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 신작 <고백>은 일찌감치 관람을 원하던 영화입니다. 부천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이후로 반응이 쭉 좋았다는 걸 알고 있었죠. 누차 말했다시피 일본영화를 특히 선호한다는 것도 제 바람을 부추겼습니다.

<고백>을 직접 보기 전까지는 마츠 다카코가 출연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좋은 반응'의 근거라고 해봐야 "재미있더라"라는 말을 들은 게 고작이거든요. 예고편조차 보질 못했고 원작이 있다는 것도 조금 전에야 포스터를 보고 알았습니다. 그래서인지 <고백>이 전해준 충격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 영화는 영상은 물론이고 음악도 여백과 절제를 가미하면서 서정적인 수채화를 연상시킵니다. 이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객관적인 시선을 가지게끔 하는 한편으로, 외피가 감싸고 있는 끔찍하고도 처절한 속내와 마주하면 한 편의 잔혹 동화를 보는 듯한 감상에 사로잡힙니다.

근래 이토록 비극적인 결말을 일본영화에서 본 건 오랜만입니다. 그렇다고 절절하게 사랑하던 연인이 죽으면서 끝나는 멜로 따위를 연상하면 곤란합니다. 한 마디로 <고백>은 암울합니다. '암울하다'는 말은 단순하게 '슬프다'라고 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죠. 네이버 국어사전을 보자면 '암울하다'의 정의는 '1. 어두컴컴하고 답답하다 2. 절망적이고 침울하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기타노 다케시의 하드 보일드 성향이 내비치는 그것과도 다릅니다. 단언컨대 <고백>이 '새로운 차원'이라거나 '획기적'이라는 수식어의 꾸밈을 받아 마땅하다면, 그건 결말부의 공이 상당히 큽니다.

결말 이전에, 어떤 의미에서든 정말 좋은 영화를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습니다. 물론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수작 이상이라면 짧게는 5분, 길어도 10분이면 관객의 이목을 송두리째 빼앗아가기에 충분한 시간입니다. 중학교 교사인 유코가 봄방학을 앞두고 일단의 학생들과 마주한 교실에서 시작하는 <고백>이 정확히 그렇습니다. 미처 감독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관람했지만 이 영화의 오프닝은 순식간에 뇌리에 박히더군요. 개인적으로는 올해 개봉작 중에서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오프닝을 가진 영화로 단연코 <고백>을 꼽고 싶습니다.

종업식을 진행하는 교실의 풍경에서부터 나카시마 테츠야는 자신의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이것만 봐도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서 페이소스를 판타지에 가깝게 버무렸던 실력이 건재함을 알 수 있습니다. 뮤직 비디오 감독 출신인 그는 타케시 시부야의 'Milk'가 흐르는 가운데 티없이 밝게 웃으며 우유를 마시는 학생들을 카메라에 담습니다. 여기까지는 흡사 낙농협동조합에서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우유를 권장하고자 제작한 공익광고인 것만 같습니다. 더불어서 학생들끼리 짓궂은 장난을 치는 장면도 삽입하면서 천진난만함을 더해줍니다만, 정작 중요한 건 이제부터입니다.

오해하기 딱 좋으나 <고백>은 결코 그런 류(?)의 영화가 아닙니다. 되레 정반대라 오프닝부터 확연하게 대비를 이루도록 하는 연출을 선보입니다. 화면을 통해 언뜻 해맑아 보이는 학생들을 조명하는 듯하면서, 동시에 선생님의 말씀 따위는 전혀 듣지 않고 제멋대로인 그들의 모습도 교차시키죠. 요컨대 이를 통해서 나카시마 테츠야는 10대 청소년의 극단적인 양면성을 강조하려 합니다. 이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그의 연출력은 또 어찌나 탁월한지 자신이 부여한 시선을 굉장히 효과적으로 전달합니다. 원작에는 어떻게 묘사가 되어있는지 모르겠지만, 영화로서 이 이상의 연출은 힘들 겁니다.

예를 들어 처음엔 인물의 대사를 제거한 상태에서 청아한 목소리의 노래만 깔고 슬로우 모션과 클로즈 업을 주로 사용합니다. 이내 노랫소리가 점차 줄면서 관객의 귀에는 교실을 가득 메운 시끌벅적한 학생들의 말소리가 들립니다. 화면을 담는 앵글이 다양해지고, 난장판인 와중에도 차가울 만큼 차분한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면, 그제야 좀 전에 본 교실의 인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숫제 아수라장으로 변합니다. 다시 말해 이것이 실상이고 전자는 인위적인 연출을 가미하여 포장한 허위에 해당하는 셈입니다. 이 두 가지 상반된 이미지의 충돌은 묘한 균형을 이룹니다.

무채색에 가까운 톤까지 더해진 오프닝은 실로 의미심장합니다. 사실상 <고백>의 핵심은 이 오프닝에 다 담겼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이것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나카시마 테츠야가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당신들 눈에는 얘들이 활달하고 발랄한 청소년들로만 보이지? 웃기지 마. 똑똑히 잘 보란 말이야. 순진한 양의 탈을 쓴 10대들의 이면엔 선생님의 말씀 따위 전혀 듣지 않고 제멋대로인 악마의 본성이 숨겨져 있어" 이 주장은 <고백>의 문을 여는 선생님, 즉 유코의 고백이 끝나는 시점까지 거듭하여 근거를 제시하면서 반박하기 힘든 설득력을 얻습니다.

선생님이 종업식을 마지막으로 그만둔다고 하자 학생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일부에서는 같잖은 비판을 가합니다. 몇 명은 선생님의 말씀 중에 교실을 나가버리며, 그것으로도 모자라 약한 학생을 밖으로 불러내 천연덕스럽게 괴롭히기까지 합니다. 어디 이뿐일까요? 선생님한테 꾸중을 들은 것이 분하다며 누명을 덮어씌운 여학생의 일화도 들립니다. 아,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이들과 동갑인 또 다른 여학생은 청산가리를 먹여 일가족을 몰살시켰습니다. 뭐 이까짓 건 더 이상 놀랄 일도 아니지만 그러지도 마세요. <고백>의 이야기와 진짜 하이라이트는 이제 시작이니까.

유코의 고백은 수영장에 빠져 죽은 딸을 언급하면서 정점으로 치닫습니다. 처음엔 그저 불운한 사고사인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명백한 타살이었던 것이죠. 심지어 유코가 가르치는 학생들 사이에 범인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범인'들'인데, 유코가 밝혀낸 이들의 범행동기란 건 참말로 철없고 치기 어린 심리에서 비롯됐습니다. 'A'는 삐뚤어진 발상으로 자신의 천재성을 과시하려 했고, 유코에게 반감을 가졌던 'B'는 'A'의 농락에 넘어가 공범자이기를 자처한 것입니다. 유코는 두 학생에게 복수하고자 에이즈 환자의 피를 우유에 섞었다고 말하며 '고백'을 끝맺습니다.

<고백>은 유코를 시작으로 반장인 미즈키, 'B'의 엄마, 'A', 'B'로 시점을 바꿔가며 극을 전개합니다. 유코를 제외한 네 명은 모두 첫 고백에 담긴 사건 및 거기에서 파생되는 현상을 중심에 놓고 이야기하죠. 그렇다고 <라쇼몽>의 유지를 이어받아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의 다중성을 논할 거라고 기대하는 건 금물입니다. 화자가 여럿이긴 하지만 <고백>의 진실은 절대 불변합니다. 보통은 각 화자의 시선이 보이면서 무엇이 진실이고, 옳고 그름은 무엇인가 따위를 묻지만 <고백>은 다릅니다. 범인들은 순순히 혹은 의기양양하게(!) 죄를 인정하면서 애당초 이견의 여지를 남기지 않습니다.

나카시마 테츠야는 다른 방식으로 시점의 전환을 활용하여 복수의 정당성을 두텁게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고백>을 기어코 충격적인 영화로 완성시키고 마는 결정적인 도구이자 발단입니다. 언뜻 미즈키와 'B'의 엄마의 관점에서 범인들에게 연민과 동정의 시선을 부여하는 척하지만,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극을 더욱 더 파국으로 이끄는 존재로 기능합니다. 뒤를 이어 나열하는 'A, B'의 고백을 듣는 관객들은 어느샌가 적극적으로 유코의 복수전에 동참하게 됩니다. 사회적 차원의 병폐를 향한 시선에서 출발한 <고백>은, 그리하여 결말에 이르면 극명한 장르적 쾌감을 선사합니다.

<고백>은 얼마 전에 관람한 <파수꾼>의 이란성 쌍둥이 같습니다. 이 두 편의 영화는 청소년 문제를 소재로 삼은 것과 그들의 내면을 놀랍도록 잘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물을 담고 있는 용기의 구조와 생김새는 사뭇 다릅니다. <파수꾼>은 예민하고 섬세한 청소년의 심리를 이해하고 보듬는다면, <고백>은 통제불능에 이르러 계도가 무의미하다고 판단하면서 가차 없이 응징합니다. 실제로 <고백>은 줄곧 경멸과 조롱의 시선으로 유코의 반 학생들을 카메라에 담습니다. 존재감이 느껴지는 학생 중에선 단 한 명도 올바른 인간상을 보여주지 않고 있죠.

교권을 무시하는 건 예사입니다. 선생님의 딸을 죽이기까지 했으니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필요할 때는 교사의 책임감 어쩌고 주절거리는 꼬락서니를 보고 있으면 역겨워서 미칠 지경입니다. 범인이 밝혀진 후에 다른 학생들이 보이는 태도는 또 어떻고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등교하는 'A'에게 한다는 말이 "넌 전혀 반성을 안 하지? 유코 선생님이 불쌍하지도 않아!"라니... 영화를 중간부터 보는 사람들이라면 평소에 다른 녀석들은 선생님을 끔찍이 생각한 줄 알겠더군요. 이놈이나 저놈이나 자기 편한 대로 행동하고 지껄일 뿐인데 말입니다.

앞서 <고백>과 <파수꾼>은 공히 청소년의 내면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말을 했는데, 후자의 그것과 달리 전자는 자의식으로 점철된 비루한 습성을 까발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인생을 다 안다는 듯이 번민하고 고민하지만 실은 쥐뿔도 모릅니다. 그저 갓난아기처럼 보채고 투덜거리며 죽음을 가볍게 여기죠. 아울러 서로 잘났다고 떠들어대도 'HIV'니 '에이즈'니 하는 말에 숨을 쉬지 않거나 살결에 닿는 것마저 기겁하며 우왕좌왕합니다. 'HIV'의 감염경로는커녕 공기 중에서 생존할 수 없다는 기본상식도 모르는 것이죠. <고백>의 10대는 딱 이 수준의 우매하고 어리석은 인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문제는 청소년의 책임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비록 학생을 존중하고 진심으로 대하려는 유코와 의욕이 넘치고 열정으로 가득한 신임 선생님을 우습게 여기는 악마지만, <고백>은 근원에 다가서는 최소한의 성찰을 잊지는 않습니다. 현실에 존재하는 궁극적인 악의 형태인 사이코패스 'A'와 일순간의 오판으로 끝내 패륜아로 전락하는 'B'의 가정은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특히 부권이 거의 소멸된 상태라 아버지란 자의 역할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이 두 가지는 'A, B'뿐만이 아니라 딸을 잃은 유코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철딱서니 없이 날뛰는 청소년을 냉혹하게 처벌하는 <고백>은 분명 성숙한 영화는 아닙니다. 통쾌할지언정 뒷맛이 개운한 영화도 아닙니다. 어릴 적부터 무협영화에서 들었던 "복수는 무의미하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을 뿐이다" 따위의 성인군자적 발언에 진절머리가 난 저도, 결말이 더없이 짜릿했지만 그 이상의 의미는 부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비판을 받을 만한 영화 또한 아닙니다. 악마와 악마가 맞부딪치는 <고백>의 일본은 디스토피아요, 아비규환입니다. 이것을 보며 심정적으로 환호해도 이성적으로 동의하는 사람은 드물 겁니다. 이를테면 이 영화는 피도 눈물도 없는 결말을 보여주면서 역설적으로 "자, 당신들이 원하는 세상이 이런 것이냐?"라고 묻는 것만 같습니다.

촉법소년에 대한 고심의 필요성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론이 떠드는 것만큼 아이들이 악하진 않지만 반대로 순수하지도 않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현실에도 영화처럼 촉법소년을 악용하는 영악한 부류가 있습니다. 못 믿겠으면 지금 당장 '촉법소년'으로 네이버 지식인을 검색해서 어떤 글이 있는지 한번 보세요. 처벌이든 계도든 더 늦기 전에 현실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우리나라도 머지않아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겁니다. <배틀로얄, 고백> 등을 보면 일본은 이제 10대 청소년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관용과 자비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것만 같습니다. 더욱이 <고백>은 동정과 연민의 사연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정당화의 수단이 될 수는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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