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작가가 천둥이란 캐릭터를 버린 것 같다. 도갑이의 죽음이 충격이었다고는 하지만 천둥이 그것을 따지기 위해 강포수를 찾아가 행악을 부린 것이 도가 지나칠 정도였다. 대관절 지난 10년 간 무슨 일이 있었기에 천둥이 캐릭터가 이토록 반동이 됐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다. 시청자 입장에서 책을 읽어도 못 읽는 축에 끼는 천정명의 연기를 꾹 참으면서도 짝패를 보는 가장 큰 동기는 의적 활동이 될 것이다. 더러는 멜로를 기대도 하겠지만 크기를 따지자면 의적보다 작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10년 전 성초시의 죽음에 어린 소년의 몸으로 고을 사또를 암살하려고 칼을 품고 저잣거리에 잠복했던 그 천둥은 어디론가 실종했고, 한술 더 떠서 아래적 두령 강포수을 비난하다 못해 침까지 뱉는 지경에 이르렀다. 도갑이에 대한 애정이 커서 그렇다고 이해하기에 강포수를 찾아간 천둥이 하는 말들은 천둥이가 할 말들은 아니었다. 감언이설로 도갑이를 꼬여냈다던지, 그렇게 해서 원하는 세상이 온들 무슨 소용이 있냐는 등 천둥의 말은 앞으로 도저히 의적이 될 것이라 상상키 어려운 것들이다.

이런 천둥이가 도대체 어떻게 의적에 투신하게 될지 의아하기만 하다. 물론 뜨거운 불과 차가운 물을 오가는 단련을 통해서 강철이 만들어지듯이 이런 천둥이 어떤 계기를 통해서 변화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천둥을 의도적으로 보수적인 인물로 덧칠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기는 하다. 인간이 본질의 심성이 잘 변하지 않는 존재긴 해도 환경의 변화로 인해서 몇 번의 터닝 포인트는 있기 마련이다. 그렇게 이해하고자 해도 지난 10년 대관절 무슨 일로 천둥이가 이렇게 변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너무 부족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십년 묵은 체증 같은 천정명의 연기가 역으로 이해가 되려고 한다. 잘하건 못하건 배우라면 자기 역할에 대한 이해와 몰입이 필요한데 이런 식으로 천둥의 캐릭터가 표류해서는 배우의 자포자기의 심정도 가능해 보이는 까닭이다. 물론 그래서는 안 되고 그러지도 않겠지만 하도 답답하니 별 생각이 다 들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주요 인물에 대한 서사구조가 허물어지는 와중에도 여전히 짝패의 특징이랄까 재미는 조연들을 통해 계속되고 있다. 큰년이와 쇠돌이의 야릇한 감정선은 막순이 이참봉을 만나러 다니는 상황이라 더 진행할 수 없는 사정을 먼저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 큰년이와 갑득네의 관계 변화다. 말이 씨가 된다고 10년 전 민란이 났을 때 김진사 집이 털리던 날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너스레를 떨던 큰년에게 갑득네는 “누가 보면 우리가 친한 줄 알겠네”하고 푸념을 했는데 진짜로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발전한 것이다.

사람 관계는 그래서 절대로 장담할 일이 못되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퇴락한 사또와 삼월이의 관계도 김운경 작가의 의도를 잘 살린 에피소드이긴 했다. 특히 본가에 가서 누이 앞에서 “난 이제 삼월이 아니면 못 살아요”하는 부분은 어쩌면 10년 전 민란보다 더 혁명적인 토로가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조선후기 신분제도의 붕괴를 의미하는 아주 고급스러운 은유였다. 가히 김운경 작가다운 작업을 실감하기에 충분한 에피소드였다.

생각해보라. 25년의 시간차가 있기는 하지만, 한쪽에서 막순이는 주인에게 온갖 행패를 당했던 분노를 말하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주인 앞에서 감히 다른 사람이 자기를 사가라고 정한수를 떠놓고 비나이다를 외고 있다. 이런 기가 막힌 대비는 아무 작가라고 나올 수 있는 구성이 아닐 것이다. 이렇듯 김운경 작가는 여전히 조연들을 통한 조선 후기를 읽는 탁월한 해석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불만이라면 주요 인물들에 대한 충분한 설명 없는 혼란스러운 전개가 탐탁지 않고 불안해 보이는 것뿐이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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