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군요. 영화가 끝났을 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는데, 어쭙잖은 리뷰를 쓰려고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가슴이 먹먹해 옵니다. 사실 그래서 쉽사리 리뷰를 쓰려는 마음을 먹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던 것도 같네요. <파수꾼>은 일체의 정보를 모른 채 관람한 영화입니다. 이웃분들의 연이은 호평이 없었더라면 보지도 않았을 확률이 높습니다. 솔직히 요즘은 가벼운 영화가 좋아요. 점점 지쳐가는 스스로를 보고 있는 것도 벅찬데 영화에마저 짓눌리기는 싫었습니다. 그래도 덕분에 직접 보고 나니 기분이 나쁘진 않군요. 이웃분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면서 시작하겠습니다.

여자친구 - 그게 누구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일단 여자 - 를 만나면서 가장 부당하다고 느끼게 되는 부분은, 남자도 심리적인 면에서 여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좀처럼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그러하듯 남자도 질투를 느끼고 상처를 받으며 애정을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여자친구에겐 힘든 일을 얘기할 수 있길 원하고 때로는 응석도 부리고 싶어합니다. 이건 비단 남녀의 문제가 아니라 깊은 인간관계를 가지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라도 형성되는 기본적인 공통 심리입니다. 금성에서 온 여자에게만 허용되는 특권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애석하게도 상당수의 여자들은 이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사회라는 공간에서 가지는 위치에 대해서는 양성평등을 주창하는 사람도, 연애라는 관계에 입각하면 본인에게 유리한 편중된 시각으로 재단하려 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남자는 오대양 육대주를 다 합친 것보다 더 무궁무진한 면적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받아주고 이해해야만 합니다. 자신보다 강인해야 하고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금세 '찌질한 남자'로 낙인을 찍어버립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남자와 여자의 내면 심리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것을 이 영화 <파수꾼>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했다시피 <파수꾼>에 대해서는 어떤 정보도 없이 극장을 찾았습니다. 줄거리가 뭔지도 몰랐고 등장인물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렇게 백지 상태에서 상영관의 전등이 꺼지고 오프닝이 시작되자 배우들이 보였습니다. 화면 전체가 아웃 포커싱으로 잡혀 정확히 확인할 순 없었지만 일단의 불량학생들인 듯했습니다. 그들은 교복을 입은 채 담배를 피우며 한 학생을 구타했습니다. 그걸 보면서 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아... 또 청소년들의 폭력을 다루는 영화인가?"라고. 이 추측은 일면 맞아떨어졌지만, 극이 진행되면서 섣부른 평가절하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파수꾼>은 형식상 미스터리의 틀을 따라 흘러갑니다. 영화는 한 학생이 구타를 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하죠. 이어서 성인남자가 화면에 잡히는 것을 보면서 짱구를 굴렸습니다. "뭐지? 학창시절에 왕따였던 남자가 성인으로 자라서도 트라우마에 시달린다는 건가?". 감독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해답을 보여주며 또 다른 의문을 제시합니다. 실은 이 아저씨는 '기태'라는 학생의 아버지인데, 장례식을 언급하면서 아들이 고인이 되었음을 관객에게 알립니다. 그러니까 별안간 죽어버린 아들에게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내고자 당신이 나선 것입니다.

기태의 아버지는 선생님은 물론이고 아들과 가까웠던 학생들을 만납니다. 생전에 기태는 특히 '동윤, 희준'과 친했는데, 영화는 플래쉬 백을 통해서 세 사람이 곧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들은 매일같이 어울리며 야구를 하는가 하면 여학생들과 단체로 데이트도 즐기면서 친분을 과시하던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사소한 오해로 기태와 희준의 우정에 금이 가고, 급기야 희준은 기태에게 거듭 구타를 당하다가 끝내 전학을 가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됐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동윤과 기태 사이에도 갈등이 번지면서 사태는 악화일로를 걷게 되고 맙니다.

<파수꾼>의 시점은 표면적으로 아들의 행적을 따라가는 아버지의 입장에 위치하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영화에서 시점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오히려 관객으로 하여금 혼동을 초래하게 만들죠. 시종일관 플래쉬 백을 오가는 탓도 있지만, 이 플래쉬 백이 어느 한 명의 시점에 고정되지 않고 제각기 이동합니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만나는 사람의 회상을 따라 시점이 이동하는 것이 아닌가 하겠지만, 그게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오프닝이 그러했듯이 <파수꾼>은 전지적 시점에서 단서를 제공하듯이 하나씩 불규칙적으로 관객들에게 플래쉬 백을 내던집니다.

다시 말해 <파수꾼>의 플래쉬 백은 시점은 물론이고 시간대마저 제각각입니다. 예를 들어 먼저 기태, 희준, 동윤이 둘도 없이 친했던 때가 등장하고, 이어서 사이가 갈라진 후의 관계가 나타나나 싶다가도, 어느새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갑니다. 게다가 각 플래쉬은 여느 미스터리 구조의 영화처럼 동일한 사건을 중심에 놓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파수꾼>은 굉장히 복합적인 플롯을 가지고 있어 눈에 보이는 대로만 쫓다보면 머릿속이 금세 뒤죽박죽됩니다. 이러한 플롯의 배열은 결과적으로 관객에게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극에 몰입할 수밖에 없게끔 유도합니다.

균열의 수준을 넘어 마치 퍼즐처럼 뿔뿔이 흩어진 플롯을 짜맞추다 보면 마침내 내러티브가 완성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사건을 좇다 보면 영화의 핵심을 간과하고 마는 오류를 빚게 된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파수꾼>의 플래쉬 백은 동일한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이뤄져있지 않습니다. 물론 표면적으론 사건이 중심이지만 내면적으로는 각 등장인물간의 관계를 중심에 놓고 있는 이 영화는, 보기 드물게 복합적인 플롯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 사람의 관계, 기태와 희준의 관계, 기태와 동윤의 관계 등을 따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 복잡다단한 플롯을 해체하고 조합한 후에 내러티브를 완성하면, 마지막에 들리는 다음의 대사가 가슴을 후벼팝니다. "네가 최고다, 친구야"

<파수꾼>을 극찬하는 데는 형식적인 구조보다는 채택한 서사의 묘사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싶습니다. 주목을 해야 하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 영화는 치기가 덕지덕지 묻어나는 10대 남학생들을 등장시키고 있음에도 동류의 영화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개중에는 근래에 인상적으로 봤던 <뚝방전설, 폭력써클>도 있지만, 이 영화들은 우열을 가늠하기 이전에 <파수꾼>과는 기준점 자체가 다릅니다. 비단 반항적이고 폭력적인 문제아를 소재로 한 영화뿐만 아니라 범위를 넓혀 청춘영화로 분류를 하더라도 <파수꾼>은 꽤 이질적이고 독보적입니다.

같은 10대라도 주인공이 남학생이냐, 여학생이냐의 기준에 따라 이전의 영화들은 다분히 상반된 스타일을 보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아울러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도 달라지기 마련이었죠. 자아형성의 시기에서 여러모로 방황하는 면을 남학생의 영화가 폭력과 연계하여 그렸다면, 여학생의 그것은 인물의 예민하고도 불안한 내면 심리에 주안점을 두는 경향이 많았습니다. 전자는 굳이 예를 들지 않아도 될 것 같고 후자에 속하는 영화로는 대표적으로 <여고괴담> 시리즈가 있습니다. <파수꾼>이 이질적이고 독보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바로 이 <여고괴담>과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성인을 등장시키는 영화도 성별에 따라 사뭇 달라집니다. 그렇다면 남성성을 도입한 영화로는 아마 <파수꾼>처럼 섬세하고 세밀한 캐릭터를 묘사한 것이 드물 겁니다. 그만큼 윤성현 감독은 10대 청소년의 심리를 놀랍도록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저는 기태를 보면서 불과 얼마 전의, 그리고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제 모습이 투영된 것 같은 묘한 기분마저 느꼈습니다) 처음 <파수꾼>을 만들기로 결심한 계기가 청소년들의 자살을 다루는 언론의 냉담한 태도였다고도 하니, 지금의 완성도는 필시 진정성을 기반으로 하여 쌓아올릴 수 있었던 것으로 확신합니다.

미스터리의 구조를 따라 진행되는 <파수꾼>은 관객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의혹을 품게 합니다. 기태의 아버지가 아들이 죽었음을 드러낸 후에는 "자살인가, 타살인가?"라는 질문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겁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다시 "왜 죽었나?"가 이어집니다. 그렇게 의문을 하나씩 풀어가는 과정에서 기태와 희준의 갈등이 빚어지는 대목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이것이 아마 "왜"에 해당하는 시발점이 되는 것일 테지만, 정말 사소하기 짝이 없는 오해에서 비롯됐습니다. 성장환경은 차치하고 자살로 귀결된 사건이 촉발된 결정적 계기가 고작 그것이었다는 게 허탈할 정도죠.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은 갈수록 꼬인 실타래가 풀리긴커녕 엉키다 못해 가위로 잘라내야만 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기태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고 - 혹은 그러길 꺼렸고 - , 희준은 마지막까지도 그를 이해하고 용서하려는 의지가 없었습니다. 당사자인 둘도 그렇지만 중재해야 할 동윤마저도 의사소통을 이끌어내지 않고 되레 상황을 비약적으로 흘러가게 만듭니다. 이 과정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한편으로는 무엇이 그토록 어려워 진심을 표하지 못하고 가시 달린 말을 주고 받았던 나의, 우리의 자화상을 보는 듯도 했습니다.

한때 자동차에 시동이 걸리지 않는 상황에서 오가는 대화를 가지고, 남녀의 의사소통에 극명한 차이가 있음을 묘사한 글이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걸 보면서 우스갯소리로 치부하지 못한 사람이 저뿐만은 아닐 겁니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이 달리 주목을 받은 건 아니니까요. <파수꾼>은 성별을 뛰어넘어 바벨탑의 건설이 가져온 전 인류의 의사소통의 부재를 논하고 있음에 다름 아닙니다. 자신에게 도전하는 인간들을 벌하고자 신이 언어의 형태를 나눈 그 순간부터, 어쩌면 우린 서로의 감정을 전달하는 방법까지 잊어버린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파수꾼>을 성장영화라고 한다면 영화 안에서 성장한 이는 동윤이 유일합니다. 기태는 상처 받는 것이 두려우면서도 궁지에 몰리기 전까지는 도움을 청할 줄도, 의사를 온전히 표현할 줄도 몰랐습니다. 그런 자신에 대한 불만과 답답함을 다분히 우매한 마초의 본성으로 쏟아냈고, 겉으론 강한 척하면서도 끝내 자살을 택하고 마는 유약한 인물입니다. 그가 자살을 하고 만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파수꾼>을 보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형벌은 사형이 아니라 격리와 단절인 것 같습니다. 이를 설명하는 데 인간은 섬이 아니라는 문구를 구태여 인용할 필요도 없습니다.

희준은 마지막까지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그 역시도 대화에 서투르기는 마찬가지라 불필요한 갈등을 키우는 데 일조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친구가 건넸던 화해의 손길을 거듭 거절하기만 합니다. 물론 그만큼 폭력이 남긴 흉터가 깊기도 했지만, 기태가 죽은 후에도 자신과의 연관성을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할 만큼 이기적이고 무심합니다. 자신의 연락처를 기태의 아버지에게 가르쳐준 친구를 나무라기만 하죠. 왜 아무 상관도 없는 자신을 걸고 넘어지냐고. 희준은 지금까지도 기태가 주고 떠났던 야구공의 의미를 모르고 있을 겁니다. 어쩌면 알고 싶어하지도 않겠군요.

희준과 달리 기태를 이해하고 있었던 동윤은 극 중에서 그 누구보다 무거운 죄의식에 짓눌립니다. 세 사람 다 의사소통에는 젬병이라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동윤은 자신이 저지른 짓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기태가 왜 자살을 택해야 했는지도 유일하게 동윤만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된 사태를 보며 헤어나올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결말부에 동윤의 이러한 심리를 잘 묘사하고 있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에드워드 조지 리턴이 그랬다죠?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그런 의미에 보자면 <파수꾼>은 청소년의 문제를 다룬 그 어떤 영화보다 더 끔찍하고 비극적입니다.

불량하게만 보이고 가해자로 속단하기 쉬운 남학생의 이면을 섬세하게 포착했다는 점에서 <파수꾼>은 이례적인 영화입니다. 아울러 굉장한 설득력과 호소력을 가지고 있어 남자의 내면 심리도 여자와 다를 게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줍니다. 제가 <여고괴담>을 보면서 그랬던 것처럼 여자라면 <파수꾼>을 보면서 적잖이 놀라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요컨대 "소년은 울지 않는다"가 이 영화를 통해 "소년도 운다. 단지 울지 않는 것처럼 보이려고 발악할 뿐이다"라는 문구로 변합니다. 상처 받기 싫어하고, 외로움과 고독을 피하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공통된 내면에 잠재한 나약한 습성입니다.

이처럼 성별과 연령을 떠나 누구나 겪어봤을 보편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점은 영화를 한층 돋보이게 합니다. 서투른 의사소통이 빚은 갈등이라는 점에서는, 등장인물을 연인관계로 바꿔서 동일한 사건을 대입하더라도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을 법도 합니다. 가족관계에 놓더라도 마찬가지고요. 사회적인 차원으로 깊이를 확대하여 기태를 자살로 내몬 근원을 조명하지 못한 것은 아쉽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학교를 거의 존재감이 없게끔 묘사하고 있는 것이 그것을 대신하고 있음으로 보이기는 합니다. 반어법적인 제목에 근거하면, 그들은 전혀 '파수꾼'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담겼겠죠.

★★★★☆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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