 통일 축구(1990년)가 열렸으며, 세계 최강 브라질을 꺾는(1999년) 등 2002년 월드컵 전까지 한국 축구에 많은 감동과 이야기를 선사한 경기장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은 체육계 뿐 아니라 우리 사회, 역사적으로도 많은 의미를 가져다 준 경기장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올림픽 주경기장은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최근 생긴 중소 규모의 지방 경기장보다도 못한 처지가 됐습니다. 그나마 몇몇 대형 공연이 열리고, 2008년부터 디자인 올림픽(한마당)이 개최되기도 했지만 매년 100억씩, 10년간 약 1000억 원이 넘는 적자를 낳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마저 대관료가 비싸고, 디자인 한마당 역시 올해 완공되는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로 자리를 옮기면서 이제는 사람 한 명 찾지 않는 거의 용도 폐기된 상태로 전락하게 됐습니다.
축구 역시 K3 리그 서울 유나이티드가 홈경기장으로 사용하다 올해부터 노원구 마들 스타디움으로 연고 경기장을 옮겼는가 하면 고연전(연고전) 역시 목동으로 옮기면서 경기장 기능이 사실상 정지된 상태로 놓였습니다. 사람이 찾지 않다보니 내부 시설은 그야말로 흉물스럽고, 잔디는 훤히 드러나 올림픽 주경기장의 위상에 걸맞지 않은 자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지하철 2호선 역으로 '종합운동장' 역이 여전히 존재하고, 경기장 주변에 야구장, 종합체육관 등에서 다양한 경기가 열리며 많은 사람들이 찾는 것과는 아주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문제는 최대 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엄연히 살아있는 올림픽 주경기장을 어떻게 살려낼지에 대해 체육계나 서울시, 그리고 정부 문화체육관광부가 진지한 논의가 이뤄진 적이 있었냐는 것입니다. 조사해보니 지난 2005년에 인라인 전용 테마파크로 꾸미려는 계획이 있기는 했는데 체육계의 반발로 무산된 것으로 보여졌는데요. 꾸준하게 사람이 끊이지 않아야 하는 경기장을 단순하게 놔두기만 하는 것이 과연 체육계나 정부, 서울시 모두 옳은 행동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당연히 황당함만 느껴질 뿐이었습니다.
이렇게까지 된 이상 지금부터라도 체육계, 그리고 정부, 서울시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우리 체육사에 길이 남을 역사성, 상징성을 띤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을 살릴 방안을 찾아야 합니다. 단기간 살려놓고 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먼 미래를 내다보면서 스포츠, 역사, 문화적으로 매우 의미가 있는 시설로 탈바꿈하겠다는 마음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2008년, 대한민국 체육사에 길이 남았던 서울운동장, 즉 동대문운동장이 철거돼 스포츠를 좋아하는 팬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다양한 이야깃거리들을 양산한 그 경기장이 흉물스럽다는 이유로 철거된다는 말을 듣고 뒤늦게 체육계가 부랴부랴 들고 일어났지만 소용은 없었습니다. 결국 스포츠사에 꽤 중요한 역할을 했던 그 경기장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물론 무조건적으로 지키고 굳이 남길 필요가 있느냐는 지적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는 것을 지키고 보존하고 가꿔 나가는 것은 분명히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동대문운동장의 철거, 잠실주경기장의 쇠퇴는 대단히 안타까운 일임이 분명합니다. 지금부터라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서서히 부활의 날갯짓을 펴기를, 그래서 잠실주경기장이 다시 태어나는 모습을 꼭 볼 수 있기를, 그리고 우리 체육사에 상징과 같은 존재로 다시 거듭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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