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들어 최근 몇년 전까지 한국 축구에서 외국인 감독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아시아 최초 월드컵 4강을 이끈 거스 히딩크 감독을 계기로 외국인 감독에 대한 시선이 달라지면서 K-리그에도 외국인 감독 영입이 적극적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덕인지 외국인 감독들의 활약도 대단했습니다. 2005년부터 다섯 시즌동안 포항을 이끌었던 세르히오 파리아스 감독은 화끈한 공격 축구로 리그(2007), FA컵(2008), AFC 챔피언스리그-컵대회(2009)를 모두 휩쓴 진기록을 세웠고, 2002 한일월드컵에서 터키를 3위로 이끌며 UEFA(유럽축구연맹)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던 세뇰 귀네슈 감독까지 FC 서울 감독직을 3년간 수행하는 등 큰 족적을 남긴 외국인 감독도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2011 시즌 K-리그에는 그 많던 외국인 감독이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지난 시즌 리그 우승을 이끌었던 FC 서울 넬로 빙가다 감독까지 하차하면서 K-리그 16개 구단은 모두 국내파 감독으로 채워지는 보기 드문 광경을 보게 됐습니다. K-리그에 국내파 감독이 모두 자리를 잡은 것은 지난 2001년 이후 꼭 10년 만이라고 하는데요. 특히 40대 감독이 8명에 달하고 평균 연령이 49.7세인 것이 상당히 눈에 띕니다. 이는 K-리그 뿐 아니라 한국 축구 전체적으로도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K리그 2011 킥오프 기자회견에서 16개 구단 감독과 대표 선수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실 외국인 감독의 득세로 국내파 감독에 대한 편견 어린 시선은 한동안 대단했습니다. 물론 이전까지 국내파 감독들이 변화를 지향하지 않고 실력, 기술보다는 인맥, 학연 등에 의존한 팀 운영에 대한 비판도 있었지만 외국인 감독들의 개성적인 축구가 어느 정도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반대로 국내파 감독이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졌습니다. 여기에 국내 선수들의 해외 진출 확대로 해외 축구를 보는 팬들이 많아지면서 '국내 축구가 재미없다'는 인식으로 일반 팬들이 국내파 지도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마저 갖는 계기도 있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국내파 감독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많은 변화를 모색해 나갔습니다. 특히 선수 생활을 은퇴한 지 상대적으로 오래 지나지 않은 이른바 '젊은 지도자'들의 의식 변화가 줄을 이었습니다. 김학범, 장외룡 감독 등은 '공부하는 감독'으로 이름을 날리며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몇몇 감독들은 일부러 유럽이나 남미로 지도자 연수를 떠나 선진 축구를 배워오려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국내파 감독들의 의식, 자세도 변화가 생겼고, 외국인 감독을 넘어서겠다는 의지도 더욱 크게 퍼져나갔습니다.

그리고 국내파 감독들은 하나둘씩 큰 성과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최강희 전북 감독은 꾸준한 선수 육성으로 팀을 정상급 수준으로 끌어올리며 K-리그 정상을 밟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또 박경훈 제주 감독도 '따뜻한 리더십'으로 만년 하위팀 제주 유나이티드를 2위까지 끌어올리며 주목받았습니다. '초보 감독'이라는 비아냥을 들었던 신태용 성남 감독은 패기와 끈기 있는 팀으로 탈바꿈시키며 성남 일화를 명문 구단으로 다시 키우는 데 기여하고, 아시아 챔피언까지 오르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그밖에 조광래 감독은 경남을 맡아 '공포의 외인 구단'다운 면모를 보여주며 빼어난 지도력을 인정받고 국가대표팀 감독까지 이름을 올렸고, 윤성효 수원 감독은 벼랑 끝에 내몰릴 뻔한 수원 삼성을 살려내며 FA컵 정상까지 등극시키며 지난 시즌에 주목받았습니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나름대로 특색 있는 리더십과 팀 운영으로 '재미있는 축구'를 만들어낸 것이 눈에 띈 국내파 감독들이었습니다. 신태용 감독은 감독 경험이 일천함에도 자신만의 색깔로 선수들과 잘 융화돼 데뷔 첫 해 정규리그 2위, 두 번째 해에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이라는 쾌거를 이루며 '한국판 과르디올라(FC 바르셀로나 감독)'라는 별칭을 얻었습니다. 또 조광래 감독은 '조광래 유치원'이라는 이름으로 무명의 젊은 선수들을 길러내는 데 큰 힘을 발휘하는 모습을 보이며 경남 FC를 공포의 팀으로 탈바꿈시키고 한동안 엄청난 주목을 받고는 국가대표팀 감독까지 '승진'했습니다. 그밖에 크게 잘 알려지지 않아도 내실 있는 팀을 만드는데 기여하며 진전된 팀의 면모를 보이는 힘쓴 감독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선수들과의 소통을 원만하게 이뤄나가고, 이전과는 다르게 오직 실력, 기술 위주의 팀 운영으로 팬들이 즐길 만한 팀을 만들어 내면서 스스로 국내파 감독들도 해낼 수 있다는 희망을 곳곳에서 보여줬습니다.

K-리그를 통해 국내파 감독들이 새롭게 거듭나는 장으로 주목받고, 스스로 더 질을 높여가며 이제는 어느 정도 신뢰할 만한 수준에 이르게 됐습니다. 그리고 2011 새 시즌을 앞두고 16개 구단 모두 국내파 감독으로 채워지는 상황을 맞이했습니다. 각 구단들이나 팬들 모두 이제는 국내파 감독들을 믿을 만한 수준으로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국내파 감독들의 성장은 우리 축구의 질을 더 높이는 데도 크게 기여합니다. 이미 중국 C리그에 이장수, 박성화 감독을 비롯해 장외룡, 김학범 감독이 건너가 한국 축구의 위상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해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아시아권을 비롯한 해외 각 지에서 한국 축구 지도자들의 실력을 높이 사고 크게 주목하며 영입 의사 타진이 더욱 높아진다면 태권도, 양궁 등만큼이나 축구를 통해 한국을 알리는 데도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아시아 축구 최강국의 면모를 끊임없이 알려나가는데도 국내 지도자들의 선전, 그리고 성장은 '보이지 않는 큰 힘'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올 시즌 K-리그는 토종 지도자 16명의 지략 싸움으로 그 어느 때보다 불꽃 튀는 접전이 예상되고 있습니다. 더불어 서울, 제주, 전북, 수원 등 4개 팀은 아시아 최고 클럽 3연패를 향한 도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비해 훨씬 더 활기차고 패기 넘치는 국내파 감독들이 더 재미있는 축구, 화끈한 축구로 저마다 개성 있는 지도력을 발휘하며 유럽 축구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주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마 충분히 가능할 것이고, 기대도 됩니다.


대학생 스포츠 블로거입니다. 블로그 http://blog.daum.net/hallo-jihan 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스포츠를 너무 좋아하고, 글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