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흐가 남긴 건 다섯 권짜리 <희망의 원리>. 희망함만이 인간생존, 생명보존, 사회변혁의 원리라는 메시지를 불안한 현대사에 경고문처럼 박아두고 싶었던 것일까? 2011년 다시 꺼내 읽을 고전이다. 어둠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 여전히 폭력이 난무하고, 평화의 전망이 잘 보이지 않는다. “진보집권”의 시나리오가 저 높은 단상에서는 이야기 되는 모양이나, 노동의 생활과 잉여/청년의 일상에 변화의 조짐은 아직 크게 없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희망이 문제다. 절망은 오직 희망함을 포기할 때 들이닥치는 죽음의 질병. 왜 희망을 어둠 속 한줄기 빛이라 하겠는가? 희망은 지금 아닌 시간 즉 유토피아의 갈망이며, 바로 그런 자격으로서 현재의 디스토피아를 공격하는 선한 생명의 바이러스다.

권력은 어떤 희망도 없어 보이도록 만듦으로써 자신의 시간을 지속시키고자 한다. 공포는 희망이 없어 생기는 게 아니라, 희망을 없애려는 권력의 폭력적 조처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희망은 변혁의 상상이자 의지에 다름 아니고, 희망함은 곧 운동이자 정치가 된다. 희망, 절망의 담장을 뚫고 들어온 운동의 약속. 공포의 벽에 붙인 저항의 선언문. 이루어지지 않은 유토피아적 이미지로 번쩍 나타났다 사라지지만, 희망의 찰나적 잔상은 결국 부활의 에너지를 싹틔운다. 이루어질 수 있는 이후/너머의 시간이기에 지금의 시간을 인내할 수 있도록 만드는 정신적 힘. 오랜 야만의 역사, 폭력의 역사가 반증한 것도 다름 아닌 진보의 가치, 인간의 문제와 함께 해 온 희망의 의미일 것이다.

▲ 2011년 4월 2일 방송된 KBS 2TV <세번의 만남> '피터팬이 부르는 치유의 노래-가수 박혜경'편. 가수 박혜경과 레몬트리공작단
채 해빙되지 않은 오늘 이 땅에서 희망을 노래하고 희망을 전하며, 희망 그 자체가 되는 많은 이들이 있다. 희망을 몸소 체현하는, 그렇기 때문에 귀중하고 아름다운 희망의 이웃이라고 하자. 곳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망의 원리를 붙들고 희망함의 의미를 실현하려 노력 중인가? 그들에게 우리는 얼마나 많은 걸 빚지게 되는가? 고마움을 표하고 깊은 인간적 신뢰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희망의 몸짓이 거창한 것만은 아니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를 찾은 최근 몇몇의 소박한 걸음이 바로 놀라운 희망의 사건일 수 있다. 감옥 갔다 온 아비나 생활을 책임진 어미로부터 떨어져, 아픔과 슬픔을 혼자 달래는 아이들을 찾은 이들에게서 우리는 감동적 희망의 원리를 목격한다.

박혜경, 그와 함께하는 레몬트리공작대원, 정혜신 같은 사람이다. 박혜경에게는 <한겨레훅>을 통해 이미 고마움을 표했다. 민중가수”니 “대중가수”니 하는 구분을 떠나, 그 의도나 이후의 여정과 상관없이, 부모 잃은 아이에게 희망이 되려는 결심, 부모만큼이나 상처가 큰 아이들에게 희망을 노래하려는 수고로 이미 큰일을 했다. 쌍용자동차라는 무시된 현장의 잊혀버린 노동자들, 사회가 버린 절망적 해고 노동자들의 아이들과 희망으로써 대면한 당신은 이미 제몫을 했다. 천사가 되고, 피터팬이라 불리며, 동화를 읊으면 어떠한가? 그녀에게 비난을 손가락질을 하는 자가 진짜로 있었던가? 그 비아냥거림을 어디선가 희망의 몸짓으로 대신해보시라. 희망의 작은 행동만큼 용기가 필요한 일도 없을 것이다.

▲ 2011년 4월 2일 방송된 KBS 2TV <세번의 만남> '피터팬이 부르는 치유의 노래-가수 박혜경'편의 정혜신 박사
오래간만에 텔레비전에 나온 정혜신의 얼굴에서 나는 한국사회 전반의 심리적 내상에 하얗게 질린 표정을 발견한다. 그 집단 정신병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다급히 치유하려는 전문가의 절박함을 읽게 된다. 우리 사회 깊은 내상 치료를 왜 운동의 희망, 희망의 운동으로 보는지 금방 깨닫게 된다. 쌍용차 노동자들에게 "늦게 와서 죄송하다“고 했다. 아니다. 당신보다 한참 늦은 사람들이, 나를 포함해 얼마나 많은가? 당신은 이미 소외된 노동문제의 지점, 상처입은 마음에 희망을 되찾아주려 한다. 아무튼 당신들은 해고 노동자와 <장미>를 함께 노래하고, 해고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주며, 상처 깊을 아이들과 함께 놀면서, 큰 희망으로 우리 모두에게 반성을 동반한 감동의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그렇다. 절망적인 듯 한국사회의 내상 깊은 약한 존재, 소수자 우리들에게 희망을 보여주었다. “민중”과 “대중”을 가리지 않고, 착취 받는 노동자와 탈취 당하는 잉여/청년들을 따로 보지 않으면서, 고통 받는 이웃들에게 눈길 돌리는 동정의 감각과 연대의 의식만이 희망이다. 그 순간순간의 실천 노력이 희망이다. 노동을 우리 삶의 문제로 여기고, 해고 노동자의 불안한 삶을 남의 일로 보지 않으면서, 이들과 인간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는 노력 외에 변화의 희망은 없다. 그런 몸짓들이 모여 사회 진보의 희망까지도 만들어낸다. 희망은 고통 받는 타자에게 손 내밀고, 그를 격려하여 일으켜 세울 때, 인간적인 연대가 이루어지는 순간에 섬광처럼 번뜩이며 세상에 강한 울림을 남긴다. 당신들이 보여준 거다.

▲ 2011년 4월 2일 방송된 KBS 2TV <세번의 만남> '피터팬이 부르는 치유의 노래-가수 박혜경'편. 레슬러 김남훈 인터뷰 장면
정혜신과 함께, 레몬트리공작대나 다른 네티즌들과 더불어 쌍용차 해고 노동자와 그 아이들을 찾은 김남훈이라는 “낭만 레슬러” 당신도. 누군지 궁금하면 <세번의 만남>의 전편을 보시라. 중요한 건 이 청년이 카메라에 한 짧고 충격적인 발언. “타인의 고통에 둔감한 모든 사람은 악당”이라고 했던가? 맞다. 진실은 구체적이다. 블로흐의 3000쪽 책을 읽는 고생, 손탁을 찾는 수고를 대신할 진심의 표현이다. 소수자/약자의 고통과 함께 하는 게 희망이고 선이란다. 온갖 이유를 대면서 노동자, 잉여/청년의 고통을 외면하는 자는 절망의 체제에 편승한 악. 고통에 처한 타자의 현실/현실 속 타자에 대한 ‘생각 없음’을 악이라고 단정할 때, 아렌트 또한 인간적 연대, 동정의 연합을 선한 희망으로 전제하지 않았나?

▲ 2011년 4월 2일 방송된 KBS 2TV <세번의 만남> '피터팬이 부르는 치유의 노래-가수 박혜경'편. 가수 박혜경을 인터뷰하는 김효진 PD
마지막으로 꼭 새겨두고 싶은 이름. 김효진. 평범한 레슬러처럼 평범한 피디 아닐까? 그런데 나는 그에게서 절망과 선명히 대비되는 희망을 발견한다. 절망의 나락으로 빠진 KBS에 아직까지 선한 프로듀서와 기자, 노동자들이 남아있음을, 그래서 완전하게 포기하면 안 된다는 희망의 단서를 되찾는다. 그렇다. 절망 가득한 상황에서도 희망의 노력은 완전히 없어진 게 아니었다. 4.3에 맞춰 출연진들에게 검은 상복을 입힌 채 제주도로 간 <1박 2일>의 예능감에서 희망의 감동을 얻듯이, 나는 김효진이라는 프로듀서가 만든 휴먼 다큐멘터리에서 진한 인간의 애정을 느낀다. 해고 노동자와 그 가족의 고통, 그리고 정혜신과 박혜경의 아픔과 공감하면서, 쉽게 눈물 참지 못했을 그를 상상해 본다.

우울의 시대, 이런 울음이 곧 치유이자 희망 아니겠나? 이런 감동의 울음을 터뜨리는 게 희망의 감동을 주는 것 아닌가? 권력이 배제한 노동자들과 자본이 원치 않을 해고자 이야기, KBS 내부관료 또한 불편해 할 말들을 지혜롭게 쫓는다. 깔끔한 영상으로 슬픈 현실 속 희망 소식을 전한다. 이런 노고에서 사회와 접속하고 인간과 연대하는 용기 있는 프로듀서의 미래를 발견한다. 쌍용차의 숨겨진 얼굴을 이미지로 드러내고, 해고 노동자들의 한 맺힌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는 ‘피터팬이 부르는 치유의 노래’ 연출자. 절망적인 것 같던 KBS의 완전히 뭉개지지 않은 희망의 몸짓. 어찌 그 혼자뿐이겠는가? 통제와 배제, 검열과 단속 속에서도 희망의 원리를 잃지 않는 프로듀서들에게 결코 적지 않은 공영방송의 희망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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