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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요, 리키’에서 찾은 너무나 낯선 존엄성[기고]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운영위원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운영위원 | 승인 2020.01.02 08:27

[미디어스=강남규] 최근 개봉한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미안해요, 리키>는 특수고용직, 이른바 ‘특고’의 문제를 다뤘다. 그의 영화답게 이번 영화도 사실적이고 직설적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실직한 리키가 택배기사 ‘자영업’에 뛰어들면서 영화가 시작되고, 오늘날 특수고용이 가진 노동착취적 문제들과 그에 따른 택배기사들의 처참한 현실이 100분의 러닝타임 내내 끊임없이 묘사된다. 

소위 선진국이라 일컬어지는 영국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영화 속 장면들은 종종 한국의 현실과 포개지면서 “영국도 다르지 않구나”하는 서글픈 동질감을 이끌어낸다. 실제로 <미안해요, 리키>를 본 한국의 택배 노동자들이 소변 볼 시간이 없어 페트병을 들고 다니는 장면이나 몸이 아파도 꾸역꾸역 출근해야 하는 장면 등을 보고 깊은 공감을 표했다는 기사(<경향신문> 2019년 11월 13일자)가 나오기도 했다. 이러한 공감대를 반영하듯 영화는 조금씩 입소문을 타며 관객을 모아가고 있다.

하지만 <미안해요, 리키>의 모든 장면이 한국의 현실과 포개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어떤 장면들은 한국인의 감각으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을 정도인데, 다음과 같은 장면들이다. 

영화 <미안해요, 리키> 스틸 이미지

리키는 거침없이 말하고 쉽게 화내는 성격이다. 흔히 ‘영국 노동계급’을 묘사할 때 한 전형이라 할 만하다. 물론 축구도 사랑해서, 출신지역 축구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지지한다. 그런 리키가 선덜랜드AFC 지지자인 남성 고객을 만난다. 이 고객은 리키가 입은 맨유 유니폼을 보고 대뜸 왜 지역팀인 선덜랜드(리키는 맨체스터에서 태어났지만 선덜랜드에 와서 일하고 있다)를 응원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러더니 맨유를 조롱한다. 그러자 열이 받은 리키는 고객에게 욕설을 퍼붓고 떠난다. 첫 번째 장면이다.

불같은 성격이 쉽게 바뀌진 않는다. 영화 중반부에 만나는 또 다른 고객은 리키를 깔보듯 대한다. 수령자 신분 확인이 필요한 물품이라 신분증 또는 휴대폰이 필요하다는 리키의 요청에도 귀찮아하며 물건을 강제로 뺏으려 든다. 그러자 리키는 고객의 멱살을 붙잡고 협박하기에 이른다. 고객은 그제야 휴대폰을 가져와 신분을 확인해준다. 두 번째 장면이다. 

우리의 감각에서 이 두 장면은 리키가 무단결근을 하거나 심지어는 아슬아슬한 졸음운전을 하는 장면보다도 치명적으로 느껴진다. 택배기사가 ‘감히’ 고객에게 욕설을 하고 폭력을 휘두르다니, 다음에 올 장면은 분명 해고되거나 최소 중징계를 받는 장면일 것이다. 다음날 회사로 찾아온 고객에게 택배기사가 무릎 꿇고 사과하는 모습도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미안해요, 리키>에서는 놀랍게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 다음 날에도 리키는 여전히 물건을 날랐고, 고객들이 이와 관련해 무언가 민원을 넣었다는 언급도 전혀 없다. 어째서일까? 단순히 시간상의 문제로 언급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소비자인 고객이 서비스 노동자인 리키를 ‘아랫사람’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영화 <미안해요, 리키> 스틸 이미지

영국에서 30여 년 거주한 저널리스트 권석하 씨는 <주간조선>에 기고한 글(“돈보다 존엄성! 갑을 없는 영국”)에서 영국에는 위계적인 갑을관계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가 ‘돈보다 존엄성’을 중요시하며 비굴해지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소비자가 권력을 쥘 여지가 없다는 얘기다. 영국 노동계급 고유의 ‘노동자 문화’가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노동자인 일반 시민들에게 자리 잡고 있다는 점도 생각해 볼 지점이다. 여하간 위의 두 장면은 영국에서 ‘갑질’이 그다지 개연성 없는 주제라는 것을 시사한다. 

<미안해요, 리키>에는 이런 장면도 나온다. 리키의 아내 애비는 방문 요양보호사로 일하며 건별로 급여를 받는다. 고용형태가 구체적으로 언급되진 않지만, 리키의 처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애비가 모처럼 가족과 저녁시간을 갖기 위해 서둘러 퇴근하려던 때, 업체가 갑작스럽게 초과노동을 요구하는 전화를 걸어온다. 애비는 성격이 잔잔한 편이지만, 이때만큼은 전화 너머로 분노를 쏟아내며 거부한다. 고용주의 지시를 거역한 셈이지만, 역시 애비가 해코지 당하는 장면 같은 건 나오지 않는다. 초과노동은 고사하고 회식조차 온갖 변명을 고안해 거절해야 하는 한국인의 감각에는 역시 낯선 장면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영국과 한국의 같은 풍경들을 발견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이처럼 한국과 다른 풍경들을 발견하고 낯섦을 느껴보는 경험도 유의미할 것이다. 영국에서는 가능한 것이 왜 한국에서는 불가능한가? 우리는 위 장면들에서 리키와 애비가 해고되지 않기를 바랐는가? 그랬다면, 한국의 리키와 애비들도 같은 상황에서 해고되지 않기를 바라야 맞지 않는가? 그러기 위해 소비자로서 우리, 또는 직장 상사로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미안해요, 리키>의 세 장면이 2020년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조용히 남긴 질문들이다.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운영위원  webmaster@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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