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시봉>에서도 드러났지만 많은 이들이 노래에 대한 갈증이 심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더욱 자신들이 즐길 만한 문화를 10대에게 모두 빼앗긴 4, 50대에게 구원병처럼 등장한 '세시봉'은 열광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나는 가수다>역시 이런 기류에 동참한 대표적 프로그램입니다.


누군가는 누군가를 속이고 있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 일곱 명을 한 무대에 세워 놓고 순위를 가리겠다는 <나는 가수다>의 제작 발표회가 있은 후 많은 이들은 우려를 표명했어요. 순위 프로그램도 아니고 어떤 방식으로 이 대단한 가수들을 평가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김영희 피디는 인터뷰에서 감히 그들을 평가할 수 있는 이는 없다고 단언하며 다만, 500인평가단은 관객의 입장에서 대중적인 평가가 가능할 것이라 이야기했습니다. 이는 가수의 능력을 가늠하는 평가가 아닌 그날 참가한 평가단의 감상평으로 순위를 가리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막을 올린 <나는 가수다>는 편집과 과도한 예능만을 제외하면 완벽에 가까운 모습이었습니다.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우리나라 가수들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무대였다는 의미입니다.

시청자들은 가수들의 이 모습을 보고 흥분했고 '세시봉'에 열광하듯 일곱 명의 가수들이 보여준 최고의 무대에 격찬을 보냈습니다. 많은 이들은 아이돌들이 보여주는 현란한 무대만이 아닌 뛰어난 가창력만으로 승부하는 가수들의 무대를 갈구하고 있음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기존 음악 전문 프로그램과는 달리, 승부라는 시스템을 가져오고,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공인된 가수들로 시선을 모은 것은 예능으로서는 최고의 선택이었습니다. 시청자들로서는 보고 싶었던 행복한 무대를 봤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작진들이 공언한 첫 번째 교체자가 나오면서 모든 것들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누군가는 거짓말을 했고 혹은 누군가는 그 거짓에 속아서 분한 마음에 흥분하기까지 했습니다. 너무 다른 지점에서 충돌을 일으킨 제작진, 가수, 시청자들은 재미있게도 하나의 목표에 닿아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최고 가수들의 멋진 무대를 계속 보고 싶다는 열망이지요.

1. 제작진인 우리는 최고의 무대를 계속 보여주고 싶을 뿐이었고

제작진은 '재도전' 카드를 사용하며 논란을 예상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크게 자신들을 탓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저 최고 가수들이 이렇듯 한 번의 무대만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쉽다고 했습니다.

후에 밝힌 이야기이지만 가수들을 섭외하며 '서바이벌'이라는 형식에 부담을 느끼고 있어 언제든 '재도전'은 가능할 것이라고 약속을 했다는 것이지요. 서로 간에 이런 약속이 있었기에 김영희 피디가 '재도전'을 제안하고 가수들에게 선택권을 주는 과정과 김제동이 합의된 사안을 거론한 것 역시 그들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들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던 시청자들은 격분했습니다. 원칙을 정해놓고도 그 원칙을 깨트리는 제작진과 부화뇌동하듯 나서서 '재도전'을 부추긴 김제동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선택을 한 김건모, 격한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낸 이소라는 대중에 의해 만신창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제작진이 7위한 가수에게 '재도전'의 기회는 언제든지 주어진다는 것을 시청자들에게 정확하게 고지했다면 이런 논란은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까지 치닫게 한 것은 전적으로 제작진의 문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김영희 피디가 '잠깐'을 외치며 급하게 회의를 하고 10분 만에 결정한 '재도전'이 급조가 아니라면, 의도적으로 극적인 상황을 만들기 위한 쇼였음이 분명해보이네요. 가수들로서는 제작진과 사전에 합의했던 약속이었기에 당연하다는 생각했겠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시청자들에게 이는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지요.

그럼에도 제작진이 내세운 명분은 최고의 가수들을 떨어트리기 위한 무대가 아니라, 그들에게 기회를 주고 최고의 무대를 즐길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2. 가수들은 그저 노래를 부르고 싶을 뿐이었고

말도 안 되는 서바이벌 게임에 참가하길 원했던 가수들은 없었을 겁니다. 더욱 탄탄한 팬 층을 거느리고 콘서트 무대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대단한 가수들이 굳이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는 '서바이벌'에 참가할 이유는 없으니 말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나는 가수다>에 선뜻 참여한 것은 영향력 있는 피디의 부탁도 중요했겠지만 그보다 더욱 간절했던 것은, 자신들의 음악을 좀 더 많은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탈락이 주는 두려움을 '재도전'이라는 제도로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는 장치가 있었고, 탈락보다는 다른 가수에게 기회를 주는 방식이라는 개념이 설득력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과거 자신들이 지배하던 시절에 느껴보지 못했던 공중파 방송 무대의 힘을 느낄 수 있었고 그 무대가 주는 소중함도 깨닫게 되었다고 봅니다. 노래 하나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는 그들에게 무대란 소규모 공연장이든 공중파 방송이든 동일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대중적 파급력이 큰 공중파 방송 무대는 그들에게 또 다른 의미의 동기를 부여했습니다. 아이돌의 무대만 존재하고 다양한 음악들이 소개되는 음악 전문 방송들이 강제 폐지된 상황에서, 방송에서의 설자리가 급격하게 줄어든 그들은 이런 예능에서라도 자신의 진가를 내보이고 싶은 욕심이 강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주어진 무대에 사력을 다해 임했습니다. 관객과 시청자들 앞에 모든 것을 토해내고 나서야 행복해 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이들은 감동을 하고 눈물을 훔치기도 했습니다. 누구도 이들의 무대를 탓하거나 그들이 물러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첫 번째 7위가 발표되고 격한 혹은 아쉬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서로가 얼마나 힘겹게 이 자리를 만들고 행복해했는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가 이 값진 무대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음은 당연하지요.

이소라가 격한 반응을 보이고 다른 가수들이 한숨을 내쉰 이유도 그런 것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들은 그저 최고의 무대에서 최선을 다해 노래를 부르고 싶었을 뿐입니다.


3. 시청자들은 최고의 무대를 보고 싶을 뿐이었다

논란이 불거지며 많은 이들은 네티즌들의 냄비근성을 들먹이며 모든 잘못을 시청자들의 몫으로 돌리기도 했습니다. 신해철은 김건모를 두둔하며 "가수가 노래하고 싶어 한 것이 죄냐. 사지에 몰아넣으며 '재도전'했다고 범죄자 취급하는 네티즌들이 문제"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마치 네티즌들을 노래하고 싶어 안달인 가수의 기회를 박탈하고 단순히 서바이벌에만 집착하고 있는 모진 존재들로 묘사하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나는 가수다>의 대다수 시청자들은 '서바이벌'에 집착한 존재들이 아니라 가수들의 멋진 무대를 보고 싶어했던 이들이었습니다.

다수는 처음에 누군가가 탈락해야 하는 제도 자체에 대해 비난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떠나가야 한다면 새로운 가수가 그 자리를 채울 수 있기에 이런 아름다운 퇴장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원칙에 입각해 다양한 가수들이 로테이션되듯 멋진 무대를 오랫동안 볼 수 있기를 바란 것이지 게임을 하듯 누군가가 탈락하기만을 고대하며 시청하진 않았다는 것이지요.

만약 제작진들이 방송이 시작되기 전에 "<나는 가수다>는 단순히 서바이벌이 목적이 아니기에 7위를 한 가수에 한해서 한 번의 '재도전' 기회를 주는 것을 원칙으로 하겠습니다"라고 공지했다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질 것입니다. 누구도 김건모의 재도전을 부당하다고 볼 이유가 없으니 말입니다.

제작진과 가수들 간에만 합의된 '재도전'이 당연하다고 강변하면서 제대로 고지하지 않은 잘못은 지적하지 않고, '서바이벌'에만 집착해 누군가가 탈락하기만을 고대한다고 시청자들을 매도하는 것은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말이 가장 적합한 답이 될 것입니다.

시청자들은 실력 있는 다양한 가수들을 보고 싶어 합니다. 이미 '세시봉' 특집을 통해 사회 현상으로까지 확장되는 모습으로 그 욕구를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그럼에도 좋은 시간대 음악방송이란 아이돌 팬덤들을 위한 순위 방송이 전부인 상황에서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아쉬움은 상당했습니다.

가수들이 설 무대가 좁아졌듯 시청자들 역시 보고 싶은 무대를 볼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당한 것이 사실입니다. 매력적이었던 음악 전문 방송을 '시청률'이라는 잣대를 내세워 강제 폐지하고 무대를 잃은 가수들을 예능으로 내몰며 생색내기에 몰두하기 전에 다양한 가수들이 최고의 무대를 선보일 수 있는 방송을 만드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겁니다.

"이건 우열을 가리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우열이 아니라 다 우만 있고 그 중에서 큰 우와 작은 우를 가려내는 것일 뿐이지요"

이번에 1위한 김범수는 순위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순위에 집착한 것은 제작진이었고 이런 순위 경쟁을 통해 긴장감을 유도한 것 역시 제작진이었습니다. 애써 담담하게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한 가수들에게 그들이 내민 순위는 등수를 통해 우열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날 컨디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일부 관객들의 평가일 뿐입니다.

비록 내상을 입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정엽이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결정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밝게 웃으며 떠나면서 <나는 가수다>가 그나마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했습니다.

노골적으로 <나는 가수다>가 존재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아 자막으로 이를 고지하고, 김건모의 터닝 포인트 이야기에 추임새를 넣으며 최고의 프로그램이라고 시청자들에게 강요하는 제작진이 문제였을 뿐입니다. 모두가 최고 가수들의 무대를 보고 싶어 했고, 그들의 대단한 열정에 감동하고 싶어 했을 뿐입니다.

누군가는 누군가를 속였습니다. 그렇게 누군가에 속은 누군가는 마치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속내까지 모두 드러내며 내상을 심하게 입어야만 했습니다. 이제는 치유의 시간이 필요하고 진정 모두가 만족하고 원하는 모습이 무엇인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시간이 왔습니다. 과연 우린 무엇을 원하고 있었나요?


영화를 꿈꾸었던 어린시절의 철없는 흥겨움이 현실에서는 얼마나 힘겨움으로 다가오는지 몸소 체험하며 살아가는 dramastory2.tistory.com를 운영하는 블로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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